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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김광석, 그에게 기타는 '운명'이었다

[인터뷰] 영혼을 울리는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 김광석 (상)

16.12.30 12:20최종업데이트16.12.3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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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 기타리스트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 영혼의 기타리스트, 천재기타리스트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많다. 하지만 그는 비울려고 노력한다.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으며 득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기타계의 구도자 김광석씨를 11월 28일 자택에서 만나 5시간 동안 인생과 음악에 대해 깊고도 진지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 조우성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 김광석.

그는 조용필, 전인권, 신승훈 등 국내 최정상 가수들 1000여 명의 앨범작업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그렇게 만든 곡이 10만 개 이상이다. 1995년도에 자신이 직접 작곡해 만든 1집 앨범 <The Confession>을 시작으로 4장의 CD에 43곡을 담은 2집 앨범 <The Secret>, 3집 <은하수>를 발표하여 수준 높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세상에 내보였다. 4집 앨범 <구름위에서 놀다>에서는 현대악기 '기타'와 고대악기 '비파'의 장점을 취해 개발한 '비타'로 새로운 음악세계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에게 제1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 비타와 함께 김광석씨는 고대악기인 비파와 기타를 섞어 개조한 '비타'를 연주하여 4집 앨범 <구름위에서 놀다>를 제작했다. 김광석류 비타산조라는 부제가 붙은 4집 앨범은 명주실을 엮어 만든 7현의 비타연주로 선비정신을 표현하였다. ⓒ 김광석


그는 일렉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록, 발라드, 트로트, 국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현대무용, 마임, 전통무용, 사물놀이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의 협연도 자주 한다. 그는 화려한 율동 없이 기타소리만으로 관객들의 심금과 영혼을 울린다. 사람들은 그가 '기타를 대중음악에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말한다.

학원에서 배운 5일간의 교습 외에 스스로 독학해서 기타의 음률세계를 득음한 천재 기타리스트 김광석. 지난 11월 28일,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기타가 너무 신기했던 소년

▲ 김광석의 돌사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1남 1녀중 외동아들로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였다. 학업성적은 중학교 때까지 항상 1~2등을 하였다. 아버님은 사업을 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아버지는 아들이 판검사로 출세하기를 바랬으나 광석씨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기타리스트의 길로 가버렸다. ⓒ 김광석


그와 기타의 만남은 5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5살 때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빨간 기타가 벽에 걸려 있었다. 기타를 보는 순간 그는 감전된 듯 멍해졌고, 한참을 서서 기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운명이었던가, 기타와 김광석씨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타가 너무 신기했어요. 집에 돌아가자 모양을 흉내 내서 기타를 만들었어요. 널빤지 같은 것에 철삿줄과 고무줄을 메서 그걸 혼자서 갖고 놀았어요."

이때쯤 세발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오다 핸들이 부러져 언덕을 구르게 되는 사고를 당한다. 왼쪽 팔을 크게 다쳤고, 지금까지도 왼팔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를 갖게 된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그의 숨은 아픔이다.

"제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안 하는데, 사고 이후 왼팔이 좌우로 놀아요. 이게 고정돼야지 놀면 안 되잖아요. 기타 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고민도 많이 했죠.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극복하는 수밖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는 여섯 살에 입학했고, 반 또래들이 그보다 다들 나이가 많았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님이 장난감 삼아 여동생에게 기타를 사 주었다. 여동생은 기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광석씨가 기타를 갖고 놀다 음악학원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덴의 동쪽' 악보를 보고 연습을 하였고, 그걸 며칠 만에 마스터하자 5일째 되는 날 '고향초' 악보를 건네받았다. 그는 악보를 보고 큰 실망을 하였고, 다음날부터 학원을 나가지 않았다.

