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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로 소환된 과거의 기억... 진한 멜로와 여운이 반갑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창밖은 겨울>

22.11.20 11:52최종업데이트22.11.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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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실로 음악 감상의 '혁명적' 상황처럼 받아들여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전에는 FM 라디오 음악전문방송에서 선택적으로 선곡해주는 리스트에 의존하거나, 흔히 '워크맨'이라 불리던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조금 지나서는 휴대용 CDP를 음악 좋아하던 이들은 챙겨 다니던 시절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듣는 수동적 선곡이 싫다면 자신만의 선곡 리스트를 챙겨야 하는데 이는 물리적 번거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더블 데크 카세트라디오로 나만의 선곡목록을 복제 테이프로 녹음하거나, CD를 별도의 휴대용 케이스에 조심해서 갖고 다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mp3 음악파일은 천지개벽에 준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모두가 거추장스러운 워크맨이나 CDP를 내려놓고 간편하게 자신만의 음악 취향을 꽉꽉 채워 넣은 mp3 플레이어를 뽐내곤 했다. 보다 고 음질과 저장용량을 갖는 하이엔드 플레이어를 자랑하거나, 동영상 재생기능이 추가된 고가의 PMP 플레이어를 갖추려 노력하던 유행도 뜨거웠다. 하지만 전자기기 기술발전은 상상을 초월했고, 현대인의 필수품 스마트폰은 자체에 mp3 플레이어 재생기능을 내장해버렸다. 그 결과 굳이 여러 개의 전자기기를 주렁주렁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기에 순식간에 mp3 플레이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이제 사람들은 한때 몇 년간 유행하던 mp3 플레이어 브랜드들을 워크맨과 마찬가지로 '고대유물'로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정통 멜로드라마의 정취
 
찬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낙엽이 앙상해지는 계절에 딱 안성맞춤 격인 한 편의 영화가 도착했다. 인스턴트 인간관계와 현기증 나는 SNS 속도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당도한 이 영화는 최근 리메이크된 추억의 멜로물 <동감>이 제공해주던 옛 감성을 재현하려는 시도처럼 다가온다. 마치 한국 멜로영화 계보에서 계절별로 유사한 질감의 영화들을 모아내다 보니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타이밍에 공백이 느껴져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 같은 시도다. 그렇게 영화 <창밖은 겨울>은 21세기 초입 시절 이후 잊혀져버린 감수성을 가진 일군의 영화들의 뒤를 잇는다. 그런 부류 중 쉽게 떠올릴법한 <봄날은 간다>나 <동감> 부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작이 등장한 것이다.
 
석우는 영화감독의 꿈을 접으면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는 중이다. 내려와서 새 일을 시작한지 6개월,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을 시간이다. 석우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다. 부모님의 집에서 출근해 종일 버스를 몰다 동료기사들과 밥을 먹고 휴게실에서 탁구를 치는 다른 기사들 점수표시를 거들거나 잡담 한구석에 있다 퇴근을 한 뒤로는 조용히 자기 방에서 동면하듯 웅크린 채다.
 
어느 날 문득 석우는 버스터미널에서 누굴 본 것 같다.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는 익숙한 mp3가 남겨져 있었다. 그는 터미널 유실물 보관소 관리담당인 영애에게 mp3를 넘긴 후 끈질기게 누가 찾으러 오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영애가 보기엔 mp3는 버린 물건에 불과하다. 심지어 고장이 나 작동하지도 않는데 석우는 집요하게 주인이 찾으러 올 거라 주장한다. 서로 전혀 판단이 다르긴 하지만 영애는 이 기묘한 상황을 계기로 석우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유실물관리소 공간을 직원휴게공간으로 대체하게 되자 영애는 석우에게 mp3를 건낸다. 석우는 퇴근 후 진해 곳곳을 다니며 수리를 알아보러 선배인 최 기사와 자주 근무시간을 교대하며 돌아다니고 영애가 자연스럽게 그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겠지만 석우가 고장이 난 mp3와 그로 인해 생겨난 어떤 기억에 사로잡혀 있음을 간파한다. 이제 영애의 석우를 향한 호기심은 함께 mp3를 수리하고 석우가 그 과정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함을 풀기위한 동력이 되어간다.
 
mp3 플레이어에 농축된 감성들
 
실은 석우에겐 영화감독을 지망하던 시절 그 꿈을 공유하던 연인 수연이 있었다. 수연은 6개월 여 전 석우 곁을 떠났다. 석우는 바로 그길로 낙향한 셈이다. 함께 꿈꾸던 길을 잃어버린 채 석우는 고향 진해에서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유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 연인 수연이 고향에 내려와 있다는 걸 알게 된 석우는 수연과 지역 영화단체 모임에서 대면하고 계속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영애는 혼란에 빠진 석우를 안쓰럽게 지켜본다. 그런 가운데 계절은 점점 겨울로 향해간다.
 
