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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당일, 여자들이 모두 집을 나간 까닭

['설 빌런'에게 대신 전합니다] 카카오tv <며느라기>·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속 여자들

23.01.22 11:49최종업데이트23.01.2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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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느 때보다 이른 설 명절이 반갑기만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답답해지는 이들도 있죠. 남편 뒷바라지만 강요하는 시어머니, 걱정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만 늘어놓는 친척들, 설 연휴에도 일하라는 사장님,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추억의 빌런'까지. 그들이 보고 무언가 깨달을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노래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2023년 새해가 밝았다. 해를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명절이 돌아왔다. 명절을 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냥 넘기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분명 가족과 친지가 오랜만에 모여 덕담을 나누고 안부를 묻는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하거늘. 피곤한 사람들이 어느새 늘어나고 있다. 
 
명절 이후 이혼율이 급증하고,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 명절 증후군은 전 세대를 걸쳐 나타나고 있다. 명절만 되면 만나 싸우는 사람들, 명절 이후 인연을 끊는 사람들, 명절이 두려운 사람들은 왜 계속 늘어만 갈까.
 
그래서 모아봤다. 명절에 유난히 활개 치는 빌런즈! 스트레스를 부르는 빌런들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 하나씩 소개한다. 부디, 본인이 빌런인지 아닌지 이 영화들을 보고 조금은 깨닫길 바라면서.
 
미리 밝히자면 필자는 여성과 여자를 구분해서 썼다. 명절은 사회적 젠더보다 생물학적 성별이 우선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직 여자만 필요하다.
 
명절 음식은 왜 여자들의 몫인가?
  

웹드라마 <며느라기> 스틸컷 ⓒ 카카오tv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에서는 신혼부부 민사린(박하선)이 무구영(권율)과 결혼 후 처음으로 시어머니 생신과 시가 행사를 겪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철저한 유교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고부갈등을 주제로 큰 공감대를 얻었다. K 며느리가 결혼 후 겪게 되는 문화 차이가 내 이야기같이 사실감 넘치게 펼쳐진다.
 
사린은 모처럼 휴일에 한가로움을 느끼려던 것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제사 소식에 황망하다. 귀찮지만 며느라기는 시가에서 싹싹하게 보이고 싶어 열심히 일했다. 남편이 거들려 하자 부엌 밖으로 내쫓아 버리는 시어머니가 야속하고, 남의 집 조상 모시는 일에 남이 일하고 있는 상황이 혼란스럽지만 꾹 참기로 한다. 오늘 내가 희생한 만큼 조상 덕 본다면 어떻겠냐고 다독였다.
  

웹드라마 <며느라기> 스틸컷 ⓒ 카카오tv

 
그러나,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며느리도 가족이란 순진한 생각은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숨만 쉬었는데 금방 명절이 돌아왔고 남편과 합의 후 시가로 향했다. 다시는 저번처럼 서운하고 당황스러운 일은 없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대실패.

시어머니는 성평등 시대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맞벌이가 대세라고 말하면서도 가정에선 여자만 일하게 만든다. 물론 남자들이 함께 하는 집안도 있겠지만 대부분 여자가 가사노동을 책임진다.
 
그럼 누가 빌런일까? 시어머니가 빌런이라 믿었던 초반 생각은 드라마를 보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이 집안의 최강 빌런은 바로 '시아버지'였다. 시어머니도 결혼 전에는 귀한 딸이었지만 결혼했다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몇십 년째 모시고 있다. 따져보면 무씨 집안에 가장 크게 헌신했다. 차례 음식은 자고로 손이 많이 가서 시어머니가 전담하느라 물 마를 날 없다. 며칠 전부터 장 보고, 다듬고, 전날부터 준비하다, 당일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또 준비한다. 준비만 벌써 몇 주 째인지 싶지만 힘든 내색 안 하신다.
 
정작 고생했을 시어머니를 위로하는 사람도 단 한 명도 없다. 인사치레겠지만 작은아버지가 다독여 주자, 시아버지는 "고생은 무슨 고생, 매년 하는 일인데"란다. "오늘 고생했다"라고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보상을 수년째 무일푼으로 넘겨왔다. 이런 생각은 시어머니의 서운함을 유발해 고스란히 며느리로 계승된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골병드는 사람은 결국 시어머니다.
 
명절 당일 여자들이 다 같이 집 나갔다?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컷 ⓒ ㈜백그림

 
화목한 가족의 정의는 누가 정하는가. 무엇이 충족되면 화목해질까 싶다. '돈' 때문에 원래도 화목하지 못했던 가족이 막장까지 가는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식칼 대신 차키 들고 기름 냄새에서 해방된 여자들의 반란을 보여준다. 집안에 여자들이 사라지자,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질한 남자들의 좌충우돌이 코믹하게 펼쳐진다.
 
영화는 실제 웹 게시물을 바탕으로 영감받아 제작했다. 수년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물 '큰 엄마한테 납치당함'은 큰 이슈였고 영화제작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동의 없이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를 뒤늦게 알고 연락한 원작자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후문이다.

