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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따라 삶 나뉘는 10대, 셋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최선의 삶>

21.09.03 11:34최종업데이트21.09.0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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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엣나인필름

 
1_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소설에서 영화로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임솔아 작가는 중학생 시절 50만 원을 들고 가출을 감행했고, 고등학생 때에도 수업을 빼먹다 보니 어느 순간 자퇴처리가 되어 있어서 검정고시를 거쳐 남들 졸업할 나이에 늦깎이 대학 진학을 했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자전적 체험은 2015년 출간된 소설 <최선의 삶>에 농축되어 있다. 소설은 작가가 첫 공개적 일탈을 감행했던 16살 중3에서 출발해 약 3년간의 시간을 다룬다. 영화는 소설의 기본 인물 설정과 구도를 차용하되, 원작에서는 세부적으로 설명되던 주인공들의 배경이나 상황 해설을 축약하고 십대 소녀들의 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감정 선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원작에서는 16살, 영화에서는 18살인 세 명의 소녀가 벌이는 사건사고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다. 시간적 배경은 011과 폴더 폰이 등장하던 시절, 공간적 배경은 충청도 소도시에서 신도시 동네에 속하는 여고다. '강이'는 늘 뚱한 표정으로 겉돌며 부유한다. 딱히 꿈도 없고 욕망도 없어 뵌다. 외동딸인 강이의 어머니는 열심히 절에 다니고,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크게 모나거나 폭력적인 가부장은 아니다. 강이의 가족은 학교 친구들이 아래쪽 새 아파트 단지 쪽에 주로 사는 데 비해 고갯길 수준의 오르막을 올라야 나오는 비좁은 서민 아파트에서 산다. 이 주거환경은 훗날 강이의 시련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강이에겐 자기까지 합해 '강·소·아'라 불리는 친구들이 있다. '소영'은 외모도 빼어나고 집도 잘살고 공부도 잘하지만 늘 일탈을 꿈꾸는 친구다. '아람'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집에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공부와는 담쌓고 살지만 은근히 낙천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 친구는 사소한 사고를 치면서 함께 어울려 다닌다.
 
이들의 일탈은 초반에는 짓궂고 주변에 피해도 끼치지만 결정적인 정도는 아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땡땡이를 치는 정도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에선 '야만의 시절'에 가깝던 억압적 환경은 점점 아이들을 질식시키고,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도 한번쯤 누구나 저지르곤 하는 사고를 '강·소·아' 일당도 저지르게 된다. 최선을 다했으나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2_18살, 환경조건이 우정을 잠식하기 시작할 때
 

어느 날 문득, 학교생활에 권태를 느낀 소영의 주도로 셋은 가출을 감행한다. 세부 설정과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 채 카메라는 충동적 가출 후 셋의 균열이 시작되는 풍경을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재현해낸다. 구속과 간섭이 싫어서 집을 나왔지만 십대 소녀들이 집 나와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강·소·아' 일당이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될 것이다.
 
곧 준비한 가출자금은 바닥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찜질방에 갈 돈이 떨어져 거리에서 방황하거나 주택단지 구석에서 쪽잠을 자는 나날이 시작된다. 도움의 온정과 소녀들을 노리는 손길은 동시에 찾아오곤 한다. 청소년들의 방황을 그리는 다른 독립영화들이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범죄를 전시하는 경향은 <최선의 삶>에선 최소화되는 편이라 자극적인 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가족과 학교라는 보호막(가출한 아이들에겐 감옥이었겠지만) 바깥에 튕겨 나온 10대 소녀들은 상시적 위기상황에 노출된다.
 

<최선의 삶>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소영과 아람의 대처는 그녀들 각자의 조건이 상이한 만큼 차이나기 시작한다. 감정의 골은 사소한 데에서 출발해 깊어진다. 강이는 중간에서 어떻게든 균형추 역할을 맡으려 하지만 적극적으로 뭘 주도해본 적이 없는 강이의 처신은 소녀들이 처한 현실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강·소·아'의 공동체 생활은 평등과 균형이 받침해야 유지될 수 있지만 자립능력이 없는 소녀들에게 이는 구현되기 어려운 조건이다.
 
