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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흥행에 다시 보는 '버닝', 내가 해석한 결말은

[리뷰] 대립되는 두 이념, 충돌하는 두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 <버닝>

19.07.09 10:37최종업데이트19.07.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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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국내에서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봉 감독은 꾸준히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점을 풍자적 기법으로 묘사·비판해 왔다. 이번 작품 <기생충>에서는 빈부격차가 야기하는 계층간 갈등을 공포·추리·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혼합하여 작품성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명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인 2018년에도 이창동 감독의 <버닝>(BURNING)이 칸영화제 대상후보에 올라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버닝>도 <기생충>과 같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갈등을 주제의 하나로 삼았다. 다만 기생충의 장르영화적 요소가 가지고 있는 대중 흡인력을 갖지 못하여 흥행에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하다.

영화 <버닝>은 줄거리가 다소 애매모호하고 상징적인 표현 기법 때문에 아마도 보는 사람마다 제각기 전혀 다른 감상평이 나올 것 같다. 영화가 개봉된 지 일 년이 넘어 많은 리뷰가 나왔지만, 필자도 필자나름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 영화가 다양한 그리고 열린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는 데 필자의 평이 조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넷플릭스에서 지금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아직 안 보신 분은 먼저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다음에 감상을 필자의 감상과 비교해 보셨으면 한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버닝>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이 영화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등장인물로 삼아 줄거리를 엮어간다. 극 중 종수(유아인)는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 소설가 지망생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가버려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공무원 폭행죄로 감옥에 가 있다. 그는 유통회사 알바로 배달을 나갔다가 우연히 길거리 홍보 파트타임 댄서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 해미(전종서)를 만나게 되고, 얼마 후 해미와 섹스를 한다. 해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도 씀씀이가 헤픈 편으로 보인다. 그녀는 곧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집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종수에게 맡긴다. 

종수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오는 해미를 마중하려고 공항에 나갔다가 해미가 아프리카 공항에서 알게 된 벤(스티븐 연)을 소개 받는다. 벤은 고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강남의 럭셔리 맨션에 살고 있으나 특별한 직업은 없는 듯하다. 벤은 자기 취미가 남의 소유인 비닐하우스를 몰래 불태우는 것이라고 종수에게 말한다. 종수는 해미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해미는 벤과 더 자주 어울린다. 얼마 후 해미는 종적을 감추고, 이에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종수는 벤을 유인하여 죽이고 시신과 차를 불태운다.
  