어쩐지 상상해서 쓰기 힘든 지독한 실생활의 짠내가 났다. 좀 과장되기는 했지만 남의 집 같지 않은 리얼리즘도 전해졌다. B급 감성 물씬 풍기는 연출에 수준급 배우진이 총출동해 만든 뼈대 있는 영화였기에 가족과 같이 보면 서로 느끼는 게 다르리라 생각한다.
 
명절이자 생일인 은서(김가은)는 결혼을 약속한 지상(정재광) 집에 인사드리러 왔다. 분명 핵가족이라고 했는데 식구가 너무 많아 당황스럽지만 이미 들어왔기에 나가기도 좀 그랬다. 뭐라도 해야 할까 싶어 본능적으로 앞치마를 두른다. 
 
부엌에 들어가 엉거주춤 있는데 유씨 집안 남자들은 하나같이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부엌에 모인 여자들만 전쟁터에 출동한 전사 같다. 같은 공간 다른 느낌이다. 평온한 남자들의 공간은 아주 가관이다. 수발 주문도 제각각, 스트레스를 부르는 유씨 집안 남자들이다.

결국 오랜 세월 쌓아온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큰엄마(정영주)는 장 보러 간다면서 여자들을 데리고 탈출하기에 이른다.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봉고차를 끌고 운전도 미숙한 큰어머니가 고속도로를 누빈다.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컷 ⓒ ㈜백그림

 
여자들은 백 년 만의 일탈이라며 신났다. 아침부터 음식 하다 말고 나왔더니 허기가 진다. 명절에 남의 밥 차리고 물리고를 반복하던 여자들은 처음으로 누가 해주는 음식을 맛본다. 뭘 먹어도 꿀맛이다. 실제로 가정에서 여자들은 직접 차린 밥보다, 날 위해 차려주는 밥상이 진수성찬보다 반갑고 맛있다고 털어놨다.

그 시각 남자들은 증발해버린 여자들을 한없이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이 장면은 인상적이고 대조적이다. 당연히 늘 대접받고 살아왔기에 바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남자들. 여자들과 연락이 닿지 않자 어떻게든 제사 음식을 만들려고 고군분투한다.
 
재미있는 점은 제사 한 번 빼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큰아버지(유성주)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라는 거다. 이유인즉슨, 제사 역사를 바꾸려던 선조들이 돌연사했기 때문이다. 조상님을 분노케한 저주라도 걸릴까 무서워 동동거렸던 거다. 이 사실을 역으로 이용한 큰엄마는 재개발로 문중땅 보상금이 생기자 일부를 위자료를 요구한다. 유씨 집안 여자들은 졸지에 큰엄마의 이혼 인질이 되어 버렸다.
 
영화 속 빌런은 누가 봐도 가부장제의 꽃 큰아버지겠으나, 돈 앞에선 모두가 빌런이다. 이익 앞에 가족도 없다는 숨은 교훈이 앞선 콩가루집안의 역설이다. 이 영화는 다소 뻔한 설정에 기대 생각지도 못한 울림을 주기에 추천한다. 큰엄마, 시어머니, 할머니, 숙모 등으로 불려왔던 여성들의 이름을 되찾는 일로 뭉클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부디 정체성과 이름을 잃지 말고 살아가길 일깨워 준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 완벽한 가족은 있을 수 없기에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며 만들어 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명절은 모두가 기다리는 날이 돼야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컷 ⓒ ㈜백그림

 
명절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날이다. 다들 바쁘게 사느라 얼굴 보기 힘든 친지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날. 모두가 기다려온 때라야 의미가 생긴다. 누군가는 못다 한 취미 생활을 꾸리고, 잠을 보충할 것이며, 해외여행을 다녀올 계획도 있을 거다. 정 바쁘면 업체에 음식을 맡기고, 여행 중이면 이 기회에 조상님도 여행지로 불러 보는 거다.
 
설과 추석에 얼굴 붉히는 일, 이대로 반복되어야만 할까? 가족 구성원 모두 유연한 사고방식을 함께 지는 건 어려운 걸까? 대물림되는 여자들의 노동을 줄이고 다 같이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퍼지길 바라본다. 물론 처음부터 바꾸기 쉽지 않겠지만 조금씩,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명절에 가짜 깁스를 하고 나타나는 며느리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10년 전 우리 시가도 6번이던 제사를 4번, 3번으로 줄이더니 이제는 설과 추석 두 번만 지낸다. 집집마다 상황에 맞춰가는 거다. 죽은 사람 모시자고 산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은 바꿔야 하는 게 맞다.
  

웹드라마 <며느라기> 스틸컷 ⓒ 카카오tv

 
몇 년 전만 해도 없던 병도 생기는 명절 증후군은 익명 게시판에서나 볼 수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나도 그렇다!'라며 공감하고 분노했다. 그러다가 부당하거나 억울한 일이 웹툰,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공론화되었다. 몰래 씹고 즐겼던 소재가 메인 요리로 세상에 나와 버린 거다.
 
그래야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했음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몰랐다면 알면 되고, 무시했다면 경청하면 될 것이다. 한쪽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되고, 오랜 전통이니 참아야만 하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귀하게 키운 내 자식도 결혼하면 그 집에서는 타인이다. 시선을 돌려 역지사지를 십분 발휘해 보면 한결 편해진다. 올해 명절에도 여성은 그저 앞치마 두른 여자가 된다.
명절증후군 며느라기 큰엄마의미친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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