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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부 폐지'한다는 이 나라가 슬프다

[리뷰] 영화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조한나 드메트랙키스 감독, 2018, 미국)

22.10.19 17:03최종업데이트22.10.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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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는 여성들만을 찍은 사진집에서 출발한다. 사진가 신시아 매키넘즈가 작정하고 찍은 여자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고유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무심코 찍힌듯한 사진에서조차 여자들은 '잊었나 본데 나 여기 있어'라고 일갈하듯 독자를 응시한다. 이 여자들은 페미니스트다.
 
깨어났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영화 초반엔 늙었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노장 배우 제인 폰다를 배치한다. 그는 화장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얼굴 전체에 퍼져있는, 이제는 완연한 노배우다. 그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페미니스트다.
 
내 엄마와 비슷한 연배인 그는 믿을 수 없이 활기차다. 그의 인터뷰를 듣다 보면 그의 활기가 쇼윈도 인생을 살아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에만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극성맞은 '톰보이'였던 성정으로 나무를 타고 기어 올라가 꼭대기에 서면, 마치 잔다르크가 되는 판타지에 빠지곤 했다는 회고는 그가 매우 겁 없는 여자아이였음을 드러낸다.

늙었어도 타고난 활달함을 잃지 않은 그는 안타까워했다. 남자아이 못지않게 활달하던 여자아이들이 자라면서 여성성의 유령에 씐 것을. 돌이켜보라. 여자인 당신에게도 하루 종일 뛰어놀고도 성에 차지 않던 혈기왕성한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우리는 우리의 여자아이를 잃어버렸던 걸까. 어째서 운동장을 남자아이들에게 통째로 내주었던 걸까.
 

영화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한 장면. ⓒ 넷플릭스

 
여자라는 이유로 받은 차별

영화를 보다 보면 얼굴은 낯설어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 하게 된다. 팝송에 문외한이어도 어지간하면 다 아는(청년층은 모르겠지만) 그 노래 'California Dreaming'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노래는 존 필립스와 미셸 필립스(당시 부부였다)가 함께 만든 노랜데, 영화에 등장하는 이가 바로 미셸이다.
 
'The Mamas and Papas'라는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불륜 사건으로 그룹에서 내쳐진다. 이혼당한 미셸은 재산 분할은 고사하고 아이의 양육비조차 받지 못했다. 크게 히트한 노래의 공동 저작가였음에도 그는 '여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빈털터리가 되어 쫓겨났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그 순간이 그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였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반가운 얼굴이 등장한다. 지난해 번역되어 출판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저자인 필리스 체슬러다. 그는 이 책을 쓰기 훨씬 앞서 아프가니스탄 남편과 살며 경험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성차별을 다룬 책 <카불의 미국인 신부>로 유명해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혹독한 성차별 경험이 그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열어젖혔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국에 돌아와 2세대 페미니즘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싫은 건 당연한 순서였다. 여자들 스스로 힘을 거머쥔다는 '우먼 파워' 슬로건을 내걸고 힘차게 싸워 나갔다.
 
하지만 필리스 체슬러가 그의 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에서 비판하듯, 2세대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정치적 권력에 집중되었다. 권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신조를 가진 다양한 여성들에게 호소하기 좋은 페미니즘"에 어필하기 위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회적 재정적 지원이나 권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간극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초창기부터 그랬듯 흑인 여성들의 페미니즘과 큰 이격을 벌렸다.
 
영화의 소재인 페미니스트 사진집이나 인터뷰 대상에 유색인종 여성이 드물다. 영화가 그렇게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2세대 페미니스트 전반이 중산층 백인 여성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소수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의 인터뷰는 적은 분량으로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시골에서 살다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마가렛 프레스코드는 페미니즘에 앞서 흑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먼저 접한다. 이는 당연하다. 흑인 인권 운동의 발흥으로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일하며 살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동네 어른들이나 친구와 함께 거리에서 농성하며 자랐다. 가난한 흑인들에게 일할 권리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최소한의 생존권이었다.
 
1977년 휴스턴 여성 회의에 참가한 마가렛은 흑인, 북미 원주민, 푸에르토리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강제 불임시술을 멈추라는 결의안을 연설하려던 순간, 그의 마이크가 꺼져버리는 굴욕을 당한다. 당시 백인 여성들은 낙태권을 밀어붙이기 위해 유색 인종 여성들의 강제 불임시술을 '나중에' 하라고 요구했다. 유색인종 여성들이 낙태권을 반대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유색인종 페미니스트들은 낙태권을 지지함과 동시에, 유색 인종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강제 불임시술의 중단 역시 결의안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강제로 낙태를 당하는 여성들에게 이를 거부할 권리는 임신 중단만큼 중요하지 않겠는가. 임신을 중단할 권리와 아이를 낳아 기를 권리는 전혀 경합하는 의제가 아님에도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경도된 태도는 유색 인종 페미니스트들과의 틈을 크게 벌려놓고 말았다.

백인과 흑인의 페미니즘
 

영화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한 장면. ⓒ 넷플릭스

 
마가렛의 일화는 백인과 흑인의 페미니즘이 동일할 수 없는 지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종, 계급, 장애, 성별 정체성 등이 각각 다르게 작용하며 교차하는 지점을 간과할 때, 하나의 페미니즘이라는 폭력이 일어나고 만다. 어느 여성의 억압을 해방하기 위한 도구가 다른 여성을 억압하는 족쇄가 된다면, 이런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흑인들과 있으면 젠더를 이야기할 수 없고 여성들과 있으면 인종을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 훈민롤라 파그바밀라의 이야기는 흑인 여성이 처한 페미니즘의 곤경을 잘 드러낸다. 각기 다른 지형에 서있음을 감각하고 수용하는 교차성 페미니즘은 과거에서뿐 아니라 삶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지는 현재에도 매우 긴급하고 유효하게 작동되어야 하는 가치다.
 
물론 영화는 여성의 권익에 공헌한 용감한 페미니스트들을 기리기 위해 흑백 페미니즘 갈등을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18년이 어느 때인가(트럼프 집권기로 무지막지한 백래시가 들끓었다)를 돌아보면 그 이유가 선명해진다. 이 영화는 이제는 노인이 된 페미니스트들을 전격 소환해 갖은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페미니즘'을 설파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는 유색인종과 백인의 페미니즘이 갈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해왔다는 믿음으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으로 손을 내민다.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마치 숙원 사업을 해내듯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만나는 여성들마다 기운이 빠져 있다. 얼마 전 만난 여성 인권 단체 활동가는 계속되는 야근에 지친 데다 마침내 정부의 '백래시'를 받고 보니, 정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탄했다. 시름시름 지쳐가고 있는 그들을 보면 슬프고 화가 난다.
 
기억은 안 나지만 꽤 유명한 페미니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 페미니즘은 한해 두 해를 보고 가는 길이 아니다. 세기를 보고 나아가야 한다.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를 보면 이 선언이 헛된 신기루만은 아님을 믿게 된다. '여가부'를 없애도 여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눈 부릅뜨고 살아남자.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여가부 폐지 성차별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교차성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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