실제로 종수는 벤을 죽였는가? 벤은 종수의 의심처럼 연쇄 살인마인가? 해미는 잠적했는가 아니면 자살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해미는 벤에 의해 살해당했는가? 영화 속 장면 저녁하늘의 몽롱한 색조처럼 줄거리는 애매모호하고 주인공들의 참 모습도 파악하기 힘들다. 영화에는 추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긴장감은 높아지지만, 일목요연한 결말이 도출이 안 되는 바람에 관객 입장에서는 문제를 풀었다는 시원한 해방감을 맛보기가 힘들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햇빛에 의해 풍경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윤곽이 불분명한 모네의 연작 수련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종수가 해미에게 준 시계를 종수가 벤의 화장실 서랍에서 발견하고, 해미가 기르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고양이를 벤의 집 주차장에서 종수가 찾아낸다. 그러자 종수는 해미를 벤이 살해했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벤을 추적하고 유인하여 살해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장면은 다소 현실감이 떨어져서 종수의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의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즉 종수가 실제로 벤을 죽였을 수도 있고 실제로 죽인 게 아니라 살인을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벤에 대한 종수의 분노이고 살의이다. 이 분노는 어디에 연유하는가? 벤에 대한 종수의 질투이다. 사랑한다고 여기는 해미를 벤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이 질투와 분노를 일으켰다. 종수로 하여금 벤은 해미를 죽인 살인자라고 판단하게 민드는 감정의 기저에는 질투와 분노가 있다. 영화의 대부분이 종수의 시각으로 전개되는데 종수의 관점에서 벤을 바라보는 관객은 종수의 분노에 공감하게 된다.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포유류 중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극소수 포유류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 인류는 남녀가 서로  하나의 파트너를 택함으로써 비교적 섹스의 공평한 배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가정공동체를 유지함으로써 자녀양육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었고 집단의 생존 능력이 높아지게 되었다. 종수에게 자신을 파멸에 빠뜨릴 수도 있는 불 같은 분노가 일어난 것은 자기 짝이라 여기던 해미를 벤에게 빼앗긴 데서 연유한, 현생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섹스의 공평한 배분이 깨지고 공정성이 훼손됐다는 원초적 감정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벤은 소위 '금수저'라고 일컬어지는 유한계급이다. 돈도 많은 데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시간을 자유롭게 보낸다. 그는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매너는 절제되고 세련된 편이다. 종수는 자기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벤에게 빨려 들어가는 해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마치 병아리를 채어가는 독수리를 바라보는 어미 닭의 신세 같다. '어떻게 하면 젊은 나이에 저렇게 삶을 살 수 있지?', '우리 사회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라는 종수의 말에는 질투의 감정과 함께 사회가 공평하지 않다는 공정성에 대한 사회의식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벤은 풍요로운 유한계급이 흔히 그러할 수 있듯이 일상이 권태롭다. 권태를 깨기 위해 주기적으로 남의 비닐하우스를 몰래 불태운다고 말하고, 농락하기 쉬운 만만한 여자를 데리고 논다. 그러다 마치 어린아이가 싫증난 장난감을 버리고 다른 장난감을 찾듯이 여자를 차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 그는 종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쇄 살인마가 아닐 수도 있지만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도 상관하지 않는 자이다. 어떻게 남의 비닐하우스를 불태울 수 있느냐는 종수의 물음에 그것은 마치 대마초 한 대 피우는 것 같은 사소한 범죄라는 듯이 답한다. 남이 어떻게 판단하든 자기가 보기에 쓸모 없고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은 마치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사람들이 떠내려 가듯이 극히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벤은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약자를 우롱하며 남의 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는 벤의 주장. 이런 주장은 도덕의 가치나 당위를 부정하는 무도덕주의이거나 아니면 강자의 힘이 곧 정의이고 약육강식이 사회의 기본원리라고 말하는 극단적 사회적 진화론과 맥이 닿아 있다. 사회에서 권력과 재산이 있는 기득권에게는 가장 입맛에 맞는 논리이고, 벤도 이 논리에 의거 자기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일반적인 도덕률보다는 이러한 강자의 논리를 내재화한 그는 반사회적 행위나 비도덕적행위를 하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다.
 
종수, 벤, 해미는 실제로 어떻게 된 걸까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벤은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고 더 좋은 것은 그걸 먹는다는 데 있다. 그 행위는 마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그걸 먹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조종하고 처분하는 데에서 쾌락을 느끼는 행위는 엘리어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피력하는 권력의 본질과 흡사하다. 종수라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해미를 차지한 다음에 해미를 버리는  행위에서도 같은 모습을 본다. 해미는 애초부터 벤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조종과 버림을 통한 일시적 쾌락의 대상에 가까웠다. '재미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라고 말하는 그는 연쇄 살인범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사회에서 강자의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소시오패스 경향이 다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종수를 줄곧 따라다니던 카메라가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면 벤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카메라는 농촌 한적한 길 위에 서 있는 벤을 비춘다. 조금 있다가 봉고차가 다가온다. 봉고차에서 내리는 종수에게 벤은 '왜 해미는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본다. 순간 종수는 무방비 상태의 벤을 칼로 마구 찌른다. 여태껏 종수를 따라다니며 종수와 같이 벤을 해미를 죽인 연쇄살인범으로 여겼던 관객은 비로소 의구심을 품게 된다. 소위 '헤픈' 여자들을 데리고 노는 부잣집 자식, 한량에 불과한 벤을 복수심과 열등감에 사로 잡힌 종수가 살해한 건 아닌가?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게 벤의 취미라는데, 실제로 종수는 불태워진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를 볼 때 이런 말들도 일종의 메타포 또는 재미삼아 한 거짓말 아닌가? 극 중 벤은 상대방이 누군가에 상관 없이 예의가 바른 편이었다. 그렇다면 바람기 있고 부자라는 이유로 점잖고 교양도 있는 매력적인 한 젊은이가 질투와 망상에 사로잡힌,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다른 젊은이한테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아닌가?
 