꿈을 꿀 수 있었던 시간이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통 나타나지 않던 석우의 서울생활은 실패했고 그는 패배를 인정하며 고향 진해로 내려와 유배지에서의 은둔을 시작한 상태다. 수연과 함께 비록 빈궁하고 불안정할지언정 미래를 향하던 그의 시간은 6개월 전에 멈춰선 상태다. 석우의 엄마는 생기 없이 칩거하듯 보이는 아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대개 부모는 나이 찬 자식이 영화하는 꿈을 접겠다면 박수를 칠 텐데 말이다) 그런 가운데 문득 수연의 자취처럼 느껴지는 mp3는 석우의 겨우 봉합된 가슴을 뒤흔드는 파문으로 다가온다. 옛 애인 수연과, 그녀로 상징된 영화로의 꿈이 결합된 이 전도체는 석우를 찌릿찌릿하게 만들지만 지속될 수 없는 성질을 띤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석우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며 끊어내지 못한다.
 
영애는 그런 석우에게 먼저 다가와 닫힌 문을 두드리는 존재다. 하지만 좋았던 옛 시절과 꿈에서 여전히 헤치고 나오지 못하는 상태의 석우는 그렇게 꽁꽁 얼어붙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그런 영애의 호감을 순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에겐 매듭을 맺고 끊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이 대목에서 영애는 석우를 수렁에서 끌어내는 엔진이자 동력이 되어 손을 내밀어준다. 마치 고향 진해의 정령이 돌아온 탕자를 보듬어주듯이 영애는 자기 과거에 사로잡힌 석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거듭된 선물 같은 계기들 덕분에 석우는 비로소 새로운 출발점에 설 결의를 다질 수 있게 된다.
 
영화를 꿈꾸며 서울로 향했던 감독의 자전적 경험담
 
영화에는 이상진 감독의 자기반영적 설정이 도드라진다. 한국 현실에서는 지방 중소도시 출신이라도 영화를 꿈꾸는 대다수가 타향(그중 절대다수는 수도권)으로 떠나게 마련이다. 대개 대학을 영화전공으로 진학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서 성공을 꿈꾸며 도전하는 과정이 겹쳐진다. 하지만 영화로 밥 먹고 살면서 자기 영화를 작업해 세상에 선보이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다. 그렇게 세파에 지친 이들이 상처와 실패를 안고 패배감에 젖으면 결국 일시적이건 영구적이건 고향으로 돌아오게 마련. 하지만 정작 돌아온 고향에선 말도 통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 선배 버스기사들이 독립영화를 했다는 석우에게 그가 했다는 영화가 '독립군영화'냐 아니면 '빨갱이영화'냐고 별 악의도 없이 물어보던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뭔가 타지 물 먹은 낯선 존재로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느낌이다. 작은 도시 특성상 신참은 늘 썩 내키지 않는 관심사에 오르내리고,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된다. 그런 과정을 겪어가며 당사자는 좌절감에 더 움츠러들게 된다.
 
영화 속 고향에는 소수이지만 지역영화단체도 존재하고 영화제도 작게나마 열리는 중이다. 적지 않은 지역에서 비록 지역사회 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더라도 이런 형태의 소규모 독립영화 인 조직과 활동은 쉽게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몇몇 지역에선 적극적으로 '로컬영화'를 표방하며 서울로 가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영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노력도 드물지 않은 풍경이다. 석우를 알고 있던 동료 지역 영화인들은 그에게 함께 활동하기를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석우는 그런 제안을 사양하며 사실상의 은둔생활을 고수하는 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금 같은 상태로만 지낼 순 없는 노릇이다. 이제 주인공은 겉보기엔 무미건조하고 시간이 멈춘 듯 지루했던 고향에서 속속 새로운 인연과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일련의 과정을 경유하는 전개가 로맨스의 형태로 구현된다. 모든 걸 굳이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요즘 연애물과는 다르게 두 주인공은 참 멀리 돌고 돌아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여정을 거친다. 중간에 소소하지만 만만찮은 시련과 오판이 이어지지만 작품 속 배경인 지방도시 진해의 느릿한 순환은 다행히도 궤도이탈을 막아주며 자신을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배우들의 활약과 배경의 조화
 
