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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이 일본 경찰에 '황태자 암살' 계획 말한 까닭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3.08.31 15:49최종업데이트23.08.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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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2023년 9월 1일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현재 일본에서 이날은 그저 '방재의 날'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100년 전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비극적인 '관동 대학살'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날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 선생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여사는 모두가 침묵하던 그 시대, 일본의 심장부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잊혀질 뻔한 그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용감하게 투쟁했던 인물이다.
 
8월 30일 방송된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71회에서는 '독립운동가 박열은 왜 사형선고를 받고 기뻐했나'편을 통하여 '불꽃같은 커플' 박열과 후미코 부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열혈 소년 박열

박열은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의 가난한 농가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박열은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본명은 박준식이었으나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 바로 박열이다. 놀랍게도 박열은 부모가 지어준 호적상의 이름을 거부하고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정한 것이 불과 8살의 어린 나이였다. 한자로 열(烈)은 '맵다', '세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결심한 것은 이루고야 말겠다는 포부가 담겨있다. 이름처럼 실제로도 박열은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열혈 소년이었다고 한다.
 
1912년, 10살이 된 박열은 신식(근대식) 교육을 받기 위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던 함창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한다. 당시는 한일강제병합 이후라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무조건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박열은 일본인들의 개화된 모습을 보고 오히려 서구식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구열과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편견없는 열린 시선을 가지고 있던 박열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박열의 기대와 달리, 정작 학교 내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 여기서 박열은 강국이 약국을 멸시하는 모습과 일본식 근대교육에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1916년, 박열이 학교 내에서 믿고 따르던 조선인 교사는 학생들에게 "나를 용서해라. 나는 일본이 조선을 하나로 묶어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쳤다. 조선은 일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라"(1924년, 박열의 신문조서)는 폭탄 선언을 했다고 한다. 박열은 존경하던 스승의 양심고백에 큰 충격을 받으며 인생과 가치관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박열은 14세가 되어 교사를 꿈꾸며 고향 문경을 떠나 조선 제일의 명문학교인 경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한다. 하지만 17세였던 1919년 3월 1일, 학생들을 주도하여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박열은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고향 문경으로 도피했던 박열은 3.1 운동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는 소식에 분노했으며, 조선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다.
 
박열은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겠다는 것, 그것도 조선에서가 아닌 일본의 심장부로 들어가 호랑이굴에서 활동하겠다는 결심이었다. 1919년 10월 박열은 혈혈단신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박열은 일본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여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잊지 않았다. 일본에 간 지 2년 만에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Anarchist)들의 모임인 '흑도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다. 흑도회는 권력의 상하관계가 아닌 평등을 주장하는 단체를 표방했고, 조선인만이 아니라 사상이 같은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더였던 박열의 목표는 조선을 차별하는 일본의 권력자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차별에 대한 문제인식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왔던 박열로서는 당시 유행하던 아나키즘에 개인적 경험이 맞물리며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열은 "나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권력자 계급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까지 멸망시키고자 생각했던 것이다(신문조서 1924년 2월 3일)"라고 할 만큼 과격한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박열은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과 연계해 일본 내에서 의거를 기획하며 항일의지를 다졌다. 또한 동지들과 함께 단체의 이름을 딴 흑도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아나키스트로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사회제도와 식민통치의 모순을 글로서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박열의 글 중에서도 충격적 제목과 내용으로 유명한 시 '개새끼'는 바로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로 시작되는 거칠고 자극적인 문장들의 이면에는, 비루한 취급을 받지만 궁지에 몰리면 상대를 물 수도 있는 개처럼 '권력이 아무리 나(조선인)를 짓밟아도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박열의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다.
 
