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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션>은 SF판 출애굽기다

[리뷰] 과학이라는 껍질 속에 담긴 신학과 심리학적 상징들 속속들이 뜯어보기

15.11.09 15:22최종업데이트15.11.0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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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마션>은, 화성 탐사대가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홀로 남겨진 마크 와트니의 분투기와 생존기를 그린다. SF 영화이지만, 종교적 상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하나] <마션>, <라이언 일병 구하기>말고 <엑소더스>와 비교하라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마션>은 화성을 탐사하는 우주인 얘기다. <마션>을 가리켜 '화성판 로빈슨 크루소'라느니, '화성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영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얼핏 보기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이 영화를 심층심리학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이 모세의 출애굽을 다룬 영화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들리 스콧은 종교적 상징, 심리학적 상징을 잘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이다. 모세는 출애굽을 끌고 가기 전에 미디언 광야(사막)에서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광야에서 신(神), 즉 야훼 하나님을 만나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는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집트가 의식의 세계라면 광야는 무의식의 세계다. 그러므로 영화 <엑소더스>는 모세 자신의 의식이 무의식과 만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 무의식을 신(God)에 비유했던 것을 감안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 과학 지상주의에 대한 경고

모래 폭풍을 만난 화성 탐사대는 철수를 결정한다. 자연의 위력 앞에 물러서는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과학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화성탐사대인 아레스 3호는 화성을 탐사하러 갔다가 모래 폭풍을 만난다. 탐사대원 중의 한 사람인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는 강풍에 날려온 파편에 찔려 실종된다. 마크가 죽은 것으로 판단한 탐사대장 멜리사 루이스(제시카 차스테인 분)를 비롯한 대원들은 지구로의 귀환을 서두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탐사대의 철수 원인이 우주선 자체의 과학적 결함 때문이 아니고, 화성의 모래 폭풍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사(NASA)의 천재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우주선도 자연(모래 폭풍)의 위력 앞에서는 불가항력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연에 대한 과학의 취약성을 예로 들어 과학 지상주의, 과학 물신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영화를 시작했다.

노자(老子)의 표현을 빌리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할 뿐, 인간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무서운 존재일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끝에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우주는 우리에게 협조적이지 않아! 한순간에 모든 게 틀어질 수도 있어."

[셋] <마션>의 외피는 과학, 내피는 심리학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의 성격부터 규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영화 <마션>은 최신 과학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적·신화적 상징을 밑에 깔고, 강력한 심리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주인공 마크 와트니의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마크(Mark)는 어원상 '화성(Mars)'을 의미한다. 와트니(Watney)는 어원상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기록한다(record)'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출생(birth)'과 '죽음(death)'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공 마크 와트니의 이름만 보고도 그가 영화에서 화성에 관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기록하는 일종의 사관(史官) 역할을 맡을 것이고, 또 화성에서 상징적인 죽음과 탄생(부활)을 경험하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넷] 마크 와트니, 무의식을 찾아 헤매다

마크 와트니가 목도한 화성의 환경. 마치 사막에 버려진 구도자와 같다. 실제 촬영도 요르단의 한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화성은 아무도 닿을 수 없는 황폐하고 우울한 황무지'다. 아레스 3호 탐사대장인 루이스는 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앤디 위어가 지은 영화와 동명의 원작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황무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세가 파라오의 왕궁에서 도망 나와 은신하며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근신의 세월을 살았던 광야가 있다. 사막교부(Desert Father), 즉 고대 사막에서 금욕과 고행으로 수행하던 기독교 수도승들이 살았던 황무지도 떠오른다. 예수가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기도 했던 유대 광야도 연상된다. 실제로 리들리 스콧 감독은 화성과 가장 닮았다는 요르단의 한 사막 지역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적인 세계가 의식이고, 예측도 통제도 불가능한 비합리적인 세계가 무의식의 세계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속 도시가 우리의 의식이라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혹독한 환경의 사막은 우리의 무의식을 상징한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지구가 우리의 의식이라면, 비과학과 불인(不仁)한 자연 질서가 지배하는 화성은 우리의 무의식이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쫓겨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광야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찾는 탐사의 고행을 했듯이, 우리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화성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찾아 헤매는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다.

