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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등한 세상 꿈꿨던 민초들의 투쟁

[리뷰]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22.10.13 15:11최종업데이트22.10.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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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구한말의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입에 항거한 민중 투쟁이었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현대적인 시민참여의식의 뿌리가 된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구시대적인 계급질서와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비록 실패한 혁명으로 끝났지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나라가 어려울 때 앞장서서 나섰던 민초들의 저항 의지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10월 12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25회에서는 '1894년, 전봉준은 왜 죽창을 들었나'편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과 위기의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했던 구한말 민초들의 투쟁을 조명했다.
 
1894년 지도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역사상 최대의 농민봉기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 시작은 2년전 현재 전라북도 정읍에 해당하는 고부 지역에서 시작됐다. 1892년 2월 신임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고부에서 농민들의 세금을 뜯는데만 혈안이 된 지독한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다는 불효죄, 형제끼리 불화했다는 불목죄,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를 기리는 공적비 등 기상천외한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수탈해갔다. 또한 조병갑은 만석보를 설치하고 저수지로 물세까지 걷으려했고 보 건설에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무임금으로 착취하기도 했다.
 
의지할 곳 없는 민초들에게 한 줄기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것은 동학(東學)이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이루자'는 이념을 표방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창시자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갔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서학(천주교)에 대응하여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교리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종교로 발전시킨 데서 유래했다. 동학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주적인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을 강조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을 경계하고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 사이에서 크게 번져나갔다.

아버지의 죽음 목도한 아들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1893년 6월, 학정에 지친들은 농민들은 시정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올린다. 하지만 조병갑은 오히려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당시 농민들을 요청으로 탄원서를 직접 작성했던 전창혁이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다. 전창혁의 죽음에 누구보다 분노한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던 전봉준이었다.
 
전봉준(1855-1895)은 어릴적부터 작은 체구에도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뛰어나 '녹두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는 동학에 참여하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와 열정이 누구보다 강했다.
 
전창혁이 사망한 지 3개월이 지난 1893년 11월, 전봉준과 농민들을 비밀리에 모여 '사발통문'으로 결의를 다지고 거사를 단행한다. 여기서 농민군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 점령'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갈취한 탐관오리를 징계할 것' 등을 목표로 제시했다.
 
심지어 전봉준은 여기서 한발 더나아가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로 직행하겠다'는 놀라운 목표를 추가했다. 전봉준의 궁극적 목표가 한양으로 진격하여 조정을 무너뜨리고 아예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것임을 드러낸 기록이다.
 
농민봉기는 이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의식이 성장한 농민들도 과거의 사례들을 통하여 중앙정치에서 변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부패한 탐관오리를 방관한 조정 자체를 바꿔야한다는 것이 농민들이 찾아낸 결론이었다.
 
전봉준과 천여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냈다. 조병갑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달아났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으며 부정부패로 거둔 곡식과 재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줬다. 이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고부농민봉기'다.
 
놀란 조선 조정은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조병갑을 파직시켜 완도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조정은 신임 군수와 함께 고부 사건을 수사하기 위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용태는 고부에 도착하자마자 농민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행동을 잇달아 저지르며 충격을 안겼다.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교도로 몰아 체포했고 당사자가 없으면 아내를 잡아서 간음까지 저질렀다. 유교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 양반 중심의 계급질서를 부정하고 평등 세상을 꿈꾸는 동학은 애초에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고부를 떠나 무장 지역으로 피신하여 다행히 화를 면했다. 전봉준은 여기서 호남지역의 동학 책임자였던 손화중을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중앙정치를 바꾸기 위하여 한양으로 나서기로 결의한다. 본격적인 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화와 군사조직화가 완성된 농민들은 더 이상 일시적인 봉기가 아니라 체계적인 '동학농민군'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조선 조정에 선전포고를 하고 부정부패에 찌든 조선을 동학의 힘으로 구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어느덧 1만명까지 숫자가 늘어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진격한다. 조선 조정은 전주 관군 1천여명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 1894년 4월 7일 동학군은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대파하며 큰 승리를 거뒀다. 동학군은 겁에 질려 후퇴하는 척 관군을 유인했고, 관군은 그런 동학군을 우습게 보고 방심한 틈을 타 기습으로 대승을 거둔 것. 동학농민군의 역사적인 첫 승리로 기록되는 황토현 전투다.
 
