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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선생, 야크가 되다

[리뷰] 부탄 영화 <교실 안의 야크>를 보고

20.10.05 13:19최종업데이트20.10.0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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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많다. 루루의 주제가로 이름 높은 <선생님께 사랑을> (1967), 로빈 윌리엄스와 '카르페디엠'으로 알려진 <죽은 시인의 사회> (1989), 장예모의 소품 <책상 서랍 속의 동화> (1999), 선생님을 사랑한 소녀 이야기 <내 마음의 풍금> (1999), 부패교사와 초등학생들을 다룬 <선생 김봉두> (2003) 등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부탄 영화 <교실 안의 야크>도 초등학교 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철부지 선생, 구름 위의 학교를 가다'라는 포스터가 이채롭다. 멀리 푸르른 하늘이 펼치고, 그 아래 하얀 뭉게구름이 떠간다. 구름장들 아래 뾰족한 산봉우리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고, 그 아래 초록의 산지와 초지, 그리고 두 남녀가 있다.
 
포스터 하단에는 '은둔의 나라 부탄으로 초대합니다' 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포스터로 우리는 많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할리우드나 충무로 영화공식과 아주 다른 서정적이고 따사로우며 느린 영화가 <교실 안의 야크>다. 코로나 블루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시점에 우리의 내면을 치유해 줄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로드무비
 
주인공 유겐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자리한 부탄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여 가수가 되려고 한다. 부탄의 수도 팀푸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는 유겐. 하지만 그는 아이들 가르치는 데 아무런 흥미도 조금의 사명감도 없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도 그 핏줄마저 놓아버리고 싶다. 답답하고 꿈도 없는 유겐의 느릿한 일상이다. 
 
국가와 약속한 의무복무기간 5년을 빨리 마치고 싶지만, 교육부 장관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오지의 루나나 초등학교로 전근을 보낸다. 유겐의 여정은 해발 2000미터에 인구 9만9000명의 팀푸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가진다. 관광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여행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유겐도 그럴 수 있을까.
 
해발 2800미터에 인구 3천 남짓한 가사에 어둑할 무렵 도착하는 유겐. 팀푸에서 가사까지 차편으로 4시간이 걸린다. 가사에서 그는 자신을 안내할 길잡이 미첸과 싱게 그리고 당나귀와 말을 만난다. 다음날부터 유겐은 엿새에 걸친 산악 도보여행을 감수해야 한다. 트레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숙박을 제공하며 사는 인구 3명의 코이나.
 
코이나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다시 루나나까지 가야 하는 고행의 길.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걷는 유겐. 그는 수려한 자연풍광과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같은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느 사품엔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루나나 주민들이 선생님 오신다고 마중 나와 있는 것이다. 잠시 가슴이 뻐근하고 행복해지는 유겐.
 
루나나의 사람들

 
하지만 거기서 다시 2시간을 더 가야 도착하는 루나나. 유겐을 맞이하는 촌장의 단아하고 겸손한 태도는 인상적이다. 루나나의 학교는 그가 경험한 팀푸의 학교와 너무 다르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상. 칠판과 분필, 교과서와 공책도 없는 학교. 더욱이 '부엌'이라는 표지판이 내걸린 재래식 화장실. 유겐의 상심과 절망이 깊어만 간다.
 
솔직한 인간 유겐은 이런 곳에서 선생질할 생각이 전혀 없다. 속내를 촌장에게 털어놓고 팀푸로 돌아가려는 유겐. 만약 그가 빈손으로 돌아갔다면 <교실 안의 야크>라는 제목이 붙지 않았을 터다. 이제부터 감독이 하고 싶은 영화언어가 시작된다. 과연 전교생 9명에 56명의 주민이 사는 해발 4800미터의 루나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몇몇 장면은 중국 오지에서 찍은 <책상 서랍 속의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울컥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유겐이 숯으로 벽에 글씨를 쓰는 장면, 아이들에게 창호지 뜯어서 주는 장면, 펨잠이 유겐을 부르러 온 장면.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는 유겐. 싱게가 선생님이라고 답한다. '사람들의 미래를 어루만지는 직업'이라는 말을 덧대면서.
 
