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누가 16명 소녀들을 방화범으로 만들었나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3.05.05 10:40최종업데이트23.05.05 10:40
원고료로 응원
세상에서 ‘문제아’로 취급 당하며 외면받았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와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오랜 기간 동안 교육과 교화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강압적인 인권유린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 도화선으로까지 이어졌다. 수많은 청춘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마음 한 구석에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이야기>에서는 '새벽 2시의 라이터-사라진 소녀들' 편을 통해 1995년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사건’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조명했다.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에 위치했던 경기여자기술학원은 당시 가출청소년이나 고아 등을 수용하고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일반인 수용 시설로, 경기도청 산하에 배속되어 운영되는 기관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출청소년 단속반, 청소년 선도위원회 등의 기구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길거리에서 불량학생이나 가출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당사자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잡아서 끌고오는 경우도 많았다.
 
기술학원에는 가출을 하거나 사고를 쳐서 온 아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들어온 아이들도 있었다. 1995년 당시 학원의 원생 숫자는 138명에 이르렀고 이 중 대부분은 10대 이하의 미성년자였고, 가장 최연소인 13세 이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여자기술학원에는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원생들은 쇠창살과 둘러싸인 감옥같은 시설 내에서 자유 없이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수시로 폭언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원생이었던 제보자 최주영씨는 한 원생이 친구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직원에게 가혹한 욕설과 구타를 당했던 일화를 폭로하면서 “그냥 우리를 쓰레기로 생각하는구나라고 느꼈다"고 전했다.
 
당시 경기여자기술학원의 운영 규칙을 살펴보면 ’정신교육에 의한 인간재생‘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구성원들은 존중받아야 할 인권의 대상이 아닌, 뜯어고치고 개조해야 할 불량품같은 존재로 바라본 것이다. 더구나 경기도로부터 위탁받아 실제로 학원을 운영한 것은 놀랍게도 기독교 종교재단이었다. 원생들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도 무시당한 채 강제로 기술과 상관도 없는 성경공부를 해야했다.
 
명색히 기술학원임에도 수업의 질 역시 형편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대였음에도 양재, 자수같은 이미 시대에 뒤처지고 실용성도 없는 과목만 있었고, 원생들이 원했던 미술, 글쓰기, 디자인, 컴퓨터 등과 관련된 컨텐츠는 아예 전무했다. TV 시청이나 간식같은 또래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자유는 모두 금지됐다. 원생들은 기본 입소기간만 10개월에 이르렀고, 규칙을 어기면 최대 2개월까지 체류기간이 연장되며 철저히 세상과 단절된 채 지옥같은 일상을 견뎌내야했다.
 
1995년 8월 21일 새벽 2시, 경기여자기술학원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학원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인해 다수의 원생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
 
놀랍게도 화재의 원인은 방화였고, 범인은 바로 원생들이었다. 지속적인 인권유린에 견디다 못한 일부 원생들이 학원을 탈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방화를 저지른 것. 이 사건으로 무려 37명의 원생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17명의 방화범 중 13세 막내를 제외하고 16명이 구속됐다. 당시 여론은 '철없는 비행소녀들을 모아놨더니 사고가 터졌다'는 데 초점이 맞춰지며 원생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방화를 저지른 원생들을 처음 접견한 인권변호사 김칠준씨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김 변호사는 “아이들이 모두 엉엉 울면서, ’변호사 아저씨, 내가 내 친구를 죽인 게 맞나요? 저희 때문에 죽은 게 맞나요?’라고 첫 질문을 했다. 자신들이 어떤 처벌을 받는 것보다 친구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울었던 거다. 그게 제일 가슴아팠다”고 회상했다.
 
구속된 방화범은 모두 1층 원생들이었다. 하지만 1층 원생들은 전원 구조된 반면, 사상자는 모두 2층에 몰렸다. 무엇이 1, 2층의 운명을 가른 것일까.
 
화재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원생들은 학원 측의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다. 방화를 모의한 원생들의 당초 생각은 “불이 나면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 틈에 이 지옥같은 곳을 빠져나가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밖에서 연기가 보일 정도로만 작게 불을 내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불이 난 후에도 건물에 울려퍼진 것은 원생들의 비명소리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화재 경보도 소화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전기가 나가며 아이들은 어둠 속에 고립됐다. 다급해진 아이들은 출입구로 달려갔지만 앞뒷문은 각각 돌로 쳐도 깨지지 않는 강화유리와 철문으로 막힌 상태였다.
 
뒤늦게 나타난 한 남성이 문을 열어주며 1층 원생들이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2층에 있던 60여 명의 원생들은 여전히 갇혀있는 상태였다. 문이 열리지 않자 2층 아이들은 다급한 마음에 출입문 옆 화장실로 대피했다. 당시 좁은 화장실 공간에 수많은 원생들이 몰리며 뒤엉켜서 아비규환을 이뤘고 다수가 그대로 연기에 질식해갔다.
 