아람은 가출 청소년의 전형적 행보에 따라 일자리를 구하고 학교 밖 생활에 자연스럽게 젖어들기 시작한다. 가장 험난한 삶을 살아온 아람은 여전히 학대와 착취를 당하면서도 적응력이 강하다. 소영은 일탈의 쾌감은 기대했으되 집 나오면 고생이란 격언은 간과하고 있었다. 모델이 되고 싶던 소영은 하이틴 패션잡지 모델에 응모하지만 기대와 달리 탈락하고 만다. 소영의 출구 없는 분노와 짜증은 점점 이 작은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아람은 돌아가면 잔뜩 두드려 맞고 희망이라곤 없는 나날을 보내야 하지만 소영은 다시 넉넉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둘이 처한 조건의 차이가 상처처럼 벌어지기 시작한다. 강이는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지만 결국 소영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강·소·아'의 강철 같던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3_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사이에서: 강이의 경우
 

결국 '강·소·아'의 창대한 첫 일탈은 (영화 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비밀스런 여러 사건들을 남긴 채 흐지부지된다. 제 발로 귀가한 소녀들은 각자의 무력감 속에서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된다. 세 친구는 원래 각자 처했던 환경에 따라 입장이 나뉘기 시작한다. 이 전개는 고전 소년모험소설 <톰 소여의 모험> 에피소드와 퍽 닮은꼴이다. 보호자들의 꾸지람에 울컥한 톰 소여 일당은 해적이 되겠다며 가출을 감행한다.
 
마을에선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난리법석이 나지만 처음에 아이들은 의기양양하다. 하지만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고 간섭이라 생각했던 어른들의 행위가 보호막이기도 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외롭고 배고픈 나머지 어떻게든 드라마틱한 깜짝쇼를 통해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귀환하려 궁리한다. '강·소·아' 중 소영은 톰 소여의 포지션, 아람은 기대할 게 없는 허클베리 핀, 강이는 그 중간에 낀 존재감 없는 소년의 역할인 셈이다.
 
예상대로 소영은 가출 예방 차원에서 집안 어른들에게 원하던 행동의 자유를 일정부분 얻어낸다. 아람은 무진장 혼나고 만다. 강이의 가족은 잔뜩 겁먹은 강이의 귀환을 받아들인다. 이 순간 그전까지는 10대 시절 허물없이 어울리던 '강·소·아'의 유년기는 끝이 난다. 서로 차이를 명백하게 인지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말썽꾸러기 소년들의 행적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확연히 다른 그림이다.
 
4_10대의 우정은 세계의 격랑에 휩쓸려 사라지고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세 소녀의 궤적은 점점 파국으로 브레이크 없이 치닫는다. 소영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미시적 권력 -부잣집의 공부 잘하고 예쁜 딸- 을 이제 본격적으로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휘두르기 시작한다. 이제 소영에게 아람은 무시하고 지나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소영의 타깃은 집요하게 강이에게 향한다. 가출 생활 당시 둘 사이에 일어났던 비밀스러운 일을 마치 덮어버리고 싶은 듯 소영은 강이에게 집착하며 악어가 사냥감을 꼬리로 휘감듯 조이기 시작한다.
 
이제 세 소녀 주위를 감싸던 아슬아슬했지만 격의 없던 우정의 자리에는 그 대신 학교폭력과 일진놀이의 어두운 그림자가 감돈다. 수동적인 강이는 고립된 채 점점 질식되어간다. 강이는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영은 애초에 구 도시 지역에서 학군을 위장전입해온 강이의 상황을 들먹이면서 더욱 더 잔인하게 굴어댄다. 강이를 괴롭히는 소영의 태도는 애증 혹은 거울 속 자신에 대한 자학처럼 투영된다. 마치 강이를 말살함으로써 자신만만해 하던 자신이 드러낸 균열과 나약함을 감출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중후반부에서 소영을 정점으로 한 따돌림에 견디다 못한 강이는 아람과 함께 또다시 일탈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미 모든 걸 체념한 채 바깥 생활에 어떻게든 정착하려는 아람과 달리 강이는 또다시 무기력하게 회군한다. 강이의 부모는 이번에도 덤덤하게 그녀의 퇴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강이는 맺힌 감정을 해소하지도, 배출하지도 못한 상태를 헤어나오지 못한다. 결국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결말로 이야기는 치닫기 시작한다.
 
