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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살아서 이 영화를 봤다면

[리뷰] <헌트>

23.01.26 10:16최종업데이트23.01.2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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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헌트> 포스터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사냥은 살아있는 무엇을 잡는 일입니다. 총과 활로써 또는 올가미와 길들인 동물로 인간은 사냥을 합니다.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숨통을 끊고, 꼼짝 못하게 붙들어서 야성을 제압합니다.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은 사냥감의 전부를 얻습니다. 사냥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냥'을 제목으로 내건 영화가 있습니다. 배우 이정재의 첫 연출작으로 지난해 여름을 강타한 <헌트>입니다. 배경은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0년대 초입니다. 신군부가 군화발로 광주를 짓밟은지 고작 3년여가 지났을 즈음입니다. 경제는 북한을 앞질러 팽창하는데 정국은 소란하여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선 비명소리가 그칠 줄 모릅니다.

안기부엔 두 명의 차장이 있습니다. 해외팀을 이끄는 박평호(이정재 분)와 국내팀 수장 김정도(정우성 분)입니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각각 연기한 두 차장의 대결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안기부에 새로 부임한 안부장(김종수 분)은 둘을 따로 만나 은밀히 지시합니다. 지시는 다름 아닌 서로를 조사하란 겁니다. 안기부 내엔 북한이 심어놓은 고정간첩 '동림'이 있다는 풍문이 나돕니다. 이를 입증하는 정황까지 속속 드러납니다. 평호와 정도는 서로가 간첩일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의심이 아니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면 간첩으로 몰릴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잡지 못하면 잡혀 먹히는 긴박한 상황에서 둘은 전력으로 서로의 뒤를 쫓습니다.

영화는 지루함을 모르고 질주합니다. 조직 안에 간첩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평호와 정도의 팀이 서로를 조사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이가 누가 있을까요. 의뭉스런 구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급기야 둘 중 하나가 간첩이란 사실까지 확인됩니다. 아예 북한이 심은 고정간첩단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또 다른 조직이 부상합니다. 마침내 암살계획이 시행되고 암살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가 일대 결전을 벌입니다. 때가 되면 재깍재깍 불판을 갈아주는 고깃집이 이러할까요. 영화는 지루해질 즈음 판을 갈아엎고 다시 엎기를 반복합니다. 관객을 앞지르는 속도감 있는 전개가 세세한 단점을 잊게 합니다.
 
전두환 실제 세례명 '베드로', 이토록 적극적이라니
 

영화 <헌트>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헌트'는 말 그대로 사냥을 뜻합니다. 처음엔 평호와 정도가 서로를 사냥하려 하고 나중에는 더 큰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종착역은 이른바 '베드로 사냥'입니다. 영화가 특별해지는 건 바로 이 지점부터입니다. 베드로는 전두환의 실제 세례명입니다. 영화엔 전두환의 이름이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사냥감이 전두환이란 사실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습니다.

첫 장면은 너무나 의미심장하여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실제 인물과 관련 없는 픽션이란 안내로 시작하고서는 곧장 민머리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는 것으로 포문을 엽니다. 'Based on true story 실화에 기초했음' 정도로 출발하는 게 보통인 할리우드나 유럽권 영화에 비해 다분히 조심스런 자세가 민망하지만, 이내 드러나는 목표물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할 만큼 분명합니다.

영화의 목표는 처음부터 확실합니다. 한국사회가 씻지 못한 현대사의 과오를 영화로나마 씻겠다는 계획입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암살자의 목표물이 된 대통령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사냥감으로 존재합니다.

한국사회는 전두환을 심판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법은 그에게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한때나마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그를 사면했습니다. 민주화의 열망을 꺾고 무고한 생명을 짓밟은 죄를 전두환은 고작 5년의 징역으로 치렀습니다. 그뿐입니까. 정부는 그에게 1000억 원에 달하는 추징금도 징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생을 호화롭게 살면서도 '전 재산이 29만 원에 불과하다'는 망언을 농담 삼아 던지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광주에서 벌인 만행을 끝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한국사회는 전두환을 심판하지 못했습니다.

