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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과학국가였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

[김성호의 씨네만세 605] <천문: 하늘에 묻는다>

23.12.10 10:25최종업데이트23.12.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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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사 자격을 얻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간 일이 있었다. 부산의 국립기관에서 몇 달간의 연수를 받고, 다시 실습선에 올라 근해를 항해한 뒤의 일이었다. 자동차운반선을 타고 나간 그 먼 바닷길에서 나는 말라카와 수에즈, 지중해와 지브롤터, 도버 등을 지났고, 때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비스케이만을 거쳐 북해에 이르렀다. 오십 개가 훌쩍 넘는 항구에 들러 각 나라의 고유한 풍경과 문화를 만나기도 했다.
 
배를 타기 위하여, 다시 배 위에서 보낸 짧지 않은 시간은 내게 많은 것을 달리 보도록 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선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법이었다. 사방이 바다인 망망대해에서 항해사는 제 위치를 찾는 자였다. 제 위치를 아는 것으로부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정해야 했다. 길을 찾는 자라는 뜻의 네비게이터(Navigator)가 항해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은 바로 이러한 연유다.
 
그렇다면 항해사는 무엇으로 길을 잡아 가는가. 지금에야 수없이 많은 위성과 계약을 하여 GPS 좌표로써 위치를 안다. 우리는 이를 전파항해라 하는데, 항해사가 전파항해만 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항해사는 다시 지문항해와 천문항해의 두 가지 방식을 배우게 된다. 지상과 해상의 물표를 바탕으로 길을 찾는 방법이 곧 지문항해이고, 천구의 존재로써 나를 바라보는 법을 아는 것이 천문항해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무심코 지나치는 천측과 과학의 가치
 
주간에는 태양으로, 야간에는 북극성을 비롯한 별자리로 항해사들은 위치를 낸다. 천체의 위치를 기록한 천측력을 바탕으로, 기준이 되는 천체의 위치와 측정하는 시각을 넣어 계산하면 배의 위치가 나오게 된다. 특정한 시각마다 관측하는 장소에 따라 천체는 특정한 위치에 있게 마련이니, 천측력과 시각을 알면 위치를 구할 수 있고 반대로 천측력과 위치를 알아도 시각을 구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천측의 기본적인 원리다.
 
얼마 전 친구들에게 떠 있는 태양의 위치와 시간을 보고서 동서남북 방위를 가리켜보라 하였더니 태반이 모른다고 하였다. 한 때는 상식이었을 지식이 어느덧 아는 이 별로 없는 먼지 덮인 무엇이 되었으나, 이를 모르고서 과학이며 학문을 안다고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오늘의 인간은 저의 무식을 당당히 여기는 뻔뻔함만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천측과 과학의 가치를 알리는 작품이다. 세계 역사 가운데 변방으로만 여겨져 왔던 한반도에도 자랑스러운 업적이 적지 않음을 알게 하는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15세기 조선 세종 치세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세종 이도(한석규 분)와 그가 등용한 천민 출신 과학자 장영실(최민식 분)로, 이들이 천측을 통해 꿈에 다가서는 과정을 다룬다. 왕과 관료가 함께 품은 꿈이란 백성을 이롭게 하고 조선의 주체성을 세우는 것이다.
 
조선의 주체성 수립과 안민에 천측이 무슨 효과가 있는가. 영화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명나라에서 들여온 것을 본따 간의를 비롯한 천측장비를 제작하고, 그로부터 독자적인 천측력을 만든 세종대의 업적이 어째서 대단한 것인지를 일깨운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조선의 독자적 천측, 무엇을 의미하나
 
영화는 왕의 가마인 안여의 한쪽 바퀴가 부서져서 세종이 죽을 뻔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사건에 배후가 있으리라는 음모로부터 가마를 제작한 장영실이 잡혀 들어간다. 그로부터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은 가마가 부서진 배후의 음모를 짐작케 한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조선이 독자적으로 천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문책했던 것이다. 이에 왕은 간의대를 무너뜨리고 천측장비 일체를 가져다 폐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명의 간섭으로 조선의 천측이 장애와 맞닥뜨린 것이다.
 