영화가 끝났는데도 줄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 관객은 흔히 추리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수수께기가 풀리면서 맛보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가 힘들다. 종수, 벤, 해미는 실제로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감독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관객이 알아서  제각기 해답을 찾으라고 하는 것 같다. 감독이 주인공들을 모호하게 묘사한 것은 본래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정할 수 없는 유동적이고, 다만 다층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리라.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또 줄거리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인간관계가 서로 얽히면서 전개될 때 나타나는 여러 가능성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일 수 있다. 모호한 줄거리 속에서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종수의 분노로 표출된 본능과 벤의 가치관이다. 종수의 분노는 앞서 말했듯이 짝짓기 경쟁에서 탈락한 남자의 본능에서 연유한 것이다. 벤은 약자는 우롱해도 괞찮다는 힘이 정의라는 강자의 논리를 내재화하고 있다. 종수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은 동시대 같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한편으론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벤에 대한 이질감과 적대감일 것이다.
 
종수와 벤의 충돌이 보여주는 것

행복지수가 높은 사회는 사람들이 주어진 현실을 받아 들이고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다. 삶의 질이 높은 편이 아닌 데도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등 일부 국가 사람들이 행복도가 높은 이유이다. 반면 한국사회는 경쟁이 심하고 행복도가 낮은 편이다. 종수는 하는 일도 없이 잘 사는 소위 금수저에 대한 질투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종수의 사회인식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가 종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 세계사에 드물 정도로 단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불과 두 세대 사이에 전근대적인 계급 질서는 와해되고 경제는 선진국문턱에 다다를 정도로 발전했다. 대학 진학율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교육수준도 높고 삶의 향상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또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끊임 없이 민주주의 제반 원리에 대한 교육을 받아왔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체제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정치투쟁도 벌여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조리하고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급격히 편중된 부가 대물림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영화를 매력적인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경쟁하다가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남녀 삼각 드라마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한번 들여다 보아야 할 점은, 종수와 벤이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대립되고 상반되는 두 이념이다. 사회는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 약자를 위한 논리와 그와 대립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그 이념적 기반이 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현실논리, 강자를 위한 논리이다.

종수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버지처럼 분노를 분출하여 자기 파멸로 치닫지 않으려면 주어진 현실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체념적인 자세가 필요할 수도 있다. 아마도 벤은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를 우롱하고 도덕을 무시하는 벤의 소시오패스적 행위를 종수는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앞서 살펴봤듯이 영화 마지막에 벤이 종수의 칼부림으로 죽임을 당할 때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벤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매너 있고 교양있는 한 남자가 질투심에 사로잡힌 한 남자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고...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세련된 매너는 그가 실제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뱀처럼 냉혹한 세계관을, 그의 소시오패스 기질을 잘 감추어 준다. 영화 끝 무렵에 벤이 자기의 얼굴을 가다듬고 곧이어 새로 사귀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여자도 싫증난 장난감처럼 곧 버려질지도 모른다-을 정성들여 화장시켜 주며 여자를 황홀경에 빠뜨리는 장면은 벤의 이중성을 잘 나타내 준다.
 
최근 우리 언론에서 자주 보도되고 있는 소위 '갑질'이라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횡포는 야만적이고 적나라하고 거침 없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벤의 세련된 매너와는 전혀 딴판이다. 강자가 기득권을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약자의 반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행위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강자의 매너이며 예의이다. 현실적으로는 강자는 힘의 논리를 행사하지만 겉으로는 약자를 배려하는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다. 아직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는 서구의 자본가 계급의 오래되고 세련된, 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예의와 매너를 찾기가 쉽지 않다. 강자의 조야하고 천박한 갑질이 기득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체념하고 받아들이라는 현실논리의 이념에 맞서 사회는 보다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논리의 이념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높여주고 있다.
 
감독이 의도한 대로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름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완결해야만 혼란한 머릿속이 정리가 될 것이다. 나도 이 이야기를 할리우드식 해피앤딩 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파멸로 치닫는 젊은이 종수를 살리고 싶기 때문이다.
 
'종수는 실제로 벤을 죽인 게 아니다. 다만 종수는 벤에 대한 살인 충동을 형상화한 소설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둔다. 또한 잠적했던 해미는 종수에게 전화를 건다. 벤은 베스트셀러가 된 종수의 책을 읽는다. 책 속에서 연쇄살인마인 벤은 종수에 의해 칼로 여러 번 찔리고 불태워진다.'
버닝(BURNING) 이창동 약육강식 현실논리 금수저 갑질 계층갈등 약자 공정성 당위의논리 신자유주의 사회적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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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한국 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 오면서 정리 안된 많은 생각들을 글로 표현해서 다른 분들과 소통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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