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5 11:25최종 업데이트 23.08.2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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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소설가 신이현이 충북 충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만큼이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가 달콤하게 와인 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편집자말]

고대 문헌 속 술을 재현하는 '복술복술' 재범의 친구들. “그래도 사과를 잔뜩 먹을 수 있어요!” ⓒ 신이현

 
우리는 매번 일이 있을 때만 만난다. 그것도 아주 힘든 일. 저 많은 일을 어떻게 다 쳐내지. "정말이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이런 순간에 전화를 걸어 "나 좀 도와줘요!"하고 소리친다. 그러면 "아, 잠깐만요. 시간 한번 맞춰 볼게요." 자신의 모든 스케줄을 뒤집어서 농활 일정을 밀어 넣어준다. "저 갈게요. 친구들이랑 같이 갈게요!" 이렇게 해서 만나는 청년, 재범이다. 잘 웃는 풋풋한 친구들까지 잔뜩 데리고 온다.

일 폭탄 속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하루가 간다. 젊은 친구가 참 사람 좋다. 다들 너무 고맙다, 이런 마음만 가지지 그에 대해서 섬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힘든데 왜 우리 밭에 일하러 오는 것일까, 일당을 주는 것도 아닌데, 궁금했지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일하다 보면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싱글벙글 재범. “이거 끝나면 한잔 할 수 있는 거죠?” ⓒ 신이현

 

"양조장에 가서 일하자고 하기에 일 조금 하고 맛있는 술을 잔뜩 마시고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이 힘들 줄 몰랐어요!" 함께 따라온 친구들이 이렇게 소리친다. 다들 살짝 속아서 온 도시 청년들이다. 섬섬옥수 하얀 손으로 철사 줄을 당겨 묶고 깻단을 끌어 모아 트럭에 던져 올리고 내리고, 왕겨를 퍼담은 수레를 언덕 꼭대기에 갖다놓고... 그동안 미뤄놓았던 일을 다 해야 하기에 잠시 쉴 틈이 없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겠지. 일을 너무 시켰어! 정말 미안해." 그들이 가고 나면 짠하게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도 다음에 일이 쌓이면 또 전화를 한다. "재범, 나 어떡해!" 나의 요청에 그는 "아, 잠깐만요. 일정 한번 볼게요." 이렇게 뒤적뒤적하고는 "갈게요! 친구 몇도 끌고 갈게요!" 이렇게 해서 또 만난다. 이제 그 양조장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다 알면서도 그 무리들이 또 왔다. 또 와서 일을 하면서 지난 번과 똑같이 소리친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그러면 나는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 해서 일과 일 사이 깔딱고개쯤에 이르렀을 때 술을 들고 나간다. "우왓!" 그들은 한잔 가득 시원하게 들이키며 한숨 쉰다.

"이 맛에 여기 오는 거죠!" 그들은 한 잔의 술에 몸과 마음을 다 풀어버린다. 술 한잔이 들어가자 하하 깔깔 청춘의 웃음이 포도밭 한가득 울려퍼진다. 그런데 이 청춘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와서 일을 하는지, 뭐 하는 친구들인지 그제야 나도 질문을 한다.
 

재범과 복술복술 회원들. 살짝 속아서 오지만 하하깔깔 즐겁게 일하고 마신다. ⓒ 신이현

 
"저희는 복술복술이라고 술 만드는 사람들 모임의 회원들이에요. 한국 고문헌에 있는 술을 현대에서 다시 만들어보는 거죠. 요즘 술이 너무 똑같고 정형화된 방식으로 양조를 하니까 우리는 좀 더 다양한 것을 추구해보고 싶었어요. 과거 우리 선조들이 술을 담았던 방식을 따라 해보는 것이죠. 우리 선조들은 주로 절기에 맞춰 술을 빚는데, 그건 아마도 재료가 그 절기에만 나오니까 그랬겠죠. 옛 선조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에서 시작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재해석으로까지 가는 거죠. 이 과정을 통해서 결국에는 각자 자기만의 술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있는 것이죠. 좀 다른, 자기만의 술."

아, 그래서 매번 올 때마다 빚은 술을 가져왔던 것이구나. 지난번에는 임금님이 마신 레시피로 부활시켰다는 부의주를 한 병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술 한 병을 빚어왔다. "이건 일종의 청탁주라고 하는데요. 선비들이 관에다 뭔가를 청탁할 때 주로 빚었다는데, 쌀에 포도가 들어간 조리법에요. 쌀 주에서 오는 탁함에 포도가 들어가서 색이 은은하게 곱고 알콜도수가 쌀주보다 조금 더 높아 이 술을 주면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해요." 그래서인가, 청탁주를 마시니 그것을 만들었다는 청년에게 괜히 호감이 간다.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싶고 그의 사생활까지 궁금하게 만든다.
 

