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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내 남자 검증 시험'에 담긴 비밀

[TV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24.04.18 14:11최종업데이트24.04.1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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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전기를 풍미한 최고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으로 유명하다. 신분질서와 남녀차별이 공고했던 시대였음에도, 황진이는 특유의 미모와 재능으로 천민 출신 여성이라는 한계를 딛고 당대에 이미 화려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교과서에 그녀의 작품이 수록될 만큼 위대한 예술가이자 역사적 위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황진이의 인생하면 흔히 화려한 남성편력을 둘러싼 일화 위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여성으로서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그녀가 세상의 편견에 저항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은 아니었을까. 4월 1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04회에서는 '천민에서 교과서에 시를 남긴 명사로, 황진이는 어떻게 조선 최고의 기생이 됐나' 편을 통하여 황진이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황진이는 실존 인물임은 유력하지만 여성과 하급계층에 대한 기록이 빈약한 시대 특성상 그녀의 생몰연도나 가족관계, 성장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대동야승> <어우야담> <성소부부고> 등 조선시대에 황진이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들은 적지 않다.

비록 '야사'이기는 하지만 그 저자가 이덕형이나 허균같은 당대의 사대부나 명사들이었다는 점에서 기록의 신뢰도를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는 최소한 황진이가 실존인물이라는 것과, 그녀와 관계된 일화들도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로 거론된다.
 
황진이가 원했던 남자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들을 종합했을 때, 황진이는 대략 중종 시대인 1500년대 초반에 양반인 아버지 황진사와 기생인 어머니 진현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한 편이다. <송도인물지>에 따르면 어머니가 황진이를 출산할 때 방안에서 기이한 향내가 3일 동안 풍겼다고 한다. 훗날 조선 최고의 기생이 되는 황진이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후대에 창작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황진이는 성장하면서 남다른 미모로 어린 나이부터 일찌감치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의 사신이 길에서 우연히 황진이를 목격하고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여 가마를 멈췄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황진이는 어떻게 기생이 되었을까. 조선시대의 종모법(從母法)에 따르면 황진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기생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또한 <송도인물지>에는 황진이가 15세 때 그녀의 미모에 반해 짝사랑을 하던 한 유생이 상사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하자, 죄책감을 느낀 황진이가 이후로 큰 심경의 변화를 접하고 기생의 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다.
 
황진이의 기명은 명월(明月)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인 기생은 흔히 노류장화(路柳墻花)로도 불렸다. 길가의 버들이나 담장 밑의 꽃을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것처럼 기생 역시 누구나 쉽게 대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어릴때 부터 남다른 재능과 자존감을 두루 갖췄던 황진이에게 처음부터 일반적인 기생들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진이는 오래가지 않아 특유의 미모와 지성, 예술적 감각을 통하여 흔하디 흔한 노류장화를 넘어선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어우야담>에는 황진이를 가리켜 '여자임에도 뜻이 크고 높았으며 호협한 기개가 있었다'며 기생임에도 당차고 다부진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황진이가 머물던 송도(松都, 개성)에는 어떻게든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했던 황진이는 기생이지만 절대 아무 남자나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신분이 높은 귀족이나 사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진이의 이상형은 자신만큼 뛰어난 예술성에 고결한 인품까지 겸비한 풍류명사(風流名士)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기생이 아닌 한 사람의 예인으로 존중하면서 봐라봐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벽계수(碧溪守) 이종숙(李終叔)은 황진이의 남성편력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세종의 증손인 왕족이었던 이종숙은 황진이에게 여러 번 구애하며 만남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 당했다. 이에 이종숙의 지인인 이달이라는 인물은, 황진이를 유혹하기 위하여 그녀의 이상형인 풍류명사 흉내를 내라고 조언했다. 황진이의 집 앞에서 기품있게 거문고를 연주하다가 소리를 듣고 황진이가 다가오면, 그녀를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라는 것.
 
이종숙은 이달이 시키는 그대로 따라했다. 거문고 소리를 듣고 황진이가 나타나자 이종숙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자 황진이는 즉석에서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지어 벽계수를 유혹했다.
 
결국 참지 못한 이종숙은 뒤를 돌아 황진이를 보려고 하다가 그만 나귀에서 추락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상대가 진정한 군자인지 확인해보려는 황진이의 시험이었다. 황진이는 체면을 구긴 이종숙의 한심한 몰골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풍류명사가 아니라 그저 풍류객일 뿐이구나"라고 일갈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고위직 관료 출신이었던 소세양(蘇世讓)과의 내기 일화도 유명하다. 소세양과 황진이는 처음 '썸'을 타는 방식부터가 독특했는데, 두 사람은 얼굴을 대면하기도 전에 각자 편지로 한글자씩 오행시 문답을 서로 주고받으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학식이 높은 선비와 대등하게 시를 짓고 고차원적인 필담까지 가능했을 만큼, 황진이 역시 학문에 뛰어난 여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수촌만록>에 따르면 소세양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취기에 "황진이와 30일만 교제하고, 헤어진 뒤에는 다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내기까지 걸었다고 한다. 결국 소세양과 황진이는 진짜로 교제를 하게 됐고 두 사람은 30일간의 계약동거에 합의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된 기한이 다가오자, 황진이는 '달빛 어린 뜰에는 오동잎 지고(月下梧桐盡) 서리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물들었네(霜中野菊黃)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진 후에는(明朝相別後)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 따라 끝이 없으리(情與碧波長)'라는 시를 지어 쓸쓸하고 애잔한 마음을 소세양에게 전하며 이별을 고한다. 그런데 이미 황진이에게 흠뻑 빠져버린 소세양은 결국 친구들과의 내기까지 포기하고 황진이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황진이가 소세양과 친구들의 30일 내기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이종숙의 사례처럼 의도적으로 소세양의 마음을 흔들기 위하여 시험을 벌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황진이는 소세양과도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미련없이 이별을 선택했다.

