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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1882일' 해고노동자 아버지와 두 딸의 갈등

[문화로 읽는 노동] 영화 <휴가>... 가족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22.02.21 12:00최종업데이트22.02.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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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도 노동이다!

영화 <휴가>의 이란희 감독은 열심히 투쟁했으니 휴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파업 1882일째, 정리해고 무효소송 재판에서도 패소하고 조합원도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남은 경비도 얼마 없이 파업장을 지키는 세 사람. "우리 일단 좀 쉬면 안 될까? 휴가 할까?" 그렇게 시작된 휴가. 주인공의 휴가는 노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도, 기나긴 파업을 재구상하는 시간도 아니다. 이제 그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부재했던 시간보다 더 멀어진 가족, 두 딸들이다.
 
길을 가다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머리띠를 두르고 앉아 있는 한 무리의 노동자들 혹은 곧 휴지통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유인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누군가 한 번쯤 '투쟁의 현장이 아닌 일상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물음을 가져보았다면 영화 <휴가>는 여러 가지 진지한 답변과 마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불굴의 의지로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노동운동가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누군가는 한 번쯤 궁금해 할 해고자의 삶을 거리가 아닌 가족과 일상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그래서 <휴가>는 기승전결의 흔한 내러티브를 갖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높은 톤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 낮은 톤일 수도 있는 이 영화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사람들의 삶의 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정한 가족이란?
 

영화 <휴가>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투쟁의 현장이 아닌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하는 질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다. ⓒ 영화 <휴가>(2020)

 
영화 <휴가>는 농성 중 10일간의 휴가를 받아 가족과 함께하는 재복의 일상을 다룬 '가족영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막혀버려 더러운 물이 잔뜩 고인 부엌 싱크대를 뚫고 밥을 짓고 텅 빈 냉장고를 청소한다. 오랜만이지만 두 딸은 아버지의 귀가에 인사 한마디 없다. 해고를 당하고 집회와 농성장을 오간 5년, 중학생이었던 큰 딸은 고등학생이,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는 중학생이 되었다.

주인공 재복은 밥을 차리고 딸들에게 권해보며 부재의 시간보다 더 멀어진 관계를 어떻게든 메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 며칠 내로 마련해야 하는 큰 딸의 등록금 예치금과 막내가 갖고 싶어 하는 패딩을 사주기 위해 그는 친구가 마련해준 가구회사에서 며칠간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세 식구가 한 식탁에 마주앉게 된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성공적인 미션 수행으로 봉합될 것 같던 가족관계는 말 몇 마디에 다시 산산조각이 난다.

"나 내일 서울 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재복의 선택과 가족의 대립은 날카롭게 서로를 찌른다. 사실 이 아픔을 가족을 뒷전에 둔 재복을 비난하거나 혹은 재복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딸들에 대한 비난으로 읽어 내려가기 쉬운데 여기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가족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가족의 모습은 사랑과 헌신이라는 울타리의 단단함과 이것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구성원에게 위임된 지위와 역할 수행의 적절성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가족공동체의 고통과 상처는 누군가의 무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가부장사회의 특성상 누군가가 가장인 경우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재복의 선택은 그저 개인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이미 재판도 지고 투쟁할 동력도 상실하고 다음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어린 딸을 두고 다시 농성장이라니.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적어도 한 발은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의 착취방식은 물론 기술발전에 따른 노동의 형식과 내용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에도 유독 가족의 모습만은 그대로 남겨져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중요한 토대로서 가족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가족이데올로기는 재복의 선택이나 나아가 노동운동과 연대의 필요성을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본이 저질러 놓은 가족의 해체와 갈등을 마치 재복과 같은 노동자와 그들이 내린 선택의 결과인 양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재복의 가족의 불행이나 상처, 갈등은 무능한 구성원으로서의 아버지 재복과 그가 농성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재복의 선택에 다가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가족을 규정하는 것, 가족과 가족이 아닌 것 등에 대한 다른 입장이 필요하고 적어도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가를 정의내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족의 수평적 배치
 

가족 이데올로기는 자본이 저질러 놓은 가족의 해체와 갈등을, 재복과 같은 노동자와 그들이 내린 선택의 결과로 보이게 한다. ⓒ 영화 <휴가>(2020)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재복의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필요이상의 감성을 자극해 아직까지 농성장에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돌아가는 재복의 선택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의를 따르다 보면 발생하기 마련인 부수적 피해를 가족이 고스란히 떠안거나 일방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복은 휴가 마지막 날 두 딸들과 함께 앉은 밥상 앞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줄곧 딸들의 눈을 마주보지 못한다. 대학에 가 떨어져 살게 되면 혼자가 되는 막내는 어떻게 하냐, 대학에 가지 말고 계속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느냐며 만류하는 첫째의 말에 재복은 시선을 떨군 채 그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만 말한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영화는 누군가의 동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가족인 재복의 갈등과 선택을 수평적으로 배치해 보여준다. 이러한 수평적 배치는 재복의 선택이 단순한 치기나 동정이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의 대립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 속에서 내린 결정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어찌 보면 동지로서, 가족으로서 재복이 갖는 둘 모두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 혹은 죄책감은 이 둘 모두가 가족이라는 것으로 수렴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결정이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겐 피를 나눈 가족도 노동운동을 함께한 동지도 모두 가족이었을 테니.

물론 영화는 재복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재복은 휴가기간 동창이 마련해준 가구공장에서 준영을 알게 되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적 관계를 이어나간다. 준영이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된 날 재복은 그를 찾아가 빈 냉장고를 채워주고 고장난 보일러를 고쳐주기도 한다. 재복은 준영이 자기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한 사실을 알고 그에게 산재신청을 권한다. 그러나 준영은 자기 실수였다며 회사에서 안 된다 하면 소송도 해야 하는데 그런 거 싫다며 산재신청을 강제하다시피 하는 재복과 언쟁을 하게 된다. 결국 준영은 산재신청을 하게 되고 회사는 치료비를 대주기로 결정하게 되지만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영화는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재복이 고공농성에 돌입한 동지에게 올려주며 끝이 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그를 따라다니지만 감정을 자극할 만한 깊이로는 다가가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인 우리는 그가 내린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그의 삶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관객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가족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에게서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수평적 위치를 내 안에서 수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재복의 선택이 가진 무게에 마음의 저울추가 작동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윤상호 님이 작성하였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노동자 가족_이데올로기 정상가족 농성_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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