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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어떤 이에겐 가닿을 수 없는 이상이라면

[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토니상-퓰리처상 동시 석권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24.03.25 10:45최종업데이트24.03.2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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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공연사진 ⓒ 엠피앤컴퍼니


포털 사이트에 'normal'을 검색하면 형용사로 두 가지 뜻이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는 '평범한', 두 번째는 '(정신 상태가) 정상인'이다. <넥스트 투 노멀>은 바로 그 평범함과 정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이애나'는 16년 전 아들 '게이브(또는 가브리엘)'를 잃은 충격에 양극성 장애를 앓아왔다. 그의 남편 '댄'은 아내를 보살피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다이애나'는 아직 죽은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얽매어 있다(죽은 아들 게이브가 무대에 등장해 계속 다이애나 곁을 맴돈다). 그러는 사이 딸 '나탈리'는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애정결핍에 시달렸고, 가정과 학교에서 모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상처와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이 가족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특히 가장인 댄에게 평범한 가족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강박처럼 다가오기도 했던 것 같다. 1막에서 댄은 아내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자 "좋아질 거야 잘될 거야 다"라고 주문을 외듯이 노래하며 단란한 가정을 꿈꾼다(넘버 '좋아질 거야'). 이 넘버는 2막에서 변형되어 다시 나오는데, 다이애나가 애써 잊었던 게이브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려 하는 순간에서다. 댄은 다이애나를 붙잡고 다급하게 노래한다. "좋아질 거야 잘될 거야 다"(넘버 '좋아질 거야 reprise').

댄이 아내의 회복을 통해 평범한 가족을 갈망하는 것, 나탈리가 비속어를 섞어가며 가정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의 근저에는 '평범한 가족'이라는 비교 대상이 깔려 있다. 그들이 상상하는 평범한 가족, 즉 'normal'이 있기 때문에 그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강박 또는 불만에 사로잡힌 것이다.

예일대 음대 진학을 희망하는 나탈리의 피아노 연주를 보면, 나탈리가 얼마나 평범함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탈리는 클래식을 고수한다. 나탈리 앞에 나타난 '헨리'가 자신은 클래식보다 재즈가 더 좋다며 클래식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을 두고 콧방귀를 뀐다. 그런데 여기서 헨리가 제시한 클래식의 문제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필자가 느끼기에 이 말이 <넥스트 투 노멀>이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클래식은 딱딱하고 틀에 박혀서, 즉흥 연주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 클래식은 'normal'이고, 재즈는 'next to normal'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탈리의 연주회 당일, 나탈리는 자잘한 실수를 반복했다. 그러다 나탈리는 헨리가 말한 클래식의 문제점을 인용해 소리친 후 즉흥 연주를 펼친다. 어쩌면 'normal'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기 어려운 것임을 깨닫고, 'next to normal'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넥스트 투 노멀>은 환상일 지도 모르는 '평범함'이란 기준에 의문을 던진다. 필자가 뮤지컬을 보는 내내 인상적이었던 건, 스태프가 대놓고 무대에 올라와 무대 장치를 옮기고 조정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뮤지컬들에서는 선택하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장치를 만지는 스태프를 보며 불현듯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은 방식을 채택한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공연사진 ⓒ 엠피앤컴퍼니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얼마나 유효할까?

'normal'의 두 번째 의미는 '(정신 상태가) 정상인'이다. 정상이 있다면 정상이 아닌 것, 쉽게 생각해 '비정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쉽게 사용하고, 또 편의에 따라 구분하며 살아간다. <넥스트 투 노멀>의 기본 설정 역시 세상의 쉬운 구분을 따른다. 다이애나는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다. 비정상이라고 분류되었기 때문에 정상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정해진 치료법을 따른다. 물론 그 치료가 다 들어맞는 건 아니다. 상태가 악화되거나 호전되지 않아 의사를 바꿔 다른 치료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거듭하다 보면 그 구분을 강하게 문제시하는 장면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먼저 게이브의 죽음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갓 태어난 게이브는 심하게 아팠는데, 병원에서는 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게이브는 끝내 장폐색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이애나가 치료 매뉴얼에 불만을 내뱉는 장면도 상징적이다. 아들을 잃은 다이애나에게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매뉴얼을 설명한다. 4개월 이상 슬픔이 지속되면 병적 징후이므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기에 다이애나는 아들이 죽었는데 고작 4개월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며 절규한다. 이런 장면들이 거듭되면 거듭되수록 관객은 정상, normal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주장을 살펴볼 만하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정신의학의 문제에 특히 천착했다. 그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허상이며, 각각에게는 고유한 개별성과 특수성만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신의학 지식, 권력이 편의적으로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해온 것이다. 19세기 들어 의학 지식이 지배적 영향력을 획득하며 불완전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했고(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에도 튀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를 정신병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분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푸코는 조금 더 나아가 권력에 의한 분류가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생각해보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 소수자를 향해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그렇다면 이쯤에서 <넥스트 투 노멀>과 결부해 고민해봐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얼마나 유효한지 말이다. 다이애나의 마지막 행동은 그런 우리의 고민에 더 박차를 가하게 한다. 다이애나는 의사가 제시한 치료를 거부하고 떠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회복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끝으로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next to normal'은 무엇일까? 비전형적인 것일까? 비정상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범함 다음에 특이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 다음에 비정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next to normal'은 이상한 것이 아닌, 평범한 그 언저리의 무언가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범함 그 언저리에서, next to normal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공연사진 ⓒ 엠피앤컴퍼니

공연 뮤지컬 넥스트투노멀 엠피앤컴퍼니 광림아트센터BBCH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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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행정학과 정치외교학, 사회학을 수학했다. 현재까지 뮤지컬, 야구, 농구, 그리고 여행을 취미로 삼는 데 성공했다. 에세이 『여행자로 살고 싶습니다』를 썼다. │ anjihoon_5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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