법정에 서게 된 박열이 요구한 것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1922년 박열은 일본에서 운명적인 인연을 만난다. 바로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가 되는 1살 연하의 가네코 후미코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어묵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던 후미코는 어린 시절 조선에 거주하면서 3·1 운동을 목격했고 하나된 조선인들이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결정적으로 후미코 역시 박열과 같은 사상을 지닌 아나키스트이자 열정적인 행동파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개새끼'를 읽고 거침없이 할말은 하는 박열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본인이 먼저 박열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박열과 후미코는 동거를 시작했으며 항일독립운동을 함께하는 동지로도 함께 활동하게 됐다.
 
후미코는 박열의 성을 따르고 본인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호명한 '박문자'로 개명했다. 훗날 그녀는 "조선에 박열같은 투사가 30명만 있다면 조선 독립은 당장 이룰 뿐 아니라 조선 민족은 정말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증언할 만큼 박열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박열은 일본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자 집단 사망사건에 대한 항의시위, 일본 내 친일파에 대한 테러 혐의와 일본 경찰 폭행 시위 등에 앞장서며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일제의 표적이 된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은 박열은, 이번에는 당시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식을 노린 폭탄 의거를 계획한다. 황태자의 결혼식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이다.
 
박열이 일본으로 폭탄 반입을 시도하며 의거를 준비하던 1923년 9월 1일,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다. 바로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불리우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며 도쿄와 관동일대가 초토화된 것.
 
그리고이 사건은 박열과 조선인들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폭도가 되어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 일본 정부와 경찰은 지진과 경제불황으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조선인을 적으로 내세워 책임을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
 
분노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하며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곳곳에서 재일 조선인들을 만나면 무차별 학살했다. 자경단은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일본인이 아니면 정확하게 발음하기 힘든 '쥬고엔(15엔)', '고쥬센(50전)을 발음하게 한 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즉결처형을 단행했다. 일본 정부와 경찰은 이를 막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단행하지 않았다.
 
백주대낮에 자경단에 살해 당한 조선인의 시체가 강물을 가득 메울 정도였고, 심지어 만삭의 여성을 태아와 함께 살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이 당시 공식적으로 확인된 조선인 사망자의 숫자만 6661명에 이르며,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1만 5000여 명 이상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박열은 자경단의 화는 다행히 피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박열이 주거지가 불확실하고 제대로 된 직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체포했고, 아내 후미코도 같이 끌려갔다. 이대로는 어차피 자신에게 누명이 씌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박열은, 상황을 역이용해서 일제와의 정면승부를 선택한다. 정작 시도도 하지 못 했던 '황태자 암살'을 자신이 기획했다고 먼저 깜짝 자백을 했던 것. 박열의 폭탄선언으로 이제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일본의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 대역죄인으로 '급'이 달라진 상황이 됐다.
 
박열과 후미코 부부는 황태자 암살 혐의로 나란히 일본의 법정에 서게 된다. 박열은 여기서 재판에 서는 조건으로, '조선의 예복을 입게 해줄 것', '법정에 서는 취지를 본인이 선언하겠다는 것', '조선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통역을 준비해줄 것', '자신은 죄인이 아니니 재판관이 앉는 좌석과 눈높이를 동등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한다. 얼핏보면 그저 기행처럼 보이지만 비굴하게 권력에 타협하는 대신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겠다는 박열의 의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일본은 고심 끝에 앞의 두 가지 요구만 수용해주기로 결정한다.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이제훈)이 조선의 관복을 입고 느긋한 표정으로 법정에 등장하던 그 유명한 장면은 놀랍게도 영화적 상상이 아닌, 바로 실화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관동대학살로 인한 부정적인 국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역죄인으로 체포된 박열의 요구도 기꺼이 수용하는 모양새로 '민주적인 재판을 하는 문명국가'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박열은 마지막 재판을 몇 달 앞두고 후미코와 함께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한 기념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만 해도 남녀의 기념사진은 한 사람이 앉고 한 사람이 옆에 서서 찍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조사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도 평범함을 거부했다. 함께 의자에 앉아 서로의 몸에 바짝 밀착하여 후미코는 박열에게 등을 기대고 책을 보고있으며, 박열은 후미코의 어깨에 편안하게 손을 올리고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포즈를 취했다. 지금 봐도 마치 현대의 커플 화보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미 중범죄자로 분류되어 사형이 유력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은 커녕 도발적이면서도 편안해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죽음마저도 초월해버린 초연함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것은 기행도 관종도 아닌, 세상에 맞서 싸우는 그들 나름의 투쟁 방식이었을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의 옥중 결혼식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최후공판을 앞둔 1925년 12월, 박열과 후미코는 옥중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 뒤에는 혼인신고서까지 제출하며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결혼식을 제안한 사람은 놀랍게도 두 사람의 예심을 맡았던 일본 판사라고 한다. 일본은 박열의 죄를 어떻게든 입증하기 위하여 최대한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1926년 2월 26일, 역사적인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시작되자 박열의 눈빛이 돌연 달라졌다. 박열은 변론이 시작되자 "천황이란 자는 강도단의 두목이다"라며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당황한 재판정은 황급히 재판을 중지시키고 방청객들을 모두 퇴장시켰다. 이후 모든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했다. 하지만 박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너희가 문명국이라 자부한다면 관동대학살에 가담한 군인과 자경단의 자백을 받아내라"고 요구했다.
 