새벽 2시 40분에야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가 도착하여 쇠창살을 뜯어내고 아이들을 구조했지만 안타깝게도 다수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퇴소를 앞둔 고 양승실씨(당시 16세)같은 안타까운 희생자도 있었다.
 
1층 생존자들은 화재 당시 직원이 열쇠꾸러미를 들고 2층에 먼저 올라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사고 당시 사상자 중 기술학원의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오직 아이들만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당 직원은 화재가 나자 2층의 문을 개방하고 내려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져 화장실에 몰려있던 아이들은 문이 잠깐 개방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2층 사감이 빠져나간 직후 문이 다시 잠긴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수사에도 2층의 문이 다시 잠긴 이유에 대해서는 고의인지 우연인지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충격적이고 슬픈 뒷이야기가 드러났다. 사고 당시 1층에서 탈출한 원생들은 몽둥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청원 경찰들과 마주쳐야했다. 청원 경찰들은 아이들을 구조하는 것보다 밖으로 탈출하지 못호도록 통제하는 것만 신경썼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른들은 이미 ‘체포된 방화범’이었던 원생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다. 왜 원생들이 이렇게 무모하게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시설의 존재 이유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은 드러나지 않았다. 김칠준 변호사는 “기술학원 사람들이 인명피해 구조보다는 탈출을 막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사고가 커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사건이 유야무야 됐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방화로 인해 기술학원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학원 관계자들은 쇠창살을 설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과격한 아이들이 있어 통제가 필요했다고 변명했고, 살려달라는 소리를 못들었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 관계자들은 “이 아이들을 10개월간 착실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권유린을 했다고? 아니다. 우리 전 직원들은 정말로 동생같이 친자식같이 사랑으로 소녀들을 대했다”고 주장했다.
 
기술학원은 본래 성매매 윤락여성을 수용하는 부녀보호소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요보호 여성’으로 분류되여 정부의 집중적인 관리대상이 됐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성매매 단속이 어려워지고 음성화되면서 잡아올 수 있는 대상자가 줄어들었고, 그 빈 자리를 메꾼 것이 바로 사회에서 문제아로 분류된 가출 청소년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학원에 입소해있던 원생 138명 중 성매매 혐의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관리책임이 있는 경기도청의 담당 공무원들은 원생들을 가리켜 “타락할대로 타락한 망나니같은 아이들”로 규정하며 망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들의 눈에는 방황하고 가출한 아이들은 잠재적인 윤락여성으로 취급했다.

참사 직후 학원 시설은 폐쇄됐다. 방화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된 아이들은 친구를 죽인 죄책감에 눈물을 쏟았다. 세상의 비난과 책임은 모두 아이들에게 쏠렸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던 16명의 아이들을 위해 유일하게 나서준 것은 김칠준 변호사였다.
 
그는 법정에서는 “피고인들은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자녀들일 뿐이다. 단지 공부를 못해서, 가정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것만으로 특별한 아이들이라 재단할 수 없다”고 변호했다.
 
이어 “정부는 말로만 대책을 세우며 이들을 격리시켰다. 가족과 사회도 당연한 이들의 인권을 무시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겼다. 수용시설에 맡겼다는 것만으로 부모 일을 다했다는 부모들의 책임, 주입식 교육을 강요한 경기기술학원의 책임, 대형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도 별다른 책임이 없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고 일갈하며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와 어른들의 오류를 함께 평가하는 재판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학원장과 직원들은 징역 1~2년에서 집행유예 3년 내외의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방화범이 된 16인 소녀들은 형사처벌 대신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됐다.
 
화재사고로 2층에 있던 절친 금선씨를 잃었다는 선옥씨는 30대까지만 되어도 8월 21일만 되면 친구를 위해 남몰래 홀로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선옥씨는 제작진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 생에도 절 용서한다면 다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냐고, 많이 그립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는 절절한 마음을 전했다.
 
28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당시의 원생들은 대부분 조용히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날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 생존자들은 지금도 그날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1층 생존자 최주영(가명)씨는 “죽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살아서 욕먹어도 되지만 그 아이들은 명예회복이 되어야한다. 희생자들은 문제아들이 아니었다. 모두 착한 아이들었다"고 회상했다. 곽현주(가명)씨는 “우리가 힘들다고 할 때 어른들이 우리한테 조금만 귀를 기울여줬으면, 야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줬다면” 그토록 끔찍한 비극은 피 할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워했다. 신화정(가명)씨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렸던 생존자 원생들이 “이제 조금은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문제아로 불렸던 아이들은 정말 모두 어른들의 편견처럼 구제하기 힘든 사회악이었을까. 어쩌면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줬어야 할 어른들의 책임은 아니었을까. 한번의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전에 아이들의 말을 한번만이라도 이해해달라는 호소를 누군가 들어줬더라면 안타까운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꼬꼬무 경기기술학원화재 일반인수용시설 인권유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