"고향초가 소위 뽕짝이었던 거죠. 그때는 왜 내가 이런 궁상맞은 걸 해야 하는가, 거부반응이 생겨서 음악학원을 나가지 않았어요. 제가 남에게 기타를 배운 게 중학교 2학년 때 그 음악학원의 5일이 다예요. 그 이후로는 전부 독학했어요."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일렉기타로 '해 뜨는 집'을 연주하는 모습을 본 후 동네 전파사, 레코드가게에서 부속품을 사서 통기타에 구멍을 뚫고 전기선을 연결해서 일렉기타 비슷한 것으로 개조했다. 전축 스피커에 선을 연결해서 기타를 쳤으나 며칠 후 스피커가 고장이 나버렸다. 광석씨 아버님이 "이게 왜 고장 났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새것으로 사다 놓았으나 그는 다시 스피커를 망가뜨렸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밴드부 활동 사진 그는 고1 때 선배들과 밴들를 만들어 활동을 하였고, 밤에 공업소에서 연습을 하여 인생 최초로 콘서트를 열었다. 밴드 이름은 폼폼스였다. ⓒ 김광석


당시 '밴처스'가 인기였다. 원주고등학교에 입학해 선배와 함께 연주단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잠자리에 들면 몰래 나와 공업소에서 연습을 하였고, 고2 때 인생 최초의 콘서트를 열었다. 그룹 이름은 폼폼스(pompoms). 학업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그였으나 기타에 몰입하다 보니 학업성적이 뚝 떨어져 낙제를 해버렸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화가 나 광석씨의 기타를 산산조각내었다. 광석씨는 가출을 감행하였고, 일주일 동안 친구 집에서 생활했다. 어머니가 사 준 기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는 다시 기타를 부숴버렸다. 그는 또 가출했다.

어머니는 서울의 낙원상가에서 아들에게 전자기타를 사주었다. 광석씨는 여전히 기타에 빠져 학업성적은 낙제를 면하지 못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로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면 운동장 한복판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기다렸다. 아버지는 아들 방을 수시로 들어와 점검하였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기타를 선생님이 서 있는 교탁 밑에다가 숨겨 두고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기타를 쳤죠. 선생님이 어디서 기타 소리가 난다며 교실을 몇 번 뒤지기도 했죠. 선생님 발밑에 기타가 있는데 못 찾은 거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아버지가 거절하니 매형에게 빌었다

▲ 김광석의 아버지 아버지는 광석씨에게 기대가 컸다. 외동아들로 공부를 잘 했고, 아버지는 아들이 판검사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은 깨어졌다. 아들이 기타에 미쳐 학업성적을 등한히 하여 낙제생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기타를 싫어했다. ⓒ 김광석


그는 매일 기타를 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저는 대학교 오자마자 매일 미도파백화점 5층으로 출근했어요. 거기 가면 그룹사운드를 볼 수 있었어요. 그때 조용필 씨가 거기서 김트리오 멤버로 활동했는데, 용필이 형이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울고 싶어라' 노래를 부른 이남희 씨가 베이스기타였죠. 조용필씨 목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그때 들었던 조용필씨 목소리가 아직도 안 잊혀요. 그걸 보고 나도 그룹사운드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어요."

1970년대 중반, 이때가 그룹사운드 전성기였다. 대학교에서 그룹사운드를 결성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전문가용 전자기타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낙원상가에서 사주었던 초보자용 일렉기타로는 그룹사운드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기타를 살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총학생회장을 찾아갔다.

"제가 총학생회장에게 협조문 하나만 써달라고 매달렸어요. '교내 그룹사운드 결성 건으로 기타를 사주십사 부탁드립니다'라는 협조공문을 총학생회장 이름으로 받아내서, 그것을 들고 아버지께 보여줬어요. 기타 땜에 외동아들 버렸다고 생각하시는데 아버지가 사주시겠어요. '우리 집안에 딴따라는 없다.' 이러시면서 당연히 거절하셨죠. 할 수 없이 매형한테 싹싹 빌었어요. 아버지 좀 설득해 달라고. 아버님이 매형 말은 잘 들었거든요. 결국, 매형 설득으로 낙원상가 '에어톤'에서 거금 60만 원으로 휀다(Fender) 일렉기타를 구입했어요.

기타를 사서 하루 이틀 치다 보니 아버지가 싫어해요. 그 눈치를 내가 느끼니까 도저히 집에서 기타를 못 칠 것 같았어요. 제가 기타 치고 그러면 아버지가 절 때리려고 그래요.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지팡이 짚고 다녔는데, 제가 도망가면 못 잡잖아요. 그러면 약이 오르니까 잘 때 들어와 저를 부둥켜안고 막 때리는 거예요. 그 정도로 아버님이 기타를 싫어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타이탄 트럭을 불렀어요. 악기만 딱 싣고 옷 입은 채로 집을 나왔어요. 부모님께 이야기도 안 하고, 갈 곳도 없이 무조건 나와 버렸어요."