5_깨어져가는 10대 심리 묘사에 한 획, 하지만 그걸로 족한가?
 

<최선의 삶>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최선의 삶> 소설과 영화 모두 원작자 임솔아 작가의 자기 반영적 측면이 극대화된 이야기이다. 크게 각색이 많이 된 것도 아닌데 전달 매체의 상이함에서 오는 온도차는 서로 간에 꽤 크게 느껴진다. 소설은 미세한 십대 소녀들의 감성을 예리한 문장으로 한 획씩 그어나가며, 그녀들이 가진 각기 다른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인 예민한 파열음을 유리장식처럼 표현해낸다.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과 행간은 독자가 직접 상상하고 설계해 채우게 만드는 식이다.
 
영화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원작의 배경 해설을 축약하고 세 주인공의 감정선 교차에 초점을 맞춘다. 서서히 벌어지는 붕괴와 추락의 정서에 중반부부터 영화는 온전히 집중해버린다. 빈 공간을 독자/관객이 각자 채워 넣어야 되는 건 유사하지만, 소설의 호흡과 영화의 그것이 같을 순 없다. 이미 시각화된 이미지로 전달된 내용을 뒤쫓게 만드는 영화의 방식이 조금 더 불친절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은 뒤 영화를 보기를 추천하는 이유다.
 
배우들의 캐스팅과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아이돌 그룹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만큼 '강이' 역을 맡은 방민아 배우의 연기는 준수한 싱크로 비율을 보인다. 원작의 주인공이 실재한다면 저런 표정으로 심드렁한 포즈를 취할 것만 같은 이미지다. 감독이 세 주인공 중 가장 먼저 캐스팅했다고 밝힌, 심달기 배우가 소화한 아람 역은 배우가 상업영화나 시트콤에서 선보이던 것과는 다른 결의 연기다. 배우가 출연했던 단편 독립영화 중 <동아> 같은 부류의 작품에서 발견되던 야생적 분위기를 <최선의 삶>에서 마구 뿜어낸다. 좋게 보면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날것의 연기, 삐딱하게 보면 독립영화계에선 익숙한 검증된 역할에 충실한 연기를 선보인다.
 
뉴 페이스에 속하지만 본 작품 이후 전 방위적으로 활동 폭을 넓히는 중인 소영 역 한성민 배우는 극중 인물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캐릭터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낸다. 얄밉고 이기적이지만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위험한 10대의 면모 그대로다. 그렇게 세 친구는 누구나 겪을법한 통과의례의 시간을 경유한다. 영화 속 현실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과연 '강·소·아'가 시행착오 끝에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다시 만날 날이 과연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니라고 보인다.
 
왜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남는 건 씁쓸한 뒷맛뿐일까? 하는 그 시절 기억의 편린을 한구석에 감춰왔던 이들이라면 <최선의 삶>은 극도의 공감과 위로를 안겨줄 영화다. 혹은 누군가에겐 오래된 상처를 후벼 파는 시간이 될 법도 하다. 영화 속 '강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라면 과연 어떨까?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20대 중반부터 30대 초중반에 이르는 창작 세대가 뿜어내는 자전적 경험과 위로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영화들의 시효와 확장성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작품정보>
최선의 삶 SNOWBALL
2019|한국|드라마
2021.09.01. 개봉|109분|15세 관람가
감독 이우정
주연 방민아(강이), 심달기(아람), 한성민(연소영)
출연 이유경(강이 엄마), 양흥주(강이 아빠)
특별출연 김민재, 이민웅
원작 임솔아 "최선의 삶"
프로듀서 백재호
촬영 이재우
음악 이민휘
편집 한영규
배급 엣나인필름
제작 마일스톤 컴퍼니
공동제작 모토MOTTO
 
2020 부산국제영화제 KTH상, CGK&삼양XEEN상(이재우)
2020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2021 뉴욕아시안영화제 국제라이징스타상(방민아)
2021 무주산골영화제 초청
2021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초청
최선의 삶 이우정 감독 방민아 배우 심달기 배우 한성민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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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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