[다섯] 죽음 그리고 부활

죽은 줄 알았던 마크 와트니는 간신히 살아 남아 막사로 대피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파편을 스스로 제거한다. 기절했다가 깨어나 살아 나는 과정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겹치는 모습이 있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마크 와트니는 화성 탐사 도중에 모래 폭풍을 따라 날아온 파편에 맞아 실종되었다. 파편은 아레스 3호 탐사대의 우주선 안테나 부품이었다. 우주선이 지구와 소통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안테나가 강풍에 날리고, 주인공 마크가 그 부품에 찔린 것이다. 자신과 소통해야 할 파트너였던 제자 베드로와 유다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서 못 박혔던 예수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마크 와트니의 무의식 탐사 과정이 절대 순탄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강력한 복선이다. 믿었던 제자에게조차 배신당해 지상에서 전혀 의지할 바 없었던 예수처럼, 안테나에 찔려 기절하는 바람에 낙오된 마크 와트니는 혈혈단신으로 이 거친 황무지 화성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려 탐사대가 사용하던 임시 거주용 막사로 들어온 마크. 모세의 텐트, 사막교부의 장막처럼 텐트는 임시 거주지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면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삶에 안정감을 주고 방향감각을 심어주는 제대로 된 집과는 다르지만, 동시에 화성에서의 마크에게는 유일한 피난처(Shelter)이기도 하다.

안테나 부품에 찔려 '기절(상징적인 죽음)'했다가 다시 '깨어난(상징적인 부활)' 마크 와트니는 우선 자신의 상처부터 치료해야만 한다. 마크는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뱃속에 들어온 안테나 못을 겨우 빼낸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들의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도 관찰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거울은 이제껏 지구에서는, 즉 의식의 세계에서는 돌아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의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 측면을 돌아보는 것을 상징한다.

[여섯] 파괴와 정화의 불꽃

나사에서 극도로 싫어하는 불. 그러나 화성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불꽃을 피워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크 와트니가 시도하는 '불'은, 불의 파괴적 속성과 정화·재창조의 속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사막의 수도승들이 척박한 황무지에서 스스로 농지를 개간하고 자급자족했듯이, 마크는 농작물을 재배하여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화성은 숨 쉴 공기, 물, 불, 박테리아 등이 없다. 사막보다도 더 척박하다. 그 광대무변의 무의식 세계에서 마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최소한의 자급자족을 위해 마크 와트니는 거주용 막사 안에서 감자를 재배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려면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불이 필요하다. 우주에서는 화재로 인한 폭발이 가장 무섭기에 우주선은 전부 불연성(不燃性) 소재로만 만든다고 한다. 당연히 임시 막사 안에는 가연성 소재가 없다.

마크 와트니는 동료들이 두고 간 소지품을 뒤진다. 불씨를 만들 소재가 나왔다. 나무 십자가다. 동료 마르티네즈가 나사 당국에 억지를 써서 가져왔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마크는 말한다.

"(예수님!) 당신은 현재의 제 상황을 이해해 주시는 거죠? 부탁해요!"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나사는 불을 싫어한다!"는 마크의 말처럼 불은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불은 마크 와트니가 이전 지구에서의 옛 삶을 불태우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나저나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고, 십자가상이 고난과 희생, 부활의 상징이라지만 예수의 십자가상을 불을 피우기 위한 불쏘시개로 쓰다니…. 오 마이 갓!

[일곱] 인간의 오만, 그 참사

감자를 키워내는 데 성공한 마크 와트니. 그는 화성의 흙에 인분을 비료 삼아 감자밭을 일군다. 그는 화성을 정복했다며 기뻐한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화성에 체류한 지 54일 만에 마크는 드디어 감자의 새싹을 틔워내는 데 성공한다. 새싹은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의미한다. 아레스 3호 탐사대원 중에서 가장 먼저 화성의 흙을 발견했던 사람이 마크 와트니 아니었던가.

흙은 하찮아 보이지만,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특히 척박한 땅에서 새싹을 틔워내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인간의 과학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자연의 영역이며, 종교적으로는 신의 '창조'의 영역이다.