영화를 위해 석우 역의 곽민규 배우는 1종 보통 면허를 취득해 직접 버스를 몰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작품 속에서 스태프 시절 필요 때문에 미리 면허를 땄던 게 전화위복이란 식으로 차용된다) 영애 역의 한선화 배우는 아이돌 활동 이후 봉인해뒀던 고향 경남방언을 구사하는 도전에 나선다. 석우는 여전히 서울말만 구사하며 과거에 얽매이곤 한다. 그가 극중에서 버스를 몰다가 늘 지나치던 로터리를 (동물원에 갇힌 대형 야생동물이 앞뒤를 반복해 오가며 정형행동을 보이듯) 반복해 맴도는 장면은 그런 그의 심리상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유체이탈 같은 심리상태 때문에 그는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망설이며 회피하기 일쑤다. 그런 석우와 대비되는 영애의 구수한 고향 사투리는 단지 개별 캐릭터의 개성을 넘어 진해라는 시공간의 중력처럼 전해져온다.
 
여기에 중후반 석우를 더 큰 혼란으로 떠미는 존재가 있다. 고장 난 mp3가 인간 형상을 갖추고 돌아온 것만 같은 수연의 홀연한 등장이다. 과거회상 장면 외엔 몇 장면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 내내 석우의 머릿속에는 수연이 떠나지 않는 셈이다. 그렇게 우유부단을 떨치지 못하는 석우에게 부족한 결단력을 선보이는 건 항상 자식을 염려하던 석우의 엄마다. 그녀가 자신의 황혼 시간을 위해 발표하는 단호한 선언은 영애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이어 주인공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도끼질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따스한 고향인심을 의인화한 것만 같은 선배 버스기사 듀엣의 깨알 같은 감초 역할이 찬바람 새어 들어올 구석을 메워준다. 고향 진해라는 역사도시의 오래된 낡은 풍광을 감독은 효과적으로 활용하는데, 인쇄소를 칭하는 일제강점기 시대 표현인 '인파사'나 문방구를 일컫던 '문구사' 간판이 붙어있는 진해 구석구석 옛 건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시대의 뒤안길로 어느새 사라져버린 mp3 플레이어를 수리할 수 있는 옛 '장인'들의 등장은 도시 판타지의 기운으로 훈훈한 온기를 채워내며 다가온다.
 
옛날 버스정류장이나 학교 교문 앞에서 누군가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무작정 기다리며 꼬깃꼬깃 접어놓은 자필로 쓴 편지를 꾹 손에 쥔 채 기다리던 정서가 가득 채워진 영화, <창밖은 겨울>을 통해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어떤 기운을 글로 온전히 전부 구현하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다. 능히 예상 가능한 왕도 로맨스 멜로드라마의 진행과 크게 차이나지는 않지만, SNS로 보낸 단문이 확인되거나 답장이 오지 않으면 참을성이 바닥날 만큼 속도에 중독되어버린 세태에서 이렇게 결이 다른 작품을 만나는 희귀한 체험은 소중할 뿐이다. 고풍스런 멜로드라마 영화의 기운에 겨울 초입 스산함을 떨쳐낼 온기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실망스럽지 않은 선택이 될 작업이다.
 
<작품정보>
 
창밖은 겨울 When Winter Comes

2020|한국|멜로 드라마
2022.11.24. 개봉|104분|12세 관람가
감독 이상진
주연 곽민규(공석우 역), 한선화(양영애 역)
출연 안민영(석우 모 역), 목규리(수연 역), 천신남(천기사 역), 박현민(김기사 역),
이재우(최기사 역), 손성찬(석우 부 역), 김민희(석우 누나 역), 주은실(영애 모 역),
이정비(여직원 역), 주형준(본부장 역), 김진혁(박감독 역), 최희진(수리기사 여 역),
이익수(수리기사 할아버지 역)
PD 서채훈
각본 이상진
촬영 김진범
편집 원창재
음악 김채은
제작/제공 끼리끼리필름
배급/공동제공 영화사 진진
 
2021 2회 합천수려한영화제 우수상
2021 22회 전주국제영화제
2021 21회 전북독립영화제
2022 9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창밖은 겨울 이상진 감독 곽민규 한선화 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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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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