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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어났니'라는 말 서늘해, 이 영화가 위로됐으면"

[인터뷰]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감독 최진영과 배우 강진아

22.04.13 10:11최종업데이트22.04.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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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어

 
 
제목만 보면 누군가의 위로 같기도 스스로의 다짐 같기도 하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에 담긴 춘희의 삶 자체는 외롭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 따뜻하다. 전주 토박이인 최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은 붕괴한 가족, 친구의 따돌림에도 꿋꿋이 스스로를 피워냈고,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사랑까지 경험하는 한 인생의 이야기다.
 
지난 8일 영화 배급사 사무실이 있는 서울 신사동에서 감독과 춘희를 연기한 배우 강진아를 만났다. 두 사람은 14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부산과 대구 등에서 시사회 후 관객과 대화를 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감독에겐 첫 개봉작, 배우에겐 두 번째 장편 영화 주연작이라는 의미가 있었기에 남다른 소회가 들 법했다. '뭉클함'이라는 단어가 답변으로 돌아왔다.
 
어두웠던 이야기가 밝아지기까지
 
"(첫 장편 주연작이었던) <한강에게> 땐 개봉이 신기하다 이런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시사회를 다니며 뭉클함에 가까운 감정이 든다. 전주에서 오랜 시간 동료와 스태프분들과 함께 했는데 마치 이 프로젝트가 이분들과 함께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더라.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장편 영화를 만드는데 다들 좋은 마음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한다는 게 느껴졌다." (강진아)
 
사실 감독이 완성한 초반 시나리오는 지금보다 다소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였다. 제주 4.3을 다룬 단편 <뼈>라는 작품을 준비하며 심적 고통을 느꼈던 최진영 감독은 우연히 낮잠을 자다가 번개를 맞고 성별이 바뀐 자아와 사랑을 나누는 꿈을 꿨다고. 거기에서 여러 설정과 이야기를 덧댄 게 지금의 결과물이었다. 영화는 엄마의 죽음으로 외가 식구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 춘희가 벼락 사고를 계기로 어릴 적 자신을 마주하는 기이한 일을 겪고, 어떤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의 최진영 감독.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춘희 역을 맡은 배우 강진아. ⓒ 그린나래미디어

 
"IMF 사태 때 옆 학교 학생의 일가족이 그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게 큰 충격이었다. 중학생이었는데 최초로 사회적 죽음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스스로 1990년대에 멈춰 있는 사람이라 말하곤 했는데 그걸 극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10대의 춘희를 그리게 된 것 같다. 진아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시나리오가 안 나왔을 것이다. 처음엔 정말 이야기가 어두웠거든. 춘희가 충격적인 선택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근데 진아 배우님이 기존 독립영화에서 보인 우울한 캐릭터가 아닌 다른 톤을 하면 어떨지 말했고, 그때부터 서로 많은 얘길 주고받았다." (최진영 감독)

"제가 이 이야기에 마음이 뺏긴 이유는 춘희가 부모님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살아난 인물이었거든. 정말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춘희가 초고에선 말수가 적고 수동적으로 느껴졌다. 여러 독립영화를 하면서 어둡고 우물 안에 있는 연기를 많이 했는데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는 작품들이었지만 좀 더 밝은 기운도 나눠드리고 싶었다. 감독님 전 작품이 나름 무거운 주제가 있지만 동시에 감독님만의 귀여움이 담겨 있었거든. 돌아보면 제가 감독님께 무례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최근에 말씀드렸는데 그만큼 감독님이 편하게 다 받아주셨던 셈이다. 어느 순간 감독님이 춘희가 마늘을 까서 돈을 벌면 어떨지 말씀하셨고, 전 마침 춘희가 손에 다한증이 있는 설정이니까 손재주가 좋은 사람으로 설정하면 어떨지 제안하기도 했다." (강진아)
 
강진아의 말대로 영화 주인공이 다한증이 있는 여성이고, 사랑의 상대가 되는 남성은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는 설정이다. 어찌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배척당하기 쉬운 캐릭터를 잡은 것이다. 최진영 감독은 "완벽한 사람들은 이미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니까 우린 미처 생각지 않던 사람을 담고 싶었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사회 분위기가 혐오로 함몰되고 있다. 다한증이나 말 더듬는 걸 요즘엔 질병이라고까진 표현 안 하지만 그런 인물들이 계속 프레임 안으로 호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니까 나 하고 싶은 걸 한 거지(웃음)." (최진영 감독)
 
"손에 땀이 많은 춘희, 말을 더듬는 주황(홍상표)이라는 설정은 틀을 약간 깨는 시도였지 않나 싶다. 춘희가 (다한증 치료를 위해) 마늘을 열심히 까고 손재주도 좋듯, 주황은 태평소를 굉장히 잘 분다. 그런 설정이 재밌었다. 저도 다한증은 아니지만 스스로 뭔가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거든.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만의 불리한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설정이 재밌었다." (강진아)
 

사회적 비극에 대처하는 자세
 
사실 최 감독 생각에선 그간 강진아가 무거운 연기를 많이 했기에 자신의 어둡고 우울한 초고를 이해해줄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 편지였다고. 강진아는 당시 편지 내용을 살짝 언급했다. "한창 감독님이 초고를 쓰실 때였는데 '여름까지 기다려주세요'라는 말이 참 달콤했다"며 그는 "배우는 작업을 제안받을 때가 행복하기에 기다리겠다고 했고, 적절한 시기에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도 IMF를 겪기도 했고, 그로 인해 아플 수 있음을 저도 느꼈었다. 당시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부모님께) 받기만 하던 때였으니. 근데 그 시기 이후에 돈이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사회적 비극과 죽음이 있었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다. 언젠가 연기하게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온 셈이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강진아)
 
그의 말처럼 어른이 된 입장에서 의도치 않게 사회적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함께 산다. 두 사람에게 사회적 비극, 사고처럼 다가오곤 하는 불안과 불행에 대처하는 어른의 자세에 대해 물었다.
 
"집단의 기억, 사회적 기억이라고 하잖나. 항상 망각에 저항해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게 있다. 제가 하는 게 예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적 쓸모는 뭘까 생각한다. 특히 이번 영화를 만들며 더욱 그랬다. 학부생 때 같이 밴드 활동을 했고, 마르크스 스터디를 했던 친구가 있는데 제가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세상을 떠났다. 6개월 전 지인이 하던 서점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오신 적이 있다. '이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해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저같은 사람은 더욱 가슴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최진영 감독)
 
"좋아서 택한 일이지만 생계와 불안정함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러 일을 했었다. 다행히 요즘엔 영화 관련 일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는데 코로나19 등으로 작품 수가 줄어들면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스무 살 때부터 연기해서 불안함을 다루는 데에 선수가 된 것 같은데 종종 그것도 힘들어질 땐 주변 사람들, 되게 가깝지만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더라. 나의 선택이 그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짐이 된다면? 물론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탓할 순 없지만 제 경우엔 이 일을 하면서 점점 함께 하고, 서로 기대며 힘을 얻게 되더라. 저도 그렇게 힘이 되고 싶다. 제가 큰 위로를 드릴 순 없겠지만 이 작품으로 관객분들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다." (강진아)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춘희 역을 맡은 배우 강진아.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제목이 주는 어떤 위로같은 게 있다고 말하자 최진영 감독은 "정말 우연처럼 떠오른 제목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하고 싶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라고 했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장난으로 '왜 태어났니'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마흔이 되면서 그 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태어나는 건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잖나. 그래서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말이 요즘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진영 감독) 
태어나길 잘했어 강진아 전주 최진영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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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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