자연과 신을 대신하여, 메마른 땅에 물과 비료를 주고 새싹이 돋아나는 일을 북돋워 주는 것까지가 인간의 영역이다. 마크 와트니가 새싹을 틔워내는 지난한 과정은 신의 영역, 즉 무의식의 영역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인간의 의식의 중심은 자아(ego)인데, 자아가 무의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무의식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겸손한 자세로 무의식과 공감하고 소통하겠다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마크 와트니는 겸손하지 않았다. 그는 지구의 나사 본부와 통신이 성공하고 난 뒤, 그의 생환 소식을 알고 이를 축하해주고 격려해주는 많은 이메일을 받으면서 교만해졌다. 특히 대통령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며 으스댄다. 무명의 우주과학자에서 일약 전 지구적 영웅이 되면서 건방을 떤다.

오만의 극치는 와트니가 자신의 모교인 시카고대학으로부터 받은 이메일 자랑이다. "어떤 지역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데 성공하면, 그 지역을 점령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메일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화성을 지배하게 된 거죠!"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부풀어 오른 풍선이 한 방에 훅 터지듯 '팽창된 자아(inflated ego)'는 터지게 마련이다.

거주용 막사 안에 와트니가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감자밭이 폭발하여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은 겸허한 자세로 무의식과 소통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린 와트니에게 무의식이 하는  무자비한 보복을 상징한다.

한편 와트니가 새싹을 틔운 바로 그 시각에, 지구에서는 와트니의 장례식이 전 세계인의 애도를 받으며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의식의 상징인 지구에서의 삶이 죽어야만, 무의식의 세계인 화성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출생과 죽음의 뜻을 가지고 있는 와트니의 이름처럼 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생과 사를 거듭하고 있다.

[여덟] 마크 와트니의 구도자적 자세

감자를 키우며 화성을 '정복'했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마크 와트니. 그러나 거주용 막사 폭발 사건은 그의 오만에 철퇴를 가한다. 그러나 그는 겸손해질지언정 포기하지는 않는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거주용 막사의 폭발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마크 와트니의 행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마크 와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난 매일 (우주선) 밖으로 나가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본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마크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많은 것을 느끼고, 결심도 하고, 루이스 대장에게 부탁도 한다.

"루이스! 제 부모님을 찾아가 저의 죽음을 전해 주세요. 그렇다고 제가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모든 가능한 결과에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부모님께 제가 제 일을 좋아했고 유능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저의 죽음은 거대하고, 아름답고, 저보다 더 위대한 일 때문이었다고 전해주세요."

리들리 스콧 감독은 와트니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관찰하고 묵상하는 장면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지평선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다. 지평선에서 우리가 잘 아는 땅(의식)과 우리가 잘 모르는 하늘(무의식)이 만난다. 와트니의 모습은 천상 진리를 갈구하고 깨달음을 희망하는 구도자(求道者)적인 자세 그대로다. 팽창된 자아가 폭발하는 경험을 한 와트니가 한층 더 겸손해져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폭발의 손해를 입은 우주 비행선의 문짝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와트니는 비닐과 테이프로 임시로 봉한다. 거주용 막사의 '초라한' 모습은 많이 '겸손해진' 마크 와트니의 내면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영어 단어 'humble'이 초라하다는 뜻과 겸손하다는 뜻을 함께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마크 와트니가 폭풍에 날아가버린 안테나와 함께 끊긴 지구와의 통신망을 재구축하기 위하여 발견한 패스파인더(Mars Pathfinder)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패스파인더는 지금으로부터 근 20년 전인 1997년에 발사된 무인 화성 탐사선이다.

최신 과학으로 만든 통신기구가 아닌 구닥다리(?) 기구를 마크 위트니의 목숨을 구하는 도구로 설정했다. 여기에는 '지혜는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고 무조건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아니 원작자 앤디 위어의 역발상이 담겨있다. 뒤에 말하겠지만 1970년대 노래 '워털루'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패스파인더라는 이름은 일반명사로 탐험자 혹은 개척자의 뜻이다. 그런데 패스(path)는 길이다. 파인더(finder)는 찾는 사람,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패스파인더는 길을 찾는 사람, 도(道)를 구하는 사람이다. '구도자(求道者)'란 뜻이다.

