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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감독 '몽니' 덕분에 알게 된 소중한 진실

[리뷰] 영화 <파묘>

24.03.03 11:11최종업데이트24.03.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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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주말, 영화 <파묘>를 본 건 순전히 김덕영 감독 때문이다. 최근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건국 전쟁>을 만든 그 감독 맞다. 그는 영화 <파묘>가 흥행하자, 자신의 SNS에 "<건국 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 전쟁>을 덮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며 서슴없이 색깔론을 덧씌웠다. 심지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2019년 발언까지 끌어와, 이를 "<파묘>에 좌파들이 열광하는 이유"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펼쳤다.

그의 막무가내식 '아무말 대잔치'에 측은함마저 든다.
 
취미가 영화 감상일 정도로 웬만한 작품은 다 찾아보는 편이지만, 개인적으로 오컬트 장르만큼은 좀 부담스럽다. 마치 판타지 소설처럼 허황한 내용이라는 선입견 탓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특히 현실이 아닌 가공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포감을 주는 장면이 나올라치면 몇 날 며칠 잔상으로 남아 일상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가 '반일주의' 영화라고 발끈한 근거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까진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파묘하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 삽입되어있는 줄 알았다. 그러잖고선 한 학자의 5년 전의 발언까지 굳이 문제 삼진 않으리라고 여겼다. 느닷없이 이승만의 공과를 재평가하자며 영화까지 내놓은 마당 아닌가.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우리 사회의 참담한 현주소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 ㈜쇼박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혐중'은 방치하면서도 '반일'은 마치 국익에 반하는 행위인 양 몰아세우고 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역대 최악이고, 일본을 향한 저자세 외교는 목불인견 수준이다. 피해자가 극구 거부하는 데다 법원마저 제동을 건 '강제 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은 일제 강점에 대한 우리 정부의 면죄부인 양 느껴지기까지 한다.
 
첩장이 된 왜장의 악귀가 우리를 괴롭힌다는 소재를 '반일주의'로 해석한 걸까. 참고로, 첩장이란 명당자리에 묻힌 다른 사람의 묘 위에 몰래 암장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영화에선 거대한 관을 수직으로 세워 묻은 왜장을, 임진왜란 직후 일본 내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니시 유키나가로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도, <한산>도, <노량>도 죄다 '반일주의'의 범주에 든다. 그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암살>도, <밀정>도, <봉오동>도, <군함도>도, <하얼빈> 같은 작품까지도 '반일주의' 영화로 낙인찍히게 된다. 숫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을 소재로 삼지 말라는 투다.
 
현 정부 들어 상업 영화까지 이념의 잣대로 갈라치는 모습이 일상화됐다. 급기야 '좌파 영화'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반일'은 국익에 반하고, 국익에 반하면 '좌파'라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단순한 발상이다. 결국 '좌파'의 반대말인 '우파'는 '애국'과 동일시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친일'이 '애국'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성립하게 된 셈이다.
 
설마 그럴까 싶어, 더 눈을 크게 뜨고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자손의 잇따른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무당을 찾은 재미교포의 엄청난 부가, 조상이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였기 때문이라는 설정이 눈에 띈다. 이는 증거가 차고도 넘치는 역사적 사실이며, 해방 후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우리 사회의 참담한 현주소다.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에 의해 되레 독립운동가 집안이 '역청산당한' 쓰라린 현대사가 엄연한데, 이를 '반일주의' 운운하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행태다.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망언이다. <건국 전쟁>에서 이승만의 최대 공적으로 삼는 반공주의를 통해 어떻게든 '반일주의'를 '종북'과 엮으려는 의도마저 읽힌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온 산천에 박아두었다는 쇠말뚝 이야기는 딱히 새삼스럽지 않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라고 주장하지만, 국내외 학자에 따라선 이견도 많다. 하여 그걸 두고 '반일주의' 영화라며 눈에 쌍심지를 켰을 리는 없다. 영화에서도 내용 전개의 소품 정도로 다룰 뿐, 비중이 그다지 크지도 않다.
 
고작 이 정도로 대놓고 '반일주의' 영화라고 낙인찍다니, 어째 좀 싱겁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여느 영화는 물론, TV 드라마에서도 흔히 다루는 소재인 데다 오컬트적 요소가 워낙 강렬해 주목해서 보지 않으면 깨닫기조차 쉽지 않다. 그저 관객 대다수는 순간순간 어깨를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 영화로 기억할 성싶다.

장재현 감독의 숨은 의도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 ㈜쇼박스

 
'호화 캐스팅에 한 번은 볼만한 잘 만든 영화' 정도로 여기며 영화관을 나서려는 순간, 그제야 김덕영 감독이 '반일주의' 영화라며 발끈한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자막이 올라가며 배역이 소개될 때 익숙한 이름들이 보여 깜짝 놀랐다. 김상덕과 고영근, 윤봉길과 박자혜.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이름이 너무 낯익었다.
 
알다시피, 김상덕(최민식 분)은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전격 해산된 반민특위의 위원장이었고, 고영근(유해진 분)은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매국노 우범선을 처단한 인물이다. 박자혜(김지안 분)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다.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서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의 주역인 윤봉길(이도현 분)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다.
 
배역마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차용한 건, 오컬트 영화에조차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장재현 감독의 숨은 의도다. 김덕영 감독은 이 점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이유로 '반일주의'를 선동하는 좌파 영화라고 한다면, 일제강점기를 다룬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통째로 부정하는 꼴이다.
 
김덕영 감독의 '몽니' 덕분에 까맣게 몰랐던 독립운동가들도 알게 됐다. 명색이 한국사 교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화림(김고은 분)과 오광심(김선영 분)은 난생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이화림은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의용대에서 부대장을 역임한 여걸이며, 오광심은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해방 후 애국부인회 위원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엊그제가 3.1절이었고, 막 새 학년이 시작됐다. 새롭게 만난 아이들과 한 해의 수업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는 건 늘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올해는 영화 <파묘>가 매우 시의적절할 듯하다. '잊힌 독립운동가 기억하기'라고 이름 붙여 수업하면 근사할 것 같다. 작년 말 아이들과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달력까지 만들었으니 교육적 효과도 남다를 것이다.
 
교사 두 명이 단원을 나눠 가르치게 된 올해 한국사 수업은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단원부터 시작된다. 도입 때 영화 속 고영근의 일대기가 제격이다. 좋은 작품을 만든 장재현 감독께 우선 감사할 일이지만, 영화를 보게 만들고 몰랐던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해준 김덕영 감독께도 더불어 고마움을 전한다. 그의 '날 선 홍보' 덕에 더 많은 이들이 영화관을 찾을 성싶다.
파묘 장재현감독 김덕영감독 반일주의 친일잔재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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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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