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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고독한 투쟁, 그래도 진실은 무너지지 않는다

[TV 리뷰] tvN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23.03.02 11:16최종업데이트23.03.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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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어록으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제기한 지동설(地動說, 태양중심설)은 이전까지 상식처럼 여겨지던 천동설(지구중심설)을 대체하면서 인류의 우주관 정립 및 합리성을 강조하는 과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하지만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학자에게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2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88회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의 불편한 진실' 편을 통해 갈릴레오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이탈리아 미술사 전문가인 구지훈 국립창원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지구의 진실을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그 역사가 깊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은 현대에서 기본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일각에서는 아직도 '지구평면설'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지구원형설과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단아 취급을 당했다.
 
갈릴레오가 살았던 16세기 중세 이탈리아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였다. 고대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 신의 법칙에 따라 지구의 주위를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했고, 중세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피사 지역의 몰락한 귀족인 피레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갈릴레오는 어릴 때부터 주변 현상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습관이 있었고 이는 그의 수학적 사고력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갈릴레오의 부친은 아들이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경제력이 보장된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정작 갈릴레오는 오히려 의학보다는 수학에 더 재미를 느꼈다. 갈릴레오는 진자의 원리를 활용한 최초의 맥박계를 개발했고 이는 시계의 발명을 통하여 정확한 시간개념이 탄생하는 배경으로 이어진다.
 
진로 문제로 부친과 갈등을 빚던 갈릴레오는 학비 지원이 중단되자 수입을 마련하기 위하여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수학 강사로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단테의 신곡-지옥' 편에서 묘사된 문구를 바탕으로 지옥의 크기를 수학적으로 조합해냄으로써 상상 속의 존재들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갈릴레오가 계산해낸 악마 루시퍼의 키는 약 1.12km, 지옥의 부피는 지구의 약 1/14라는 것. 종교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되던 지옥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모습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갈릴레오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갈릴레오는 1589년, 당시 25살의 나이에 피사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된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교수로서의 평탄한 삶에 안주하는 대신, 그동안 본인이 간직해왔던 지성적인 의문들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면서 인류가 약 2천여 년간 쌓아온 진리들과 대립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유낙하운동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바람, 흙.물, 불)을 기준으로 무거운 물체일수록 더 빨리 떨어지며 그 원리는 신의 목적이자 절대 진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우박이 떨어지는 모습을 관찰하다가 크기와 무게와 다른 우박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구심을 품었다. 갈릴레오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연구를 거듭하며 '운동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 갈릴레오에 대한 평판을 급격히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갈릴레오는 결국 교수 재임용에 실패한다.
 
생계 문제로 한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갈릴레오는 친분이 있던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파도바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갈릴레오는 부수입을 마련하기 위하여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기숙학원을 운영하는가하면, 온도계와 군사용 컴퍼스 등의 후대까지 이어지는 실용적인 발명품들을 잇달아 개발해냈고 이는 훗날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더욱 발전했다.
 
당시는 아리스토켈레스의 주장처럼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갈릴레오는 당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는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면서 종교와 과학계를 중심으로 절대원칙으로 여겨지던 천동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가톨릭 사제 출신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먼저 제기한 '지동설'은 갈릴레오에게 큰 영감을 줬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따르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자연 현상들은,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해진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전에야 지동설을 믿었던 사실을 고백했을만큼 이런 주장을 대놓고 드러내기에는 쉽지않은게 당시의 사회 분위기였다.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한 '초신성'의 등장은 갈릴레오가 주장하던 지동설에 대한 심증에 불을 붙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따르면 천상계는 흠이 없는 영원불멸한 공간이기에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지자자들은 지구와 달 사이는 완벽한 천상계에 해당하지 않기에 새로운 별이 등장한다고 해서 기존의 이론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끼워맞추기식 주장을 했다. 갈릴레오는 논문을 통하여 "이런 공상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고 일축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자연과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우직한 외골수 학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의외로 '슬기로운 사회생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갈릴레오의 주장은 기존의 종교적 이론을 뒤흔드는 것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수학 제자이기도 했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를 후원자로 삼아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났다.
 