패스파인더가 마크 와트니를 살리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구도자라는 소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험난한 무의식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마크에게 구도자적인 자세는 필수적이다.

[아홉] 맨몸으로 나서는 그, 진인사대천명

마크 와트니에게 구조대를 보내기 위해 나사 본부도 무던히 애를 쓰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와 보급선을 보내게 된 후, 마크 와트니는 목욕재계를 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본격적인 무의식의 탐사에 들어선 마크 와트니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단련되어 간다. 구도자처럼 모든 걸 내려놓은 겸허한 의식의 태도는 무의식과의 소통과 공감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태도다.

지구로부터 구조대와 보급선이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마크 와트니가 샤워를 하고 알몸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온다. 큰일을 앞두고 목욕재계(沐浴齋戒)로 심신을 정결케 하고 기도로 간절히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마크의 누드는 신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맨몸'으로 나선다는 결심을 상징한다.

마크는 구조대 우주선 헤르메스호와 만나기 위해서 자신이 타고 올라야 할 상승선(MAV)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벼워져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놀라고 저항하지만, 이내 순응한다. 나사 본부에서도 상승선 위쪽의 뚜껑을 버리고, 대신 천막 같은 것을 치고 상승선을 발사한다는 위험천만한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드디어 밤낮을 바꿔가며 천신만고 끝에 원래 거주용 막사가 있던 아시달리아 평원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여 상승선이 있는 스키아파렐리 분화구에 도착한 마크 와트니. 그는 사다리를 타고 상승선에 올라 상승선 발사에 꼭 필요한 부분만 빼고는 완전히 버린다. 각종 보급품은 물론이고 에어 로크와 창문, 선체 패널 등 선체 주요 부위를 모조리 버렸다. 상승선 앞머리 부분은 허름한 천막으로 가렸다. 마크의 알몸처럼, 이제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승선은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걸 비워야만 무의식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크는 말한다.

"더 최악인 것은 내가 아무것도 조종할 수 없다는 거죠!"

나사 본부의 반응도 비슷하다.

"일이 잘못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전에 보급선을 보내기 위해 타이양션(아폴로)호를 발사할 때의 나사 본부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자넨 신을 믿는가? 우리 모든 은총을 긁어모아야만 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난 연후에는 하늘에 운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열] 워털루의 나폴레옹, 화성의 마크 와트니

온갖 고난을 겪는 마크 와트니의 투쟁에서, 팝송은 각 장면별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아바의 히트곡 워털루는, 나폴레옹와 마크 와트니를 등치시키며 묘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마크 와트니가 상승선에 올라가 각종 물품과 상승선의 부품들을 버릴 때 나오는 아바(ABBA)의 노래 '워털루(Waterloo)'도 의미가 각별하다. '워털루'는 1970·1980년대 일세를 풍미했던 스웨덴의 전설적인 팝 그룹 아바의 히트곡이다.

"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항복했어/ 음 나도 그와 같이 내 운명이 정해졌어/ 책장에 놓인 책 속의 역사는 항상 그렇게 되풀이되는 거야/ 워털루-나는 졌고 넌 이겼어/ 워털루-영원히 더욱 널 사랑한다고 약속 할께/ 워털루-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워털루-나의 운명은 너와 함께라는 걸 알아."

마크 와트니는 모든 걸 내려놓고 운명의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가 살아날 수 있을지는 신밖에는 모른다. 그러므로 아바의 노래 '워털루'는 와트니의 체념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와트니의 결연한 심리를 보여준다. 헤르메스호의 대장 루이스에게 와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이기적이에요. 오직 나만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오직 나만요!"