그해 3월, 최후의 재판에서 일본 재판부는 박열과 후미코에게 결국 사형을 선고했다. 박열은 오히려 재판 결과에 기뻐하면서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나는 영원한 승리자다"라고 선언하며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박열은 "육체는 죽어 사라질지라도 이름을 남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후미코 역시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우리들의 백골이라도 같이 묻어주길 바란다"며 남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사형선고가 내려진지 얼마되지 않아 두 사람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일본 천황이 두 사람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준 것이다. 국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 재판부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두 사람을 감형해주면서 일본 제국과 천황의 위신을 세우려고 했던 것.
 
또한 일본 언론은 사형판결에도 의연했던 박열 부부가 목숨을 살려준 천황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거짓 뉴스를 보도하며 두 사람을 비굴한 이미지로 깎아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박열 부부는 감형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고, 심지어 후미코는 천황이 보냈다는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열과 후미코는 각각 다른 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런데 불과 3개월 후 후미코가 옥중에서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의심스러운 정황은 많았지만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충격과 비통에 빠진 박열은 식음을 전폐했고, 형무소의 간수들은 박열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그렇게 박열은 죽음보다 괴로운 삶을 강제로 살아가야만 했다. 이후로도 박열은 일제로부터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나갔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박열도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박열은 무려 22년 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광복후 많은 독립운동가가 풀려났지만 일제는 박열만큼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두 달 넘게 수많은 사람들의 청원이 이어진 끝에 21세에 수감되었던 박열은 43세의 중년이 되어서야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형무소 앞에는 박열을 보기 위하여 무려 1만 5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그의 석방을 환영했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1930~1940년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압박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전향한 사례도 많았다. 박열만큼 시종일관 영웅적이고 당당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전향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온 인물은 없었다. 한국인들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견뎌온 박열을 잊지 않고 '민족의 영웅'으로 예우한 것이다.
 
박열은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백범 김구 등과 함께 건국 준비를 도왔고, 해외에서 운명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아와 고국에 안장시키는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열의 운명은 끝까지 평탄하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을 납치하며 체제선전의 도구로 이용했다. 결국 박열은 북한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974년 1월 17일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가로서 박열과 후미코 부부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 훈장을 추서한다. 재판정에 나란히 서서 일제와 맞서 싸운 두 사람의 투쟁이 뒤늦게나마자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후미코의 묘소는 박열의 고향이기도 한 경북 문경에 위치해있다.
 
박열은 누구보다 뜨겁게 민족을 위하여 싸운 투사였지만 동시에 이념과 분단이 만든 희생양이기도 했다. 무정부주의자이고 납북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많은 문헌과 기록에서 소외 당하며 정당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이념의 잣대를 넘어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는지 삶의 행적에서 나오는 진정성에 있을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박열 가네코후미코 독립운동가 관동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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