황진이의 진심과 스승 서경덕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이러한 황진이의 '내 남자 검증시험'은 신분과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허균의 <성옹지소록>에 따르면 황진이가 무려 30여 년간 면벽수련한 승려였던 지족선사를 사찰까지 직접 찾아가 유혹했다고 한다. 이에 끝내 황진이에게 넘어간 지족선사는 절에서 파문 당하여 파계승으로 전락했다는 놀라운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황진이는 다음에는 조선 중기의 명창인 이사종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이사종은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황진이는 당돌하게도 이사종에게 먼저 결혼을 제안하면서 이번엔 '6년간 시한부 계약 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첩살이를 하고, 3년은 황진이의 집에서 동거하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황진이는 6년간의 결혼생활을 마친 후 사랑했던 이사종에게도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사종을 향한 황진이의 사랑은 이번엔 진심이었다. 황진이는 이사종과 헤어진 이후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 오면 구뷔구뷔 펴리라"는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절절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구절마다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황진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훗날 교과서까지 실리게 된다. 여기서 '어론님'이란 남녀관계를 가진 연인을 의미하는 19금식 표현으로, 교과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든님'이라는 표현으로 순화해야 했다. 또한 마지막 구절의 '구뷔구뷔 펴리라'에서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을 '물질화'하여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솔직하고 낭만적으로 묘사한 황진이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력이 돋보인다.
 
이성적인 관계를 떠나 황진이가 평생에 걸쳐 가장 진심으로 아끼고 존경했던 인물은 스승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었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선비였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직접 찾아와 학문을 배우고 싶다며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사대부 중심의 보수적인 질서가 점차 공고해지던 시기였고 평민도 쉽게 학문을 접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서경덕은 '글공부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깨어있는 관념을 지닌 인물이었고, 황진이가 여성이거나 비천한 천민 기생 출신이라는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기로 결정한다. 서경덕은 다른 남자들처럼 황진이를 기생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자 예인으로서 존중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황진이는 낮에는 제자의 본분을 지키며 점잖게 학문을 배우는 듯했으나. 밤에는 또다시 여러 차례 서경덕을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그간의 남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황진이만의 시험 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그런 황진이의 유혹에 시종일관 무심하고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며 단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황진이는 그러한 서경덕의 인품에 더욱 감복했고, 평생에 걸쳐 유일하게 진심으로 존경하는 스승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황진이는 서경덕과 대화를 하다가 송도삼절(松都三絶)을 언급했는데, 개성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가지로 박연폭포와 스승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 본인을 꼽았다고 한다. 그만큼 황진이는 본인의 높은 자존감만큼이나 진심으로 서경덕을 인정했고, 스승의 곁에서 남은 평생을 정착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강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홀로 남겨진 황진이는 큰 상심에 빠진다. 이후 황진이는 이생이라는 인물과 한동한 함께 동행하며, 서경덕이 전국 곳곳에 남긴 발자취를 찾아 여행에 나선다. 이생은 여자 혼자 험난한 길을 오가기 힘들었던 사정상, 황진이의 보호자이자 도우미의 역할을 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황진이를 사랑한 마지막 남자가 된 이생은, 그녀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보내자며 청혼한다. 하지만 아직 서경덕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했던 황진이는 "마흔이 되어서도 함께 살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모호한 답을 남긴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스승을 끝내 잊지 못한 황진이의 우회적인 거절이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황진이와 이생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마흔을 바라보던 시점에 황진이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숭양기구전>에 따르면 황진이가 남겼다는 마지막 유언은 어딘가 처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내가 죽거든 시신을 이불에 싸지도 관을 사용하지 말고 동문 밖 모래와 물이 만나는 곳에 버려라. 그리하여 땅강아지, 개미, 여우, 삵쾡이들이 내 살을 파먹게하여 천하의 여자들로 하여금 나로 경계를 삼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마치 남성에게 그동안 콧대 높게 대하고 상처를 줬던 자신의 지난 인생을 반성하는 듯한 내용이다.
 
하지만 평생 당당하고 주체적 삶을 살았던 황진이가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학계에서는 보수적인 질서가 강조되고 여성에게 가혹해지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시대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황진이의 삶을 '유교적인 여성상' 안에 가두려 했던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도 있다는 평가다.
 
황진이는 비천한 기생이라는 신분에 앞서서,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인이었고, 짧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삶을 살았던 진정한 풍류명사였다. 구수훈의 저서 <이순록>에는 "진이가 기생으로 태어난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시대를 잘못 만나 빛을 다 발하지 못한 그녀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생전에는 기생으로 명성을 얻었고 화려한 남성편력까지 자랑했던 황진이였지만,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꿈꿨던 삶이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존중과 사랑을 받는 것 아니었을까.
벌거벗은한국사 황진이 청산리벽계수 여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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