생을 걸고 천측에 매달려왔던 장영실은 세종을 알현하여 문제를 고하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영실은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찌 이러할 수 있느냐 고래고래 소리친다. 그로부터 영화는 세종과 장영실의 오랜 인연을, 그들이 함께 걸어온 길을 감성적인 손길로 차근히 펼쳐낸다.
 
다분히 영화적 상상이 개입된 줄거리지만, 중추를 이루는 뼈대만큼은 사실이라 해도 좋겠다. 농사가 산업의 근간인 시대다. 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 달린 것이란 말이 있다. 계절과 기후를 읽어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시기를 알고 재해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금보다 농학과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엔 그 중요성이 지금과 비할 바 없었을 테다.
 
계절과 기후를 읽으려는 노력의 결과가 바로 달력이다. 달력이란 달을 중심으로 한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계산하여 시간의 변천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로소 봄부터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다시 농업에 필요한 스물네 절기가 마련되었다. 앞에 적었듯 계절, 곧 시간의 흐름은 위치와 관측, 또 이를 계산할 학술적 역량이 바탕이 돼야 한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실제 역사와 어우러지는 이 영화의 상상
 
동양 문화권에서 가장 앞서 이러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중국이었고, 그들은 그 중요성을 알아서 천측과 달력 제작을 황제의 권한으로 묶어두었다. 천체를 관측하여 시간과 절기를 정해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천기와 누설이라 칭하였고, 그 권한을 오로지 신의 역할을 대리하는 황제만이 할 수 있다고 못박아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조선을 비롯하여 대월 등 여러 나라는 동지를 즈음하여 명에 사절을 파견했다. 동지사라 불리는 사절단의 주된 역할은 명이 동지 즈음 발간하는 달력인 대통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물네 절기를 알아 농업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당시 사절이 조선에 당도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 쓸모가 없다는 점이 가장 컸다. 또한 달력을 가져와도 북경에서 측정한 천체가 한양과는 차이가 있어 시간에 오차가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세종 대에 이르러 천문에 재주가 있는 이순지와 김담 등의 기용, 독자적인 천측의 확대, 나아가 독자적 천문역법서인 칠정산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시간을 갖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비로소 조선은 조선의 하늘을 갖게 된 것이다. 15세기 중엽 전 세계를 통틀어도 조선과 같이 독자적인 달력을 발행할 수 있는 나라는 명과 오스만제국을 포함하여 채 몇 되지 않았다.
 
영화는 당대의 천문학적 성과, 또 명나라의 견제, 왕과 명에 사대하려는 사대부들 간의 알력 등을 섬세하게 펼쳐낸다. 복잡다단한 정치적 상황을 한 편의 영화 안에 욱여넣으려다보니 장영실을 이례적인 천재 과학자로 둔갑시키고 세종과의 관계 또한 지나치게 미화한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하늘을 올려본 어른들이 있었다는 것
 
또한 이를 극적으로 풀어내기 위하여 역모의 역이용 등 다양한 영화적 장치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영화적 효과를 충실히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비판에도 일부 타당함이 있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감성적인 드라마 연출에 특화된 허진호 감독이 무게감 있는 정통 사극을 연출함에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럼에도 영화는 오늘의 관객에게 무심코 잊기 쉬운 중요한 가르침을 일깨운다. 흔히 관측이 전부라고 여겨지는 천문학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결코 짧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그저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작업이란 점도 이 영화가 내보인다. 여전히 바다 위에서 중히 쓰이는 천측은 주변에 너무나 많은 물표와 네비게이션 등 전자 및 전파기기의 발달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오인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오늘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하여 끝없이 하늘을 들여다보던 어른들이 이 땅 위에 있었다. 내가 선 이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지 않고서 저기 다른 곳을 바라보던 이들 말이다. 다른 것을 제대로 바라본 뒤에야 이곳이 의미를 갖고, 저곳과 이곳의 관계를 통하여서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을 이해하게 된다. 그로부터 지구가 커다란 세계의 일원이란 점과, 이곳 또한 얼마든지 세계의 중심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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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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