복술복술이 고대문헌 레시피대로 복원한 쌀 소주, 청춘의 맛이다. ⓒ 신이현

 
"이건 제가 담은 약술인데 지금 마셔볼까요?" 또다른 청년이 이렇게 말한다. "아, 안돼요. 이러다 일 다 못 끝내요! 저 통나무 다 옮기고 그때 마셔요." 나의 말에 그들은 에이, 실망의 탄성을 지르며 통나무가 있는 곳으로 간다. 몇몇은 포도밭에 철사로 유인줄 묶는 일을 한다. 중참으로 마신 술이 조금 힘이 되었는지 일을 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하고 웃어댄다. 포도나무들도 덩달아 즐거워 춤을 추는 것 같다. 포도나무들도 다 안다, 밭의 분위기를.

"이제 곧 사과 착즙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는 내가 뜨거운 시드르를 한번 만들어볼게요." 내가 이렇게 제안한다. 일 하러 오겠다는 말도 안했는데 내 멋대로 날짜를 잡아놓고 중참 술 레시피까지 들이댄다. "와, 뜨거운 시드르라니, 너무 좋아요!" 술 빚는 이 청년들은 뒷감당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새로운 술을 마실 수 있다는데 좋아서 다들 만세를 부른다. "그런데 복술복술은 무슨 뜻이지?" 다음에 있을 큰일의 일꾼들이 예약되자 나는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져서 이 청년들에 대해서 좀 더 탐구하고 싶은 여유가 생긴다.

"술을 복원한다는 의미를 좀 귀엽게 표현해보았어요. 복술복술.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다기보다 일단 즐거워서 하는 거죠. 유럽의 식탁에는 와인이 들어가고, 일본에는 사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술이라고 할 때는 그냥 참이슬 같은 소주만을 떠올리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음식과 함께 마셔도 좋은 술을 만들고, 그런 문화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거죠."

재범은 한식을 전공했고 지금도 레스토랑에서 한식 요리를 하고 있다. 요리하는 사람이다 보니 자신이 한 음식에 곁들일 좋은 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술 빚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상업 양조인 현대 양조의 단순함을 벗어나고 싶어서 고문헌의 조리법을 따라 해보고, 그 옛날의 맛들을 재현해서 현대의 식탁에 맞게 하고 싶은 마음이 뜨겁다.
 

사과 착즙일 중 잠시 쉬며 한잔 하는 시간. “농활은 이 맛이죠.” ⓒ 신이현

 
"예전에는 집집마다 막걸리를 빚었잖아요. 요즘 집집마다 김치를 담는 것처럼요.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른 것처럼 술맛도 다 달랐을 텐데, 그 전통이 계속 이어져 왔더라면 한국 술도 정말 다양하고 맛있을 텐데, 그 명맥이 끊어진 것이 너무 아쉬워요. 그렇게 집집마다 술을 빚고 그것을 중요한 날 함께 나누어 마셨잖아요. 그것이 진짜 술 문화라고 생각해요." 일제 강점기때 정해진 양조장에서만 술을 빚을 수 있다는 주세법으로 우리는 '집집마다 술익는 냄새'라는 군침 도는 행복도 빼앗겼다.

우리나라에서 술은 조금 죄악시되어 있다. 특히 지원금을 받아서 하는 공적인 문화행사를 할 때 술병이 올라가 있으면 안 된다. 음료수여야 한다. 우습다. 음료수는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고 좋은 술은 땅에서 온 농부의 땀이다. 좋은 술이 얹혔을 때 식탁은 완성된다. 술 한 잔이 곁들여졌을 때 그 음식은 완전해진다. 그 한잔은 땅에서 온 것이고, 그것을 마시고 조금 취하는 것은 고단한 인생의 낙이고 위로이다. 재범은 그것을 안다. 복술복술 청년들도 그 낙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양조장 힘든 노동에도 달려온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미안하다고 하면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 레돔에서 일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그렇지만 내용이 있잖아요.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맛있는 술로 간다고 생각하면 정말 뿌듯해요. 재미있어요. 무엇보다 맛있는 술을 잔뜩 마실 수 있잖아요!" 
 

아무리 반복되어도 좋은 잠시 쉬는 시간, 대사는 늘 같다. “농활은 이 맛이죠.” ⓒ 신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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