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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무게 앞에서 독립적이었던 다섯 여성 이야기

[리뷰] 다큐 <돌들이 말할 때까지>

23.06.16 14:27최종업데이트23.06.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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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생물이 돌이 되는 순간이 있다. 너무 말이 안 되어 한순간 얼어붙어 굳어 버리는 것. 생물학적으로 경직된 순간을 넘어 정신세계마저 송두리째 붕괴시키고 사랑이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있는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다. 
 

▲ <돌들이 말할 때까지> 돌과 할머니는 지난 70여 년을 그렇게 버텨내고 있다. 격동의 현대역사의 진실이 언제쯤이면 상처를 통한 타인의 공감를 넘어 포개어져 진정한 대화로 진영과 이념을 넘어, 우리민족의 상생과 번영,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존엄'의 가치까지 함께 말할 수 있을까. ⓒ 디아스포라영화제 사무국

 
성선설을 믿고픈 사람에게 자연은 인간이 꿈꾸는, 닮고 싶은 세계다. 순수성과 유연함에서 오는 부드러움을, 때론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연은 인간이 될 수 있어도 인간은 그동안 자연이 되지 못했다. 날 것의 자연계에서 뛰쳐나와 인간계를 만들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추잡한 이념은 약탈의 야만성을 넘어 학살이라는 비인간성으로 표출됐다. 

블랙 스크린 공간에 띄워진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위령비의 문구 '그 크나큰 슬픔의 권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르게 다스려 주소서'는 무지와 무능의 육지 것에 불과한 영원한 타자 '나'를 다시 침묵시킨다.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양농옥·박순석·박춘옥·김묘생·송순희 다섯 할머니 이야기로 4.3의 크나큰 슬픔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한다. 동굴 안에서 밖을 향하는 한 컷의 이미지만으로 어둡고 은밀한 곳에 숨겨진 그들의 깊은 상처는 물론 그 상처가 개인을 넘어 인류를 향한 밝은 빛으로 발화되기를 바라는 희망까지 담았다. 

이어지는 장면은 파도가 치는 바닷가 해변, 여기저기 놓인 돌덩이. 돌은 견뎌내고 있다. 거대한 바다를 내달리다 해안가 육지에 이르러 어느새 새하얀 물살의 파편들로 사라져 가는 자연의 바다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삭히고 깎인 표면이 인간의 DNA가 되어 역사로 남기를 바라듯, 절대 잊을 수 없는 진실의 목격자로서 돌들은 파도와 거센 바람 앞에 요동치며 울부짖는다. 

1948년 당시 스무 살 내외였던 다섯 할머니는 4.3 참상의 진실을 이끌어 내준 수형인명부와 연결된다. 왜 그들이 군사재판을 받고 좁은 형무소에 갇혀야 했는지, 그것이 과연 합당한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슬픈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게 됐다.

김 감독은 7년 7개월간 벌어진 4.3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이 아닌 5인의 여성이 감당해 낸 개인적인 삶에 집중한다. 이때 증언하는 할머니뿐 아니라 제주 4.3 도민연대의 수형인 면접조사원과 그들의 질문도 비중 있게 다룬다. 증언의 내용에 더해 증언을 담는 역사 기록 과정의 어려움과 가치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감당하기 힘든 역사의 무게 앞에서도 독립적이었던 다섯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은 4.3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 <돌들이 말할 때까지> 박순석 할머니는 남로당에 가입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그것이 대대적인 토벌의 명분이 되고 빌미로 역사의 변역자라는 가혹한 공격에도, 산에서 제주 공동체의 삶을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것마저도 역사에 남겨주기를 바라며 당당하게 역사의 진실을 알렸다. ⓒ 디아스포라 영화제 사무국

 
남로당에 가입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박순석 할머니는 반역자적 죄인이라는 남로당을 향한 부정적 시각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그녀는 3년 형을 구형한 군사재판 과정의 얼토당토않음을 토로하며 그로 인해 고통 받은 지난 삶의 억울함을 얘기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역사에 남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발언을 통해 군 병력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의 명분을 줬던 산에서의 행동이 제주 공동체의 삶을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 당연한 선택이었음을 선명히 아로새긴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양농옥 할머니, '나를 왜 죽이려 하느냐'고 당당히 외치며 군인한테 항의했던 김묘생 할머니, 중산간에 숨어 지냈던 박춘옥 할머니, 그리고 자식을 형무소에서 잃고 뒤늦게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지만 이미 주변인의 권유로 재가해 살았던 송순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가혹하다 못해 뼛속까지 아리게 한다. 특히 송 할머니의 딸이 인터뷰에 담기면서 4.3이 그들 가족과 제주지역에 국한된 아픔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2019년 1월, 제주지방법원이 공소기각 판결을 통해 18명의 4.3 생존수형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장면도 고스란히 담았다. 당시의 군사재판이 적절한 변론의 기회와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은 총체적 불법이었음을 70년이 넘어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는 이를 담담하게 처리했는데 어쩌면 남아있는 역사의 무게가 더 크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해방이 또 다른 고통인 된 무정부 시대, 즉,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 해방의 뒤틀림이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주독립'과 '통일'의 혼백을 이은 제주도민의 선택을 이야기하며 숙제를 던진다.  
 

▲ 돌들이 말할때까지 김경만 감독은 자연영상을 통해 인간이 된 자연을 마주한 듯 경이롭고 제주4.3의 참상으로 벼랑 끝, 붕괴되기 전의 인간을 포근히 감싸주며 위로한다. ⓒ 디아스포라 영화제 사무국

 
특히 영화는 증언하는 할머니와 분노하는 관객들의 감정까지도 눈보라와 눈 쌓인 나뭇가지, 심지어 폭죽의 불꽃 등에 담아내며 영상미로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이는 인간이 된 자연을 마주한 듯 경이롭고 벼랑 끝에서 붕괴되기 전 '나'의 혼란한 침묵을 포근히 감싼다.

어느새 정적 속 눈 쌓인 산등성이 장면에 이은 눈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돌이 스크린을 채우면서 비로소 5인의 할머니가 돌이 되어 말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파도와 바람의 기억까지 품은 다섯 할머니의 영성이 '나'를 위로한다. 인간은 존엄 그 자체다.
 

▲ 김경만 감독과 함께 영화상영 후 우연히 행사장 내 즉석사진을 찍는데서 마주쳤을 때 흥쾌히 응해주셨던 제11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기록으로 남게 된 흑백사진 한장 ⓒ 임효준

 
덧붙이는 글 제11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비평워크숍에서 활동한 비평문집에 실릴 예정입니다.
돌들이 말할때까지 제11회 디아스포라영화제 김경만 감독 비평워크숍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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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본질적 시각 및 인간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옳고 그름을 좋고 싫음을 진검승부 펼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살아있다는 증거가, 단 한순간의 아쉬움도 없게 그것이 나만의 존재방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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