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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주는 선생이 진짜" 수영장에서 벌어진 '폭력 대물림'

[리뷰] 스포츠 인권 문제 정면으로 다뤄, 최근 재조명되는 영화 <4등>

19.01.26 11:21최종업데이트19.01.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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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대표팀. ⓒ 연합뉴스

 
축구, 야구 등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인기 구기 종목을 제외한 스포츠 선수들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그 선수에게는 부와 명예, 그리고 안락한 미래가 따라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남자 선수들에게는 병역 혜택도 있다). 선수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유다.

지상파 3사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올림픽 금메달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금메달 수상자에게는 특별 다큐나 심층 인터뷰를 기획해 편성하기도 한다. 여기선 선수 본인은 물론, 선수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학창시절의 은사들까지 등장해 그 선수의 성장과정에 대한 한 편의 '영웅스토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금메달이라는 '아름다운 결과'에 묻혀 선수들이 겪은 힘든 과정과 아픔들은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체육계에서는 '선수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코치나 선배들의 폭력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최근 여러 체육계 폭로들을 통해 이 사실이 속속 드러나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많은 폭행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당한 폭력에 장기간 노출되기도 하고, 이로 인해 꿈을 포기한 채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기도 한다. 체육계 인권 문제를 다룬 정지우 감독의 영화 < 4등 >(2015)은 최근 연이어 불거진 체육계의 폭력 사건과 함께 재조명해 볼만한 작품이다.

자신이 당한 방식 그대로 제자를 지도하는 수영코치 이야기
 

영화 < 4등 >의 포스터. ⓒ (주)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1990년대 후반 연일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아시안게임의 금메달 유망주로 떠오른 광수(성인 박해준 분/아역 정가람 분)는 툭하면 선수촌을 이탈하는 비행 청소년이었다.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열흘 넘게 선수촌을 이탈해 도박에 심취해 있던 광수는 선수촌에 돌아와 감독(유재명 분)에게 심한 체벌을 당한 후 수영을 그만뒀다. 광수는 선수 생활을 접은 후 문화센터의 수영코치로 근근이 생활하며 폐인처럼 살아간다.

그렇게 현역 생활을 접은 지 16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대회만 나가면 4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년 수영선수 준호(유재상 분)가 엄마(이항나 분)의 손에 이끌려 광수 앞에 나타났다.

준호의 수영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고 열정을 되찾은 광수는 준호를 제대로 키워보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 물 간 코치가 자신과 닮은 제자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휴먼 스포츠 감동 스토리' 영화의 흔한 구도와 다르지 않다.
 

영화 < 4등 >의 한 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하지만 영화 < 4등 >의 진행은 평범한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광수는 어린 시절부터 코치의 폭력적인 지도를 받으며 수영을 배웠고 이는 코치가 된 후, 그대로 자신의 지도방식이 됐다. 광수는 준호를 체벌한 후 "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을 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라며 자신의 무용담을 거창하게 털어 놓지만, 사실 광수 역시 폭력의 피해자로 운동을 그만뒀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광수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준호는 끝내 수영을 그만둔다. 준호에게 모든 정성을 쏟던 엄마는 공부를 잘하는 둘째 기호(서환희 분)에게 관심을 돌린다. 이에 마음이 상한 준호는 동생을 상대로 광수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체벌을 하며 폭력을 휘두른다(이는 영화 초반 광수가 대표팀 감독에게 당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당했던 폭력을 주위에 있는 아랫사람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전형적인 '폭력의 대물림'이다.
 

영화 < 4등 >의 한 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 4등 >은 지난 2003년 <여섯 개의 시선>을 시작으로 <시선1318> <범죄소년> <날아라 펭귄> 등 인권에 관련된 주제의 영화들을 기획·제작했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12번째 프로젝트 영화다. 정지우 감독은 '성적이 모든 과정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이유로 더욱 외면 받았던 스포츠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관객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이 같은 체육계 폭력이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영화보다 더욱 끔찍한 현실 속 체육계 폭력과 인권문제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극의 흥미를 위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과장되게 표현하는 이른바 '문학적 허용'이 나오곤 한다. 스포츠의 아름다운 결과만 보며 즐기는 사람들은 영화 < 4등 >에 나온 내용들도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 4등 >에서 표현된 내용들은 오히려 실제보다 축소된 이야기가 더욱 많아 보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역도 남자 77kg급 금메달리스트 사재혁은 지난 2015년 스포츠 뉴스가 아닌 사회부 뉴스에 이름을 올렸다. 춘천의 한 술집에서 후배 선수를 폭행해 전치 6주에 해당하는 상해를 입힌 것이다. 태릉 선수촌 내에서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였다. 사재혁은 이 사건으로 인해 자격정지 10년과 벌금 1천만 원을 선고 받으며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명예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12월 17일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의 항소심 2차 공판에 출석하는 모습. ⓒ 연합뉴스

 
지난해 1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는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가 선수단을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계속 됐던 조재범 코치의 상습적인 폭행 때문이었다. 대한빙상연맹은 조재범의 코치직을 박탈했고, 이틀 후 선수촌에 복귀한 심석희는 평창올림픽 여자계주 30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주종목 1500m에서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예선탈락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올림픽이 끝난 후 조재범의 폭행사건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12월에 벌어졌다. 17일 심석희 측에서 조재범을 강제추행 및 강간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심석희를 시작으로 유도, 태권도, 여자축구, 세팍타크로 등 다양한 종목에서 '스포츠 미투'가 이어졌다. 그 동안 자신의 미래, 그리고 자신이 청춘을 바친 종목을 위한다는 이유로 침묵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울분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18일 연일 계속되는 스포츠 인권 문제가 성적 및 메달지상주의 때문이라 진단하고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정부 차원의 '메달 목표'를 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2일 '스포츠 인권 특별조사단'을 만들어 체육계 인권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조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물론 재발방지도 중요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선수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방안도 하루 빨리 마련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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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인권 4등 심석희 조재범 사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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