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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비하하지 말라" 91세 이순재가 알려준 삶의 지혜

[TV 리뷰]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24.04.04 16:08최종업데이트24.04.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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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우리가 태어나는 조건은 각자 다르다. 넉넉하게 태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나게 한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연기다."
 
91세 노배우의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시청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동을 선사했다. 4월 3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이 시대의 참어른' 배우 이순재 선생이 출연하여 삶과 연기에 대한 철학을 들려줬다.
 
최고령 현역배우이자 연예계를 통틀어 최고참 웃어른으로 꼽히는 이순재는, 올해로 어느덧 데뷔 69년 차를 맞이했다. 여전히 왕성히 활동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이순재가 한 방송에서 말한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고 주저앉아버리면 늙어버리는 거다. 난 아직도 한다고 하면 되는 거다"라는 어록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젊은 세대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이순재는 변함없이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일종의 의무감이다. 무당이 멍석 펴놓으면 뛴다는 이야기처럼, 빌빌거리다가도 현장에서 촬영을 시작하면 생기가 돈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순재는 늦은 나이에 '작은 거인들'이라는 팬클럽까지 생겼다는 일화를 전했다. 놀랍게도 팬클럽 회장은 <더킹 투하츠>에 출연하여 인연을 맺었던 여배우 하지원이라고.
 
이순재는 "예전에는 팬클럽이라는 게 없었다. 우리 시절에는 배우를 '딴따라'로 봤으니까. 길을 지나가면 '이순재 지나간다. 근데 왜 키가 저거밖에 안 되냐. 신성일보다 작네' 이따구 소리나 하지 사인 해달라는 이야기도 없었다"는 웃픈 일화를 회상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으로 팬클럽의 의미에 대하여 "내가 평생을 해오는 동안 음으로 양으로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셨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팬들과 지나간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면서 차라도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봐주는 관객들 없으면 우리도 없어, 감사해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현장에서 이순재는 항상 주변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를 봐주는 관객이라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 하나하나가 고마운 분들이다"라고 강조하며 "그런데 더러는 스타들이 관객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악수하거나 사진 찍는 것도 싫다고 도망가고, 난 그런 것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악수하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팬들의 소중함을 모르는 일부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날렸다.
 
고령의 나이에도 매년 연극 공연을 빼먹지 않는 이순재는 무려 89세의 나이에 외국배우인 앤소니 홉킨스, 이언 맥컬런 등을 제치고 역대 전 세계 최고령 <리어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젊은 배우도 소화하기 힘든 장장 3시간 20분의 공연에서 400마디 가까운 대사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이순재의 연기력은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순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극찬하며 "그 안에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들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순재는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는 <리어왕>의 명장면 중 하나인 "부자여,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느껴봐라, 그리하여 넘쳐나는 것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는 독백을 직접 낭송했다. 리어왕을 통하여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미처 보살피지 못했던 대중에 대한 연민과 회한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재연하면서 이순재는 "이런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진수"라고 강조했다.

최고참 선배가 된 지금도 대본 분석과 연기 준비를 위하여 현장에 일찍 나간다는 이순재는 "나를 보러오는 관객들을 위한 책임이자 의무니까"라고 설명하면서 "부모님이 돌아실 때도 일이 겹쳐서 불효를 저지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면서 덤덤하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한편으로 이순재는 "배우는 그 나라 언어의 대변자"라는 소신을 전하며 "배우의 언어는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시골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드러냈다. 지금도 이순재는 대본을 철저히 분석하여 단어 하나도 발음을 허투루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기를 위하여 담배까지 끊은 것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순재는 1982년 KBS <풍운>의 대원군 역할을 소화하기 위하여 금연을 시작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꾸짖는 신에서는 무려 4분에 걸쳐 혼자 대사를 이어가는 열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순재는 "당시 TBC에서 KBS로 넘어가면서 나를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연기로 한번 본때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편으로 이순재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연기대상은 안 주더라"며 농반진반으로 아쉬움을 드러내 웃음을 자아냈다.
 