워털루 전투에서 진 영웅 나폴레옹. 그러나 역사는 승자인 영국의 웰링턴 장군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패자인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와트니는 자신이 혹시 죽더라도 나폴레옹처럼 나를 기억해 달라는 인간적인 유언을 아바의 워털루를 듣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열하나] 머리 깎고 면도하는 '삭발례'

마크 와트니의 생존에 로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화성을 떠나는 순간에도 로버를 걱정하며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상승선에 오르기 전에 마크는 아시달리아 평원에서 스키아파렐리 분화구까지 자신이 몰고 온 로버 안에서 화성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한다. 마치 예수가 지상에서 최후의 만찬을 했을 때처럼 식사를 마친 와트니. 그는 사관(史官)으로서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죽을지도 모르는 비장한 순간에도 그는 긍정적이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이 로버를 잘 다뤄주세요! 제 목숨을 구했어요."

마크 와트니는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깎는다. 수도회 전통에 따르면 수도자는 허영과 자만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삭발한다고 한다. 있다. 이를 '삭발례(Tonsure)'라고 한다. 삭발례는 옛날 가톨릭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불교에서 보는 삭발의 의미도 비슷하다. 탈속(脫俗)은 자신이 살던 속세를 떠나는 것이고, 옛날의 사고방식과 행동으로부터의 탈피하는 것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원작소설에도 없는 와트니가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하는 장면을 삽입한 까닭은 뭘까. 리들리 스콧은 무의식 탐사 여정의 마지막을 앞두고 헤르메스호와 만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상승선을 타야할 와트니에게 일종의 삭발례와 같은 통과의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같다.

특히 와트니가 삭발을 하기 전에 자신의 옆구리, 갈비뼈 있는 부위의 통증 부위를 살피고 괴로워하는 장면을 삽입한 것 모두 리들리 감독이 명백히 성경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매달려 있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러나온 내용을 의식했다고 본다.

이는 영화 말미에 상승선을 타고 오르던 와트니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것과 병렬시켜 생각해야 한다. 십자기 처형 직후 뼈가 부러지는 것을 면한 예수와 달리, 와트니의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그가 예수와 달리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하는 상징이다. 영화 초반부에 와트니가 화성의 흙을 발견한 사실과 함께 말이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창조할 때 야훼는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을 만들었다. 하찮은 흙에서 만들어진 인간은 그러므로 늘 겸손해야 한다. 또 아담의 '갈비뼈'를 가지고 하와를 만들었다. 즉 성경에서 인류 탄생의 원재료는 흙과 갈비뼈였다.

드디어 상승선에 올라 발사를 기다리는 마크 와트니. 두렵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예수도 두려움에 피땀을 흘렸고 울부짖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물며 와트니는 어떠했으랴.

상승선 타고 오르던 와트니는 기절(일시적 죽음)했다가 깨어나는(상징적 부활)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 한편 와트니가 상승선을 타고 오를 때 상승선 앞부분을 떼어내고 대신 둘렀던 천막이 찢어지는데, 이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을 연상시킨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모세 이래의 율법 시대가 끝나고 예수에 의한 복음 시대가 열린 것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상승선의 천막이 찢어진 것은 와트니 개인에게 있어 구시대가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열둘] 마침내 맞잡은 두 손

영화 <마션>에서 마크 와트니의 귀환을 위해 많은 이가 함께 노력한다. 그 밑바탕에는 이타주의가 깔려 있다. 이타주의는 그저 혈족주의 본능 혹은 상호 이타주의에 기반한 이기적 행동일까?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드디어 와트니는 자신을 구하러 온 헤르메스호의 루이스 대장과 만난다. 기적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 것 같았던 위험천만한 랑데부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헤르메스호에 생명의 줄을 묶고 우주선 밖으로 나온 루이스 대장은 상승선을 타고 화성 상공으로 올라와서 역시 상승선 밖으로 나온 와트니에게 손을 내밀어 구조에 성공한다.

루이스와 와트니가 맞잡은 두 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마크 와트니의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소통하고 지구와 화성이 화해하고 삶과 죽음이 극적으로 화해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화성이라는 낯선 땅에서 조난한 마크 와트니는 이제 무의식과 친구가 되어 의식의 세계인 지구로 행복한 귀환을 하게 된다.