한편 갈릴레오의 연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망원경'의 활용이었다. 갈릴레오는 당시 우주 천측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도구였던 고배율 망원경을 직접 연구 개발했고, 코시모 2세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판매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갈릴레오에게 망원경이란, 생계수단이자 마케팅의 도구인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파에 맞서 지동설을 증명할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하여 달의 표면을 분석했다. 당시는 종교적 이유 등으로 달의 표면이 깨끗하고끄러울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지만,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달을 직접 관찰하고 '달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높고 낮은 돌출부로가득차 있다. 지구 표면과 같이 높은 산과 계곡이 있다.(별들의 전령)'는 진실을 알린다. 독실한 종교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이야기에 큰 충격에 빠졌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주장은 당시 종교적 세계관의 측면에서 봤을 때 성경에도 기재된 성모 마리아의 순수성을 깨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도 흠집을 내는 결과였다. 갈릴레오의 관측 이후 달을 묘사하는 예술가들의 인식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갈릴레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망원경을 통하여 '금성의 궤도변화, 목성 주위를 맴도는 위성'의 존재을 파악하여 천동설의 모순을 발견해냈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에 후원자 메디치 가문의 이름(코시모,프란체스코, 카를로, 로렌초)을 붙여서 '메디치의 별'이라고 불렀다. 메디치 가문은 그 보답으로 갈릴레오에게 토스카나의 수학-철학 담당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갈릴레오 인생의 최전성기였다.
 
갈릴레오와 종교계의 지속적인 대립은 '태양의 흑점'을 둘러싼 공방에서 절정에 달한다. 갈릴레오는 태양의 흑점이 태양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양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인식했던 종교계와 아리스토파 학자들은 흑점이 태양의 흠이 아닌 근처 천체들의 그림자라고 믿었기에 갈릴레오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특히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를 맹신하던 예수회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8년간의 심문 끝에 화형시켰을만큼 종교계에서도 강경파로 갈릴레오를 적대했다.
 
갈릴레오는 지인과 '성경과 과학간의 관계'를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여기서 "성경에는 원래의 의미에 관하여 많은 거짓된 서술이 있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신학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을 과학에서 더 대단하게 다룰수 있다는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가뜩이나 갈릴레오를 벼르던 종교계는 크게 분노했다. 갈릴레오도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편지의 원본 문구들을 일부 수정하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원본이 널리 퍼진 뒤였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지동설의 주장을 버리지않으면 감옥에 갈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 갈릴레오는 압박에 굴복하여 결국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믿거나 풀이하지않겠다'는 강제서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교회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브루노의 죽음을 지켜본 갈릴레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는듯 하던 갈릴레오는 1633년에는 두 번째 종교재판에 서게 된다. 갈릴레오의 오랜 벗이자 첫 번째 재판당시 그나마 자신을 보호해준 추기경이었던 우르바노 8세가 교황이 되면서 상황이 호전되자, 갈릴레오는 '대화'라는 책을 출간하여 다시 지동설에 대한 본심을 드러냈다.
 
교황청은 당시 까다로운 검열 끝에 조건부로 출간을 허가했지만, 갈릴레오는 여기서 교황청과의 약속을 깨고 지동설의 주장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극중 대화 방식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사실상 자신의 페르소나로, 천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심플리치오(이탈리아어로 바보)로 묘사하며 지동설을 주장하는 본인의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대화'를 본 예수회와 아리스토파 학자들은 또다시 크게 분노했고 난처했던 우르바노 8세는 결국 갈릴레오를 다시 종교재판에 회부할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는 "나는 신교를 지지하지않으며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맞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종교와 사회의 거듭된 압박을 이기지못한 갈릴레오는 끝내 다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며 이단적이라고 참회할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면했지만 종신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당시 칠순을 바라보던 갈릴레오로서는 거듭된 종교재판 자체로 이미 육체적-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갈릴레오가 재판장을 나서면서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사가들의 의견이다. 진실을 이야기하고도 부당한 탄압을 받아야했던 갈릴레오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던 후대 예술가들의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침묵속에 말년을 보내던 갈릴레오는 1642년 1월,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갈릴레오는 교황청의 탄압으로 사후에도 장례식과 묘비 금지령을 당하며 산타크로체 성당의 작은 구석에 쓸쓸히 묻혀야했다.
 
갈릴레오는 여러 차례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완벽하게 증명을 하기는 어려웠다는게 한계였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갈릴레오의 주장은 결국 사실임이 밝혀졌다. 갈릴레오의 '대화'는 금서에서 해제됬고, 1737년 갈릴레오의 시신은 위인들이 안치된 본관으로 이장됐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의 재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교황청을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른다. 비록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진실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17세기를 거쳐 인류의 과학은 대변혁을 이뤄냈고 그 중심에는 갈릴레오의 이론이 있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있었기에 멀리볼 수 있었다'는 어록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거인들은 케플러, 데카르트, 그리고 갈릴레오로 추정된다.
 
상식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틀을 깰 수 있고 더 많은 진실을 만날 수 있다. 현대과학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언제든 틀릴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어쩌면 갈릴레오의 진실을 향한 고독한 투쟁이, 지금의 우리에게 남겨준 진정한 유산이 아닐까.
벌거벗은세계사 갈릴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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