이순재의 존재는 살아숨쉬는 한국 근현대사 박물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고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했으며, 배우가 되어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방송연예계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두 현장에서 함께 했다.
 
유년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이순재는 명문 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철학도 이순재는 당시의 명작 영화들에 흠뻑 빠지면서 연기라는 예술세계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특히 대학교 2학년 때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햄릿>을 처음 보고 "저건 예술이다"고 소름끼칠 만큼 전율을 느꼈다고.
 
이순재는 이후 <사랑이 뭐길래> <허준> <보고 또 보고> <목욕탕집 남자들> <이산> 등 수많은 걸작 드라마에서 믿고 보는 배우, 시청률 보증수표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연기사가 한 획을 그은 배우로 자리잡았다.
 
한편으로 이순재의 연기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이전까지 주로 근엄한 어른 이미지가 강했던 이순재는 칠순의 나이에 망가짐을 불사하는 코믹연기로 '야동순재' 등 여러 가지 별명과 패러디를 양산하며 폭발적인 화제를 일으켰다.
 
이순재는 "그 작품 때문에 늦은 나이에 팬들이 생겼다"고 웃음을 지었다. 또한 '하이킥 시리즈(거침없이, 지붕뜷고 하이킥)'에 대하여 "내가 출연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이킥 시리즈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걸작이다. 김병욱 감독이 정말 잘 만들었다"고 극찬했다.
 
이순재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정수는 웃으면서도 순간순간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페이소스(Pathos, 고통·연민)다. 관객들이 웃으면서 가슴을 치게 하는 것이 희극의 요소"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회사에서 구두닦이같은 일만 하는 아들 정준하의 모습을 목격한 이순재가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신은, 코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이 느껴지는 명장면으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또한 이순재는 '불가능의 과장'을 시트콤의 매력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에는 이순재가 트랜펄린을 타고 뛰어오르며 2층을 들여다보고 흐뭇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연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지만 이순재의 오묘하면서도 해맑은 표정연기로 인하여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이에 대하여 이순재는 "처음엔 어른이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냈지만 막상 내가 직접 해보니 재미있는 거다. 물론 과장이지만 뛰다보면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의 과장이라 더 재미있는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배우에게 기억력은 자존심의 문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한 장면. ⓒ tvN

 
이순재는 연기 현장에서 'NG, 힘들다, 적당히'라는 말을 모르는 3무(無) 철학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대하여 이순재는 "배우에게 기억력은 자존심의 문제다. 대사를 기억못 해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라면 연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소신을 전했다. 지금도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역대 미국 대통령 이름과 순서를 줄줄 암기하기도 한다고.
 
이순재는 "연기가 쉬운 게 아니다. 지금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늘 있다. 왜냐하면 예술에는 완성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의 대가가 있을뿐, 그것이 예술의 끝이자 완성은 아니다. 완성이 없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작업인가"라고 설명했다. 비록 나이의 한계로 인하여 이제는 하지 못하는 작품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작품들이 더 많다는 것이 노배우의 열정이다.
 
이순재는 동시대를 함께해오며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이자 동료배우들인 신구, 박근형 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같은 작품을 여러번 하다보니 서로 의지가 된다. 그만큼 빛을 내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최근 별세한 원로배우 고 오현경과 김성옥 선생을 비롯하여 떠나간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도 드러냈다. 오현경의 장례식에서 "다 자네 기다리고 있으니까 잘들 해후하고, 나도 곧 갈 거니까 가서 다시 만나세"라고 담담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순재는 "나이가 있으니까 노력은 하겠지만 생사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가 우리같은 배우에게는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이순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삶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나라고 불가능할 것은 없다. 자신을 비하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이어 송강호, 최민식, 마동석같은 유명 배우 후배들을 예로 들며 "연기도 마찬가지다. 바닥부터 하나하나 올라간 끝에 평생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 됐다. 예전같으면 탤런트 시험에서 다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서 본인의 세계를 개척했기에 오늘날이 있는 것"이라며 "나도 뭐든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을 가지길"이라며 젊은 세대를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유퀴즈 이순재 거침없이하이킥 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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