▲ 방에 가득한 기타들 김광석씨는 20대 시절 잘 나가는 기타리스트였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 1000만 원 정도 했는데, 그는 한달에 600만 원 이상을 벌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기타였고, 술과 잡기를 하는 대신에 악기점에 들러 기타를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였다. 하루에 4~5개를 구입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로 부인과 다툼도 있곤 했다. ⓒ 조우성


그는 학교 근처 음악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낙원상가 악기점에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악기점 앞에서 "이거 큰일 났네. 오늘 여기서 기타를 빌려주기로 했는데 문을 안 열었네. 지금 빨리 가야 되는데 어떡하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룹사운드 '범스' 였는데, 그는 자신의 기타를 이들에게 빌려주었고, 그들을 따라간 곳이 해밀턴호텔이었다.

"호텔을 막 지어서 지하나이트클럽을 오픈하는 날이었어요. 딱 들어가니 무슨 별세계에 온 것 같았죠. 맨날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형님들이 물 좀 가져와 이러면 떠다 주고, 그렇게 거기서 2~3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행복했어요."

'범스'가 클럽에서 방출되면서 그는 동두천 미군부대 클럽에서 활동하는 '허밍보드(humming board)' 팀에 들어갔다. 미8군을 돌면서 연주활동을 했는데,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7~8개월 활동하다가 팀이 깨지고 '파이브 에이스'의 일원이 되었다. 대구의 미군부대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노숙자 차림의 김옥동씨가 찾아 오더니 광석씨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우겼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저보고 대한민국 음악 발전을 위해 같이 가자고 그래요. 완전히 황당했죠. 이 사람이 일주일 동안 사람들을 붙잡고 조르는 거예요. 팀원들이 저를 참 좋아했는데, 느닷없이 이상한 사람이 저를 데려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니 웃기는 상황인 거죠. 근데 일주일이 지나자 마스터가 날 부르더니 광석아 너 이 사람 따라가라 이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하고 그를 따라 서울 이태원으로 와보니 골방에 건반 하나만 달랑 있고, 팀도 없는 그야말로 황당한 상황이었다. 돈이 없어 걸어 다녔고, 보름 동안 라면만 먹었다. 그러다 팀이 하나 만들어졌고, 부평역 앞에 미군 부대를 위한 조그마한 클럽에서 연주하였다. 클럽 위층의 문 닫은 당구장의 당구대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은 사람들이 먹다 남은 것을 걷어서 먹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전부 거지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밥을 먹고 논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걸어와요. 딱 보니 엄마예요. 제가 병역신체검사를 받지 않아 더는 미루면 병역기피가 되는 심각한 상황이라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엄마가 나를 한참 보더니 갑자기 길에 털썩 주저앉더니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데요. 내 아들이 거지 됐다고."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 기타는 나의 운명 그는 기타가 좋다. 마냥 좋다. 앉으면 자연스레 기타를 잡는다. 좋아서 기타를 친다. 즐거워서 기타를 연주한다. 기타를 치면 그는 행복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기타를 치다 자신의 기타소리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기타는 그의 운명이다. ⓒ 김광석


신체검사를 받은 후 문산에서 활동하다 이태원 세븐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에 들어갔다. 당시 최고 수준의 음악을 하는 곳이 이태원이었고, 그중에서도 세븐클럽에 우리나라 최고 밴드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가 21살이었다.

"이태원에서 음악 하던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시기였어요. 하루하루가 콘서트였죠. 미군들이 보통 클럽에 오면 맥주 마시고 춤추고 그러는데, 여기는 음악 들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 맨날 공연하는 거죠. 그때 연주했던 감각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죠. 좋은 곡도 그때 많이 만들었어요. 한 1년 정도 이태원에서 활동했어요."