촌장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유겐은 상념에 든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종이가 돈 만큼이나 귀한 루나나. 자동차를 본 적도 없는 아이들. 미첸은 만년설이 녹아내려 설산 사자가 살 곳이 줄어든다고 걱정이다. 강강술래처럼 손에 손잡고 둥그렇게 돌면서 춤 주고 노래 부르는 아이들과 어른들. 바람결을 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살돈의 노래.

살돈과 야크
 
반장인 펨잠의 말에 따르면, 루나나 마을 최고의 가수가 살돈이다. 그녀가 날이면 날마다 부르는 노래는 <야크의 노래>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서, 단순하고 조금은 구슬픈 곡조로 이어지는 <야크의 노래>. 유겐은 그녀와 노래에 관심을 보인다. 누굴 위해 노래하는지 묻는 유겐의 물음에 돌아오는 살돈의 대답은 자못 뜻밖이다.
 
"검은목두루미는 누가 노래를 듣는지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세상에 노래를 바칠 뿐이죠. 나도 검은목두루미처럼 그렇게 노래하는 거예요."
 
살돈은 유겐에게 마을에서 가장 늙은 야크 한 마리를 데려온다. 온종일 풀을 뜯다가도 저녁이 오면 집으로 돌아온다는 야크. 살돈은 똥이 필요한 만큼만 야크에게 풀을 주라고 말한다. '노르부'라는 이름을 가진 야크가 유겐의 삶으로 깊숙하게 들어온다. <야크의 노래>를 배우려는 유겐에게 자장가처럼 부르면 된다는 살돈.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가장 슬퍼할 때가 야크 잡는 날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가장 아끼던 야크가 티베트로 팔려나가야 했기에 그 야크를 죽여야 했던 촌장이 젊은 날 만들었다는 <야크의 노래>. 촌장은 유겐에게 "선생님은 전생에 목동이 아니라, 야크였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루나나의 자연과 사람들에 동화된 유겐에게 보낸 최고의 찬사다.
 
'교실 안의 야크'는 돌아올 것인가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만남과 이별도 그렇다. '회자정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필연이다. 유겐에게도 작별의 시각이 닥친다. 펨잠의 크고 맑은 눈망울도, 살돈의 안타까운 목소리와 손놀림도, 미첸의 아쉬움도 뒤로 하고 유겐은 길을 떠난다. 높은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성소에서 유겐이 앞장서서 신령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한다.
 
장대에 매달린 기다란 깃발 룽다와 만국기처럼 이어진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린다. 경건하게 고개 숙이고 평안한 여로와 루나나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는 유겐. 여기서 우리는 봄날부터 겨울 초입의 시간까지 그가 얼마나 변하고 성장했는지 확인한다. 내면을 송두리째 바꾸지는 못했지만, 유겐은 팀푸를 떠날 때의 그 철부지 선생이 아니다.
 
술집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하던 유겐이 갑자기 멈춘다. "돈값을 하라"는 주인의 말에 그가 부르는 <야크의 노래>가 객석을 사로잡는다. '교실 안의 야크'는 영화에서 노르부의 형상으로 실현되지만, 진짜 야크는 유겐이 아닐까? 루나나의 자연과 사람들과 풍경과 느릿하게 순환하며 이어지는 시간과 촘촘하게 엮인 유겐이 야크 아닐까.
 
"부탄이 행복지수 1등이라는데, 젊은이들은 행복이 외국에 있다고 생각해서 여길 떠나요!" 하는 촌장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영화다. 교사와 의사가 국가공무원이며, 거지와 담배, 죄수가 없는 나라. 무상교육, 무상의료, 모든 국민이 유주택인 나라 부탄. 야크나 검은목두루미, 설산 사자처럼 유겐은 마침내 루나나로 돌아갈 것인가.
교실 안의 야크 야크의 노래 부탄 설산 사자 검은목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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