또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상징한다. 서로 맞잡은 루이스와 와트니의 손은 타인에 대한 진정한 공감에서 출발한 '일치(一致)'이자, 사랑과 우정으로 '하나 됨'을 상징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줄을 타고 내려가는 행위에 대체 무슨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혹자는 헤르메스호 승무원들이 와트니를 구조한 것을 두고, 대개의 영화가 영웅신화의 프레임을 차용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폄하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화성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조직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결정한 사안이었다. 이에 반해 헤르메스호 승무원의 결정은 나사 본부라는 조직의 결정에 반하여 일종의 '반란'이었다. 항명에 따른 불이익과 승무원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희생적인 결단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영화에는 승무원들의 결단과 행동으로 표현되었지만, 원작소설에서 앤디 위어는 루이스를 비롯한 승무원들의 이타적인 행동의 동기를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짜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앤디 위어가 말한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은 그냥 한 소설가의 지나가는 듯한 발언이 아니다.

이타주의(altruism)는 최근 진화심리학과 행동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 중의 하나다. 기존의 학자들이 사람들이 타인을 돕는 행동을 단순히 자기 핏줄을 도우려는 혈족 주의(nepotism)에 근거한 본능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상호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즉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대방의 은혜 갚기를 기대하거나 사회적 평판을 높이려는 행동 정도로 깎아내리려는 시각과 대조적인 것이다.

"결국, 통념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돌보도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타인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본성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의 이 말은 앤디 위어가 자신의 소설에서 했던 말과 같다.

요컨대, 영화 <마션>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마크 와트니가 자신의 무의식을 찾아 떠나서 무의식을 만나고 그와 친구가 되어 돌아오는 영화다. 그리고 집단적 차원에서는 루이스 대장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인류의 도덕적 본능을 다룬 영화라 하겠다.

몇 가지 사족
사족① : 마크 와트니가 화성에서 조난한 지역은 아시달리아(Acidalia) 평원이다. 아시달리아는 멕시코 말로 비너스를 뜻한다고 한다. 화성을 뜻하는 화성 마르스(Mars)는 아레스(Ares)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소속된 화성 탐사대 이름은 아레스 3호 탐사대이다. 한편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레스와 비너스는 서로 연인관계이기 때문에, 아레스 탐사대가 연인 비너스가 사는 평원을 찾는 비유는 나름의 신화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사족② : 조난한 마크 와트니를 구하러 오는 우주선의 이름은 헤르메스(Hermes)이다. 헤르메스는 '신의 전령'이다. '천사와 같은 상징'을 가진다. 존경하는 융 심리학자 에딘저의 표현을 빌리면 헤르메스는 '심층심리학을 후원해 주는 신'이다. 헤르메스는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중개'해 준다.

그러므로 헤르메스는 무의식을 찾아 고난의 여정을 떠난 와트니를 구원해 주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헤르메스호의 대장은 루이스라는 여성이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맞이하는 이가 여성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상징적 죽음과 상징적 부활을 거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환된 와트니를 처음 맞는 사람은 여성 멜리사 루이스다.

사족③ : 헤르메스호의 승무원들이 와트니를 구하려고 화성으로 돌아갈 때 보급선을 띄울 또 다른 우주선 로켓의 이름은 타이양션(太陽神)호, 즉 아폴로(Apollo)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폴로신은 음악과 태양의 신이다. 아폴로는 '빛과 진실, 명료함'을 상징한다. 심리학적으로 아폴로는 '합리적 의식의 원리'를 대변한다. '의식 자체의 힘과 미덕'을 나타낸다. 또 아폴로는 '무의식에 대한 두려움을 추방한 신'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힘'이다.

"어떤 경우에도 타이양선호의 도움이 없이는 와트니를 구하러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사 관계자의 말처럼 아폴로는 두려운 무의식의 세계인 화성으로 와트니를 구하러 가는 데 주저 없이 나선다. 그리고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엄청난 수의 중화권 관객을 의식한 듯 영화에서 중국항천국(中國航天局)과 아폴로호의 역할이 원작소설보다 많이 미화되고 과장되기는 했지만, 영화에서 아폴로호는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마션>은 '화성판 로빈슨 크루소' 혹은 '화성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불린다. 일견 타당하나, 단편적인 해석이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마션>은 그 내피에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수입)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시민기자의 페이스북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리틀리 스콧 맷 데이먼 무의식 헤르메스 이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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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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