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누가 민족의 이름으로, 지민과 설현을 단죄하는가

[주장] 당신들이 말하는 민족과 역사, 아이돌 걸그룹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16.05.18 14:58최종업데이트16.05.18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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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OA 지민 걸그룹 AOA의 지민이 16일 오후 서울 광장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네 번째 미니앨범 <굿 럭> 발매 쇼케이스에서 한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역사지식에 대해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정민


걸그룹 AOA의 멤버 지민과 설현이 <채널 AOA>에서 인물의 얼굴과 이름을 맞히는 퀴즈를 풀다가 도마 안중근의 얼굴을 몰라봤다.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긴또깡'이라고, 김두한을 칭하는 일본식 이름을 말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태도가 '역사 인식' 부족이라며 논란을 일으켰다. YTN과 SBS도 이 상황을 진지하게 보도하며 불을 키웠다. 설현과 지민은 사과문을 발표했고, 16일에는 컴백 앨범 발표 현장에서 두 멤버가 참회의 눈물을 쏟았다.

처음엔 비난 여론이 대세였다. 사과문이 발표된 후에는 동정 여론이 고개 들었다. 설현과 지민을 사이에 놓고 두 편의 여론이 각을 세우는 모습이었다. <오마이스타> 지면에도 시민기자들의 다양한 주장이 올라온 거로 기억한다. 비난 여론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거 좀 모르면 어떠냐"는 큰 주장 아래 두 계열로 나뉜다. 하나는 '걸그룹의 무지를 욕하는 너희는 역사를 얼마나 잘 아느냐'인데, 낯선 독립투사들의 사진을 늘어놓고 맞춰보라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정말로 중요한 건 역사적 현안과 정치다, 고작 연예인을 욕할 때냐'이다.

역사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남의 무지만 욕하는 건 우습다. 첫째 주장은 이 점에서 유효하지만, 비난 여론의 핵심은 "기본적인 지식도 없으니까 문제"라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눈높이를 맞춘 반박은 아니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남의 무식을 욕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둘째 주장은 다른 시급한 화제를 들어 쟁점 자체를 우회하고 있으며, 대중문화 또한 정치적 사건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서 지운다. 두 반론 모두 정당하지만 동시에 미흡한 대목이 있다. 좀 더 근본적인 지점에서 설현과 지민을 비난하는 여론에 정면으로 응수하려 한다.

무지 자체는 비난할 수 없다

▲ AOA 설현 걸그룹 AOA의 설현이 16일 오후 서울 광장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네 번째 미니앨범 <굿 럭> 발매 쇼케이스에서 한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역사지식에 대해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정민


우선, 무지하다는 상태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는 건 대부분 수긍할 거다. 앎은 내가 아는 걸 모르는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데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경멸하는 데 가치가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설현과 지민이 사과문까지 쓰게 된 건 그들의 무지가 역사 그것도 독립투사라는 민족의 위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부분이라는 이유일 거다. 아직도 유머 사진으로 떠도는 채연의 '두뇌 풀가동'은 초등학교 사칙연산을 틀린 해프닝이지만 우스갯거리로 놀림당할망정 사과문까지 쓰지 않았다. 다른 비유를 들 수도 있다. "걸그룹 멤버 아무개, 자연과학 지식 없어!" 같은 기사는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다른 상식과 달리 '역사'를 모르는 것은 비난의 사유일까. 역사가 민족, 국민이란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란 관념 때문이다. 단순한 앎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아야만 하는 의무라고 믿는 거다. 안중근 의사의 용안을 몰라본 지민과 설현을 꾸짖는 사람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 내일은 없다"는 유명한 격언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민족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국민국가의 영토가 확정되면서 그 안에 거주하는 서로 다른 정체성의 구성원을 강력한 유대감으로 묶어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 민족이란 큰 이름이다. 이런 이유로 민족이란 정체성은 강압적이다. 민족 밖의 다른 민족, 국가의 외적을 향해 가장 잘 작동하고, 국가 안의 다양한 갈등과 정체성을 숨기고 억누르는 효과를 낸다. 일본에 대한 '한국민족' 속에는 항일지사와 친일인사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계층도 정치적 신념들도 서로 다른 지향과 취향, 관심사도 지워진다.

'어떤 경우에도 그에 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민족이란 공리가 민족의 구성원을 괴롭히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전체주의 국가가 민족 같은 거대한 단일 개념을 국민에게 주입했다. 그 큰 이름을 앞세워 사회의 소수자들, 반대자들, 이방인을 탄압한 역사도 많다.    

민족과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AOA, 눈물바다만큼 성숙해지는 계기! 걸그룹 AOA의 설현, 유나, 지민이 16일 오후 서울 광장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네 번째 미니앨범 <굿 럭> 발매 쇼케이스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 이정민


지민과 설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민족이 존속해야 한다는 믿음만 있지, 그것이 무엇을 위해 존속해야 하는지는 자문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나는 개인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과 역사는 그 자체로 실존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람이 엮은 대상이다. 그 안에 사는 개개인을 보살피기 위해 민족과 국가가 존재한다. 개인이 민족에 앞섬을 인정하고 개인을 민족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그이가 민족의 역사에 무지하다고 비난당할 이유도 없다. 민족의 어제를 아는 것이 오늘의 공동체를 건사하는 데 중요하다고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어떤 불법과 배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단편적 역사 상식이 없다는 이유로 몰아세우고 사과까지 받아내는 건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피폐하고 강퍅하게 만드는 일 아닐까. 그것은 민족의 '내일'을 구실로 개인들의 '오늘'을 탄압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말했듯이, 앎은 모르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기 위해 익히는 게 아니다. 아이돌들이, 나아가 그 나이 또래 사람들이 특별히 역사를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런 경향이 나타나는지 자문해 본 후 그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민족이란 이름이 긍정적인 문맥에서 힘을 내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돌보고 품어주기보다, 누군가와 대적하고 배제할 때 그 큰 이름은 쓰인다. 독립 운동가의 불우한 후손 같은 이들을 보며 슬퍼할 때라도, 민족의 회칼은 민족을 배반하여 역사를 어지럽힌 적대자를 항상 은밀하게 겨누고 있다. 민족이란 구체는 부정적 에너지의 공기로 탱탱하게 형태를 유지한다. 이번 논란 역시 연예인이란 유명인, 여론으로 다스리기 쉬운 대상을 향해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마음껏 터트린 것이다. 바로,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한 번 웃고 넘기면 충분할 이번 해프닝을 '논란'으로 보도한 YTN이나 다른 공중파 언론의 작태는 나쁘고 위험하다. 이렇게 퇴행적인 여론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공론장에 합리적인 반론이 등장해서 나머지 여론을 규합하며 꾸준히 저지선을 확보해야 한다.

역사와 민족, 이런 숭고한 이름이 비천한 폭력을 덮어주거나 승인할 수 없다. 명심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직썰>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설현 AOA 역사인식 논란 민족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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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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