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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도전 '결혼'에 대하여

[개봉영화 뜸 들이기] 영화 <잠>

23.09.23 09:32최종업데이트23.09.2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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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애기중지하는 좌우명 현판.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세계적인 감독이 "이 영화는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영화이며, 스마트한 데뷔작"이라고 극찬한다면 그 평가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빙의' '몽유병' 등 호기심 자극하는 키워드에 혹하기도 하고, 봉준호 감독의 호평이 과연 맞는지 확인차,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 

지난 9월 6일 개봉한 스릴러 영화 <잠>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조연출 출신인 윤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남편의 갑작스러운 몽유병 발병으로 위기를 겪게 된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그렸다. 무방비 상태로 타인과 한 집에 사는 '결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도박일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잠>이 스마트한 영화라는 평가는 맞다'라고 생각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x 값에 따라 y 값이 달라지는, 무엇으로 해석해도 맞는 답을 얻는 함수 상자(function box) 같다고 할까? 거대한 함수 상자가 코를 골고 있는 느낌을 주는 '시'같은 영화였다. 수많은 관람객들의 머릿속에 수많은 미지수 x가 존재하고 수많은 정답이 나올 것이다.  
 

무엇이든 둘이 함께 하는 의논하는 부부.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결혼'에 대한 막연한 공포 메타포

​"누가 들어왔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내 집, 내 침실을 공유하는 배우자 현수(이선균)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날 이후, 아침이 되면 수진(정유미)은 밤사이 남편이 저질러놓은 기행의 결과를 거듭 마주해야 했다. 검사 결과는 램 수면 장애, 몽유병. 만삭의 수진은 자신은 물론, 곧 태어날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남편을 완치시켜야 했다.  

그러나 수진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약을 먹고, 행동을 수정해도 현수의 증상은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되고 급기야 현수는 수진의 반려견에까지 손을 대고야 만다. 이쯤 되면 무서워서라도 당분간 따로 지내볼 만도 하겠는데,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나무 현판처럼 수진의 입장에는 양보가 없다. 집을 나가려는 현수에게 이 묵직한 현판을 집어던질 정도로, 남편이란 존재는 수진과 함께여야만 한다.  
 

무속인은 현수의 증상을 빙의로 단정한다.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병인가 신병인가

현수의 증상이 몽유병인지 빙의인지, 감독은 그 어느 쪽도 명확히 선을 긋지 않는 듯 보인다. 증상이나 검사 결과로는 '몽유병'이나, 수진의 엄마가 부른 무속인은 이를 '빙의'라고 단정 짓는다. 영문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부적을 맹신하게 된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내 집을, 꿈에서도 보기 어려운 팬시(fancy) 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현수는 처방약을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진은 다른 싸움을 하고 있다. 팩트들을 쌓아 올리며 논리적인 방법으로 사건의 전말을 유추해나가며 ppt 브리핑까지 하는 이성적인 수진이지만,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도 황당하여 누가 환자이고 누가 보호자인지 경계를 알 수가 없다.  
 

현수는 의사에게 몽유병 처방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한다.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미지수 x '그릇'

영화 <잠>이라는 함수 상자가 나와 만나 도출된 미지수 x는 '그릇'이다. 사람을 표현할 때도 쓰이는 '그릇'이라는 개념은 주로 '그릇이 크다' '그릇이 작다'로 내면의 도량을 표현할 때 쓰인다. 혹은 반쯤 담긴 물 잔을 보고 물이 '반이나 남았네' '반 밖에 안 남았네'로 사람의 관점이 부정적이나 긍정적이냐를 표현하기도 한다. 

<잠>에서의 그릇은 자아정체성을 담는 그릇으로, '빙의 현상'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빙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내 몸에 실리는 현상으로, 빙의된 자의 '자아의 크기'가 빙의를 뺄 때 성공을 좌우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제의를 실행하는 것은 집전자이나, 실제로 빙의된 자의 숨어 있는 자아를 깨워주고 힘을 실어주어서, 빙의된 자가 의지로 장악을 탈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현수의 꿈을 응원하는 수진.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빈 그릇이 되어버린 순간

한때 연극 판에서 촉망받던 연기자였던 현수는 이제 드라마의 단역배우도 너무도 소중할 정도로 막막하다. 그동안 청년 현수의 내면을 열정과 기쁨, 미래의 꿈으로 꽉 채워주던 '연기자'라는 그릇은 이제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단역배우의 현실에서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열정을 비워낸 빈 그릇에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이라는 생계의 꿈을,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의 열정을 담았는데, 수진이 다시 비운다. 대배우가 되라고.

그날 밤 현수는 자다가 깨서 '누가 들어왔다'라고 말하고 다시 잠든다. 몽유병의 시작인지, 빙의의 시작인지, 굳이 선택하라면 몽유병으로 보인다. 스트레스로 인한 성인 몽유병의 발현인지 유아기의 병력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잠>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인 현수의 행동으로 유추하면, 몽유병에 가깝다. 오히려 빙의는 다른 데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현수의 꿈을 응원하는 수진. 영화 <잠> ⓒ 롯데엔터테인먼트

 

결혼은 서로의 그릇을 채워주는 것 

인생의 이정표가 한순간 사라지는 위기를 맞은 현수처럼,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남편으로부터 아기를 지키고 남편도 붙드는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며 자기효능감의 위기를 맞게 된 수진처럼, 인생의 새로운 문지방을 넘어서야 하는 순간, 기존의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그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자아를 놓치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수진의 경우,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부재 경험 때문인지, 수진이 애지중지하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나무 현판은 수진에게 있어 '남편 부재'를 막고, 아이에게 '아버지 부재'를 막는 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배려의 차원이며 모성의 발현이었겠지만, 가장의 책임을 수행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읽어주었다면, 혹은 치료를 위해 남편의 부재를 허락했더라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도전 '결혼'에 대해 영상으로 쓴 상징시, 영화 <잠>을 적극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도서출판 참서림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이선균 정유미 유재선 몽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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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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