영화는 민중의 편에 선다
 

영화 <헌트>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예술은 때로 역사와 문화와 법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앞장서 해내곤 합니다. 찰리 채플린은 저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가 살아 있을 적, 그를 마음껏 조롱하여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흥행한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콧수염과 걸음걸이, 손동작으로 현실 속 독재자를 스크린 안으로 소환해 마음껏 비웃었습니다. 나라와 독재자의 이름을 모두 꾸며냈다곤 하지만 누가 보아도 히틀러인 그가 과대망상적 행태를 보이는 광경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집니다. 히틀러를 조롱하는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상영금지조치 하겠다며 몸을 사렸던 영국은 막상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과 영국에 대한 폭격이 이뤄지자 채플린의 영화에 열광적 지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히틀러는 포위된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나 예술은 그를 편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경박하고 졸렬한 독재자 히틀러를 등장시켜 처참하게 응징합니다. 히틀러를 위시해 나치 간부들이 모여든 극장에서 '개떼들'은 이들을 불태우고 터뜨리며 쏘아 죽이는 피의 복수극을 자행합니다. 히틀러는 히틀러이고 나치 역시 나치인 이 영화에서 그들은 어느 법정에서보다도 냉혹하게 심판 당하고야 맙니다.

실화 바탕의 영화도 없지 않습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는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암살시도 후 이어진 쿠데타까지를 다룬 영화에서 싱어는 히틀러를 빈사상태로 몰고 갑니다.

히틀러만이 아닙니다. 영화는 역사의 죄인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습니다. 대중예술인 영화는 필연적으로 소수가 아닌 민중의, 독재가 아닌 민주의, 기득권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법과 제도와 정치가 벌하지 못한 자들을 예술이 나서서 심판하게 되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가 살아 이 영화를 보았다면
 

영화 <헌트>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두환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죄인입니다. 공과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용서받을 수 없는 죄과가 분명합니다. 그는 집권을 위해 군의 총구가 시민을 향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숨지고 다쳤습니다. 비록 1심 재판부의 사형 판결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경되었고 급기야는 사면되기에 이르렀으나, 그래서 더욱 예술은 그를 심판해야 합니다.

영화는 <바스터즈: 나쁜 녀석들>과 <작전명 발키리>의 중간쯤에 서 있습니다. 전자가 외부 특공대에 의해 이뤄지는 테러라면, 후자는 내부 반대세력에 의한 쿠데타입니다. <헌트>는 안기부 두 차장에 의해 이뤄지는 암살계획이란 점에서 후자에 가깝지만, 정치적인 요소를 살리는 대신 첩보물의 장르적 쾌감에 집중한단 점에서 전자와 유사한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클라이맥스는 '아웅산 테러'에서 모티프를 얻은 폭탄테러 장면으로 꾸려집니다. 전두환을 살해하려는 북측 공작원과 그들의 손을 빌려 대통령을 처단하려는 안기부 요원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가운데, 전쟁의 위협을 막으려는 또 다른 이가 그 앞을 막아섭니다. 태국의 행사장은 일대 혼란에 휩싸입니다.

<헌트>는 전두환이 사망하기 전 모든 촬영을 마쳤습니다. 거짓말처럼 영화가 마지막 촬영을 한 바로 그 달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게 편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 변명도 허락하지 않고 가차 없이 사냥을 개시했습니다. 실제 아웅산 테러 현장에선 화를 피했던 전두환은 영화 속에서 의식을 잃고 흙바닥에 드러눕습니다.

멋지지만 실패한 사냥, 현실은 다르기를
  

영화 <헌트>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역사를 뒤집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일어나고 그를 사냥하려 한 이들은 무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전두환에 대한 심판은 그를 흙바닥에 눕히는 데까지입니다. 그 대가로 평호와 정도는 목숨까지 내놓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종결됩니다. 사냥도 심판도 실패로 끝납니다.

전두환을 심판하려 했던 <헌트>의 한계는 바로 여기서 명확해집니다. 확정판결을 받은 역사의 죄인은 영화에서조차 제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아 영화에서조차 독재를 이어갑니다. 죽은 전두환이 살아있는 제작진과 관객들을 물리치는 꼴입니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는 사냥이라 하지만 정확히는 실패한 사냥입니다. 전두환이 죽어버린 뒤에야 개봉한 영화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그의 숨통을 끊어놓지도 못합니다. 사냥꾼은 죄다 죽고 사냥감이 살아나는 결말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습니다. '헌트'는 결국 현실만큼이나 참담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헌트 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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