조선 조정은 수도에서 최정예 병력 7백여명을 보내 동학군을 조기에 진압하려고 했다. 정예군이 합류하기전에 황토현 전투에서 전주 관군을 섬멸한 동학군은, 황룡촌으로 이동하여 약 보름뒤인 4월 23일에 두 번째 관군과 대치했다.
 
첫 번째 전투와 달리 최신식 무기인 대포로 무장한 정예 관군의 공세 앞에서 죽창과 구식 무기밖에 없었던 동학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동학군은 장태(대나무를 쪼개 엮고 그 안에 짚을 가득 채워 총알을 막는 은폐물)을 방탄차처럼 이용했고,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장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돌격하는 전술로 정예 관군을 무너뜨렸다.
 
승승장구한 동학농민군은 그대로 전주성까지 점령한다. 전라 감사가 농민군의 기세에 놀라 도망가면서 동학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백성들은 동학군의 입성에 두팔벌려 환호하며 기뻐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고종이 이끄는 조선 정부는 사태가 다급해지자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1894년 5월 5일 청군이 조선에 상륙한다. 불과 하루뒤에는 일본군도 제물포에 상륙한다. 청과 일본은 1885년 '텐진 조약'을 맺고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동시에 파병하고 철수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고심 끝에 동학군을 자진해산하기로 결정한다. 전봉준과 동학세력은 외세의 개입이 아닌 자주적인 해결을 원했고 조정에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자진해산하겠다"고 제안했다. 해산 선언 다음날인 5월 8일 동학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전주 화약'을 맺고 정부가 동학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하여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전봉준은 무장투쟁을 잠시 중단했지만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며 탐관오리의 척결과 노비문서의 소각 등을 요구했다. 집강소는 조선사 최초로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이익을 대변할수 있는 자주적 기구를 만들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노비문서 소각은 경직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동학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

하지만 짧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6월 21일에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고종을 인질로 삼으며 본격적인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본의 목적은 처음부터 동학농민군 진입이 이닌 조선 침략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9월 "의로운 병사를 규합하여 일본과 싸우겠다"며 무장투쟁의 재개를 선언한다. 부패한 탐관오리와 조선 조정에서, 일본이라는 외세로 동학농민군의 주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바로 2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삼례에 집결한 전봉준과 4천여명의 농민군은 수도 한양을 목표로 진군을 시작한다. 곳곳에서 농민들의 동참하며 세는 갈수록 커져서 4만여명까지 불어났다. 당시 기록들에서는 "동학군의 세력은 산과 들을 덮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농민군의 위세를 서술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 관군을 선봉에 세우고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조선관군과 공주 일대에서 만나 전투를 벌인다. 연속 발사가 가능한 근대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달리, 화승총과 구식 무기에 의존하던 동학군의 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공주에서 대패한 동학군은 논산으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소집 지시에 다시 2만명이 넘는 병력이 집결한다. 동학군은 최후의 결정지 우금치로 이동하여 다시 일본군-조선 관군에 대치한다. 동학군의 병력은 2천여명에 불과한 일본-조선관군보다 10배 가까이 우위였다.

하지만 무기와 전술의 열세에 유리한 지형마저 빼앗긴 동학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또다시 참담한 패전을 당한다. 동학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고지로 돌격을 감당했으나 일본군의 집중공세에 참혹하게 쓰러져갔다. 기록에는 2차 접전 이후 동학군이 군사를 점검하니 '1만명이던 병력이 3천으로 줄어 있었고, 그 다음 접전 후에는 500명에 불과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학농민군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했지만 끝내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봉준은 11월 27일 눈물을 머금고 끝내 동학군의 해산을 결정한다. 도피하던 전봉준은 그해 12월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다. 전봉준에게는 동학 반란 수괴라는 죄명으로 사형이 내려지며 그가 꿈꿨던 평등한 세상이 오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이후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 역시 붙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놀랍게도 최시형에게 교수형판결을 내린 이는 전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었다. 고종은 동학 혁명이 진압되자 유배를 보냈던 조병갑을 다시 불러들여 고등재판소 판사라는 요직에 앉히며 중용했던 것이다. 반성없는 역사는 악순환처럼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로도 항일의병운동 등에 참여하며 나라를 구하는데 목숨을 바쳤다. 이처럼 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났던 것은 항상 이름없도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보국'과 '안민'의 정신은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지며 자유민주주의 시민의식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전봉준 벌거벗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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