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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싸워야 하는 성실씨의 숙명

[문화로 읽는 노동] 드라마 <박성실씨의 사차 산업혁명>(2021)

22.10.17 13:47최종업데이트22.10.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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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스테이지 2021-박성실씨의 사차 산업혁명>에 대해 구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새로 도입된 AI 상담원으로부터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콜센터 상담원 박성실씨를 통해 미리 만나보는 4차 산업혁명 간접체험 드라마."

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근미래의 노동은 우리가 짐작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설정이 있어서 같이 한 번 짚어볼까 한다.
 
AI에 맞선 콜센터 노동자의 생존 투쟁

드라마는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공포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해서든 가변자본 투입량을 줄이고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은 고용주의 일반적인 심리. 고용주는 임직원의 90%를 해고해야 하는 몫을 중간관리자에게 일임하고, 중간관리자는 AI자본주의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조직관리와 경영혁신에 혈안이 되어 있다.

AI상담원의 도입으로 인해 콜센터에서 여성노동자 3명만이 생존하게 된다. 해고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컴퓨터 집기가 쓸모없는 소모품이 되어 처분되는 장면은 인간과 사물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 동료에 대해 애도라도 해야 할 텐데 기업의 리듬은 그런 감정마저도 호사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바로 그 시점에서 이들은 또 한 번의 생존 투쟁에 나서야 한다. VIP 전담 상담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벌 결선 무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주인공 박성실씨는 남편마저 자율주행차에 의해 실직을 당했다. 당장 생존했더라도 영원한 생존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AI와의 일자리 경쟁은 어렵다. 이세돌과 커제마저도 밀려나는 마당에 우리 같은 범인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하나의 역설을 시도한다.

AI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기존의 매뉴얼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번민에 빠져 우연히 내뱉은 말실수 한 마디가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매뉴얼에 없던 '재간'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비법을 공유한 3인 연대체는 AI가 흉내낼 수 없을 '관리되지 않은' 감정노동을 수행한다.

감정노동에서 '감정규범'과 '감정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던 앨리 러셀 혹실드의 발견은 무려 1983년의 일이었다. 그동안 콜센터 노동자들의 가장 잘 알려진 호소 중 하나는 이들의 노동과정이 철저한 통제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고객을 응대하는 매뉴얼은 감정관리, 즉 노동통제의 대표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자 인간이 기계를, 마침내 정의가 불의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힘이란, 노동의 힘이란 바로 이것이 아닌가! 갑질에 분노하는 노동자 고객, 실연에 빠져 울고 있는 고객, 컴컴한 어둠 속에서 수리 기사를 기다리는 고객. 위로와 경청 그리고 위무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심지어 이 노동은 숭고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이 상황을 모니터하고 있던 중간관리자 또한 묘하게 표정이 밝아진다. 그 역시도 바로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 유레카!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왜냐. 바로 이 '일탈'이야말로 AI가 궁극적으로 학습해야 할 데이터였기 때문이다.

생존 노동자 3인이 느꼈을 희열은 거의 실시간적으로 저들의 희열로 둔갑한다. AI가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늘 논쟁적이지만,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는 전망에 이견은 없다. AI보다 앞서나가고자 하는 모든 창조적 행위는 AI의 역량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AI의 승리, 노동자의 패배. 서바이벌 게임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아이러니의 정조는 뜻밖의 순간에 되돌아온다. 주인공 박성실씨가 길거리에 나앉게 된 즈음, 회장은 자기 방으로 행동대장 최 이사를 불러 커피 한 잔을 건넨다.

사냥에 성공했으니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줄 시간이다. 그러다 회장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동공을 확장하며 묻는다. "그런데 자네 연봉이 좀 많지 않나?" 최 이사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극한의 극한을 맛본 듯 회장은 이제야 가장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노동자의 자리, 노동의 자리

앞으로 AI는 일자리만 뺏는 게 아닐 것이다. AI는 일거리 자체를 뺏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러다이트가 재연되지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기계가 내 것을 뺏었다는 분노에서 시작한 파괴적 저항의 역사가 분명 있었지만, 막상 산업혁명의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는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났다는 선례들 때문일까.

30년쯤 전에는 정보화 사회에 저항했던 '유나바머'의 폭탄 테러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감히 그 누구도 AI를 멈출 엄두를 내지 못한다. AI자본주의는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 운명 같은 것일까.

갈수록 사람들이 노동 자체를 신성시하지 않는다든가 근로소득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출구 없음의 운명을 감각적으로 알아챈 결과는 아닐지 생각해본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계발에 힘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깟 '노오력'은 해서 무엇하나. 노동? 그저 받는 만큼만 일하는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소비자 마인드에서 경영자 마인드로, 이제는 그조차 넘어서는 도박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자산소득을 통해 이른바 '경제적 자유'(financial independence)를 확보하는 것 말고는 '좀비'로 전락할 숙명을 거스를 방도를 찾기는 어렵다.

예전에는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가능했다. 노동은 노동자가 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요구였다.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을 때 노동자들은 기업을 향해, 또 사회를 향해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착취가 문제가 아니라 착취당할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가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드라마는 박성실씨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떤 한계 상황에 다다를 것이라 말을 거는 듯하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한계에 대해 한 번쯤 번민에 휩싸여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분명한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성윤 님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0월호에도 실립니다.
AI 4차_산업혁명 박성실 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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