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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논란 수렁에 빠진 배구계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

[주장] 가해자 거취 문제 논하려면 진정성 있는 속죄부터 선행돼야

21.02.27 12:14최종업데이트21.02.2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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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계를 뒤흔든 학교폭력 논란이 터진 지 어느덧 몇 주가 지났다. 몇몇 유명 선수들에 대한 과거 폭로로 시작했던 학폭 논란은 선후배, 지도자, 부모, 구단, 체육계 문화의 문제로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종목 역시 처음에는 배구로 시작했지만 야구와 농구, 축구 등 타 스포츠 종목은 물론이고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아예 대한민국 사회 전반이 학폭 미투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모양새다.

최초의 시작은 지난 7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자배구 흥국생명 소속 이다영·이재영 쌍둥이 자매에 관련한 폭로에서 비롯됐다. 피해자는 학창 시절 쌍둥이 자매로부터 금품갈취, 폭언, 폭행 등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폭로가 계속되자 결국 이다영·이재영 자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소속구단과 배구협회로부터는 연봉이 지급되지 않는 프로경기 무기한 출장정지와 함께 국가대표 자격도 박탈당하는 징계를 받았다.

이어 배구 남자부에서는 OK금융그룹 송명근과 심경섭이 도마에 올랐다. 특히 송명근은 피해자의 급소를 폭행해 신체를 손상시켰던 사실이 알려지며 충격을 줬다. 심지어 가해자들이 자신들로 인하여 수술을 받고 돌아온 피해자를 재차 조롱했다는 내용까지 드러나며 팬들의 공분을 샀다. 송명근과 심경섭은 학폭 사실을 인정하고 자숙의 의미로 스스로 경기출전을 포기했다.

학폭 논란의 파문은 12년 전 선수와 지도자간의 폭력 사태까지 소환했다. KB손해보험 이상열 감독은 대표팀 코치 시절 선수였던 박철우(한국전력)을 구타하여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바 있다. 이상열 감독은 2년 후 배구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격정지가 해제됐고 이후 경기운영위원과 지도자로 승승장구했다.

이상열 감독은 배구계 학폭 파문 이슈가 되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인과응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 피해자인 박철우의 상처를 다시 자극했다. 박철우는 이상열 감독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고,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논란이 커지자 이 감독은 잔여시즌 경기 출전을 포기하기로 했다.

유명 선수와 감독까지 연이어 학폭 논란에 휘말리면서 자연히 소속 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됐다. 학폭 논란으로 타격이 가장 컸던 사례는 단연 흥국생명이다. 당초 절대강자로 평가받던 흥국생명은 학폭논란이 터진 2월 들어 5경기에서 단 3점의 승점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이다영-이재영 자매가 학폭논란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이후 시즌 최다 4연패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한국도로공사전(33점차)-IBK기업은행(34점차)전에서는 연속으로 시즌 최다점수차 패배를 경신하는 수모도 겪었다. 19일 KGC인삼공사를 꺾고 간신히 연패를 탈출했으나 24일 기업은행전에서 다시 무기력한 완패를 당하며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흥국생명이 쌍둥이 자매의 공백을 절감하는 사이, 2위 GS칼텍스와의 승점차는 3점으로 좁혀졌다. 흥국생명은 28일 GS칼텍스와 선두 자리를 놓고 운명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

이밖에도 선수와 수장이 빠진 남자배구 KB손해보험-OK금융그룹 등은 3, 4위로 여전히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학폭 사태 이전과 비교하여 선수들의 집중력과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하위 삼성화재는 가뜩이나 성적부진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주장인 박상하마저 잃어 분위기가 더 뒤숭숭하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다. 학폭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아직 결론이 난 것이 아니다.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잠시 비바람을 피해 코트에서 몸을 숨긴 것일뿐 배구계를 떠난 것은 아니다. 이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디까지 책임져야할지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박상하 정도다. 학창시절 박상하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밝힌 누리꾼의 폭로에 대하여 박상하는 뒤늦게나마 학폭 사실은 인정했지만 납치 및 감금과 집단 폭행 등에서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했다. 박상하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폭로자에 대한 법적대응을 천명하며 개인 자격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박상하는 학폭 사태로 은퇴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 학폭 사실 자체는 본인이 인정한만큼 연맹이나 협회의 추가징계가 나올지는 지켜봐야한다. 하지만 먼저 은퇴를 통하여 배구계에서 본인의 거취를 분명히 정리한 것은, 그나마 다른 가해자들보다는 깔끔한 대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다른 가해자들의 경우 주로 거취 문제를 외부에 떠넘기고 당장 여론의 화살을 피해가는 데만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다영과 이재영 자매가 받은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징계는 구단이나 협회가 원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해지할 수 있다. 이상열 감독이나 송명근-심경섭은 스스로의 선택을 당분간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는 '셀프 징계'를 내리며 언제든 여론이 짐잠해지면 복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놨다.

구단과 배구계로서도 난처한 입장이다. 여론의 반감이 커진 상황에서 이들이 배구계로 과연 복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여론에 떠밀려서 강제로 퇴출시키는 것도 법적-절차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당사자들이 스스로 먼저 결자해지에 나서야한다. 언제까지 자숙을 핑계로 침묵만 지키면서 비겁하게 숨어 지낼 수는 없다. 시간을 끌수록 소속 구단이 받는 피해와 배구계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어쨌든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들이 설사 배구 코트에 복귀한다고 할지라도 환영받기 어렵다. 대중을 상대로하는 프로스포츠에서 영원히 학폭 가해자라는 '주홍글씨'를 안고서 어떻게 매경기 팬들 앞에서 설 수 있을까.

이들의 거취 문제를 논하려면 그 이전에 진정성 있는 속죄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가해자들이 SNS에 올린 글이나 구단을 통한 간접적인 입장표명은 진정한 의미의 사과라고 할 수 없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 용서를 빌거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팬들에게도 정식으로 해명하고 사과하는 시간을 한 번쯤 가져야한다. 배구계 복귀 여부도 그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다.

팬들이 속죄의 진정성을 받아들여서 코트에 복귀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배구계를 영영 떠나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협회와 소속 구단도 학폭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출구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거취를 확실히 정리하지 않고서는 배구계 전체도 학폭 논란의 수렁에서 아주 오랫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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