22살 때 그룹사운드 '히파이브(He 5)'로 자리를 옮겼다. 김봉탁씨가 미국으로 가고 그 후임으로 광석씨가 들어갔다. 23살 때쯤, 인기를 얻으며 하루에 두세 곳에서 활동하던 중 당시 최고의 드러머였던 배수연씨가 찾아와 '세션(레코딩을 위해 곡을 연주하는 일)'을 제의했다. 조용필씨의 '친구여'를 작곡한 피아니스트 이호준씨의 편곡녹음이었는데, 이게 김광석씨의 첫 세션 작업이었다. 그는 가끔 '세션맨'을 하면서 퍼시픽호텔 무겐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클럽이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사랑과 평화도 같은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2층 중간에 매일 6~7명이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기타 치는 광석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제 기타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전속세션팀원들이 클럽에 와서 며칠 동안 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 그중의 한 명이 오더니 자신은 앨범을 녹음하는 전속세션팀의 총무인데, 세컨드 기타를 담당했던 사람이 가수로 전업해서 세컨드 기타가 필요하다고, 함께 일하겠냐고 묻더라고요. 전속세션팀은 최고가 아니면 되기 어렵고, 전속세션맨이 되면 클럽에서 일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수입과 명성이 생기니 바로 O.K 했죠. 나는 뭐 장원급제 한 거죠. 저에게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난 거죠."

당시엔 전속세션멤버가 아니면 앨범녹음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세션 작업은 녹음을 하다 실수를 거듭하면 팀에서 바로 쫓겨날 정도로 엄격하고 살벌한 프로의 세계다. 김광석씨는 1년 12달 쉬지 않고 세션맨을 하면서 히파이브 그룹사운드 활동도 겸했다. 쉬는 날이 없었다. 연주하다 자면서 꿈을 꾼 적도 있다. 어떤 때는 악보가 하얀 백지로 보인 적도 있었다. 당시 아파트값이 1000만 원 정도 했는데, 그가 한 달 버는 수입이 600만 원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잘 나가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잠을 못 자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 실전에서 닦은 연주실력 그는 22살 부터 시작한 세션작업을 40여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해 오후 5시 반까지 긴장속에서 녹음연주를 한다. 실전에서, 최고의 팀원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그의 내공은 넓고 깊게 쌓여 온 것이다. ⓒ 김광석


"아침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녹음실에서 연주한 후 밤에는 클럽에서 새벽 4시까지 활동하고,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집으로 돌아와 밥 한 그릇 먹으면 6시가 되요. 녹음실에 아침 9시까지 가야 하니 잠을 잘 시간이 없었어요. 잠시 쪽잠 정도 자는 거죠. 보름간 잠을 못 잔 적도 있어요. 제가 운전하다 사고가 났는데 그게 졸음운전이었어요. 제가 23살에서 29살까지 6년간 그런 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일주일만 그렇게 하면 죽을 것 같아요.

쉬지 않고 일을 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이전부터 제가 여러 번 그룹사운드를 탈퇴하려고 그랬어요. 근데 다들 만류하는 거예요. 마스터가 너 빠지면 대책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몇 년을 끌었어요. 나중에는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었는데 아버지가 그 때 너 그러다 죽어 라는 소리를 하더라고요. 이런 생활 계속하다가는 정말 죽겠다 싶어 '히파이브' 활동을 결국 접게 되었죠."

녹음실 일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9시 쯤 도착해서 셋팅을 하고 9시 30분 부터 작업에 들어가 1시에 끝낸다. 이게 한 타임이다. 돈은 한 타임으로 계산한다. 점심 먹고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연주하는데, 보통 10곡에서 20곡 정도 작업하였고, 많을 때는 40곡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틀린 곳이 있으면 바로 수정할 수 있지만 그때는 동시녹음이니까 중간에 미스가 나면 전체를 다시 녹음 해야 되었다. 그러니 연주할 적에 초집중해야 된다. 광석씨의 내공은 녹음실에서 쌓여갔다.

"실전으로, 그것도 최고의 수준에서 죽기 살기로 기타를 연주한 거죠. 나 혼자 편안하게 연주하는 것과 돈 받고 녹음실에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거기 잘못 됐어 지적 받아가면서 연주하는 거랑 다르잖아요. 월드컵에서 실전으로 뛴 캐리어랑 동네에서 연습 삼아 운동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잠도 못 자고 쉴 틈 없이 연주했던 시간들이 저에게는 엄청난 연습시간 이였던 거죠. 아마 그 누구도 그렇게 해보지 못 했을 거예요."

김광석 기타리스트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제프 백(Jeff Beck)'을 많이 닮았다. 블루스, 록, 재즈 등 음악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이 닮았고, 그룹사운드에서 솔로로 전향해서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는 것도 닮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도 닮았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김광석씨의 음악세계에 대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다음 기사: 그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아직도 배우는 학생 김광석"

김광석 고백 비밀 은하수 구름위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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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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