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9 18:52최종 업데이트 23.08.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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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소설가 신이현이 충북 충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만큼이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가 달콤하게 와인 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편집자말]

포도밭과 양조장의 신비를 알려주는 일일 도슨트가 된 나. ⓒ 그레잇테이블

 
"지금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좀 있다 통화해요." 모처럼 전화했더니 밭이란다. "어머나, 감독님 밭에서 일도 하시나요?" 나는 진짜 신기하다. "네, 요즘 농사짓고 있어요. 여름 농사 끝나고 오늘 배추 심었어요. 겨우 한 평이지만 20여 종 작물을 농사지었네요. 다품종 초소량으로요." 한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한 평밖에 안 되는 땅에 설 때마다 어안이 벙벙했다고 하는 이 사람, 문화 기획하는 오승희 감독이다. 사실 오 감독이 우리 양조장에 처음 왔을 때는 내가 어안이 벙벙했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세련되게 차려입은 예의바른 도시 여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싶었다.

우리 양조장에는 대부분 일 좀 하는 사람들만 온다. 척 보기에도 연약하고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살았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화면을 켠다.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멋진 일인 것 같은데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저희 양조장에서 하고 싶은 게 뭐죠?" 하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밭에서 노는 거죠."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처럼 웃는다. "어머, 진짜요? 그런데 어떻게 놀죠?"

이렇게 해서 우리의 놀이 계획이 시작되었다. 서울로 돌아간 오 감독은 이렇게 저렇게 놀 궁리를 하더니 어느 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왔다. 드로잉북 화가와 요리사, 가수들이라고 했다. 양조장을 건축하고 마당도 정리가 되지 않았던 때라 사람만 보면 나는 일 시켜먹을 궁리를 했다. "저기, 이 일 조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마당의 돌들을 골라내 저쪽으로 좀 옮겨달라고 했다. "네에 좋아요!"
 

"일좀 도와주세요." 하면 "네에!" 하고 힘차게 대답하는 분들. ⓒ 신이현

 

일 시작하고 5분이면 육체노동자들이 아님을 알아본다. ⓒ 신이현

 
그들은 명랑하게 대답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5분도 안되어 다들 육체노동이라곤 일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을 골라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들이 늦잠자다가 느닷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예술가들처럼 보였다. "저기, 이제 그만 하고 한잔 합시다." 마당일을 스톱시키니 모두의 얼굴에 살았다, 하는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다들 밭으로 가 나뭇잎을 보고 열매를 만지고 사진 찍고 하면서 발랄하게 살아난다. 프흣, 이 분들은 그냥 베짱이들이구나.
     
요리사는 무엇을 요리할까 궁리하고, 드로잉화가는 풀들을 그리고, 가수는 호밀 가득한 포도나무 사이로 기타를 울리며 걸어간다. 아, 포도나무들이 제일 먼저 좋아하는구나! 밭주인도 바람소리와 섞여 날아가는 기타소리에 인생의 낭만을 되찾는다. 마당의 돌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멍석 깔고 놀기도 전에 연습만으로도 나는 이미 행복해져버린다. 이래서 예술을 하는 것이겠지!!

"사람들은 버스로 다 함께 내려올 계획이에요. 비가 올까 제일 걱정이네요." 오 감독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대질해서 내려오는 베짱이 부대들을 기다리며 분주하다. 초록색 천들을 여기저기 걸더니 내 가슴에도 붙이고 레돔 가슴에도 붙이고 자기 가슴에도 매단다. "감독님은 왜 이렇게 주렁주렁 매다는 걸 좋아하세요?" 나의 말에 오 감독은 깔깔깔 웃으며 "재밌잖아요!" 하고 말한다.


"감독님은 왜 노는 걸 좋아하세요? 노는 게 예술인 거 진짜 맞아요?" 오늘 우리가 하는 게 예술인지 노는 건지 나는 또 알고 싶어진다. "사실 사람들은 예술이란 것은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피아노를 배워서 예술을 하고, 연극을 배워서 예술을 하고, 그런 식이죠. 저는 그런 기존이 장르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아이들이 예술하는 것을 보면 그냥 놀이에요. 예술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배우는 예술에서 벗어나 노는 문화의 예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면서, 잘 노는 것이야말로 예술인 것이죠. 뭐 대단한 공연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농부와 같이, 요리사와 같이 예술가와 같이 모두 함께 그렇게." 어떤 질문에도 대답에 막힘이 없어 전직이 뭐였는지 물으니 20여 년 예술 기획을 했다고 한다. 호리호리하면서 어려 보이는 인상에 무엇보다 밭일이 젬병이라 그냥 사회생활 새내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노는 것을 구태여 밭에서 하려고 하세요? 뭐, 저기 광장에서 할 수도 있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할 수 있잖아요." 아무리 봐도 밭과는 잘 안 어울리는 사람이다. "사실 코로나로 인해 배우게 된 거죠. 아무데도 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을 때, 그때 밭을 보게 되었죠. 사람들은 난리인데 밭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화롭더라고요. 그렇게 밭에 가서 깜짝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죠. 아무것도 없는 맨 땅에 씨를 뿌렸는데 뭔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점점 더 커져요. 마지막엔 인간이 그것을 먹게 되잖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진짜 창조,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밭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었죠. 사람들이 예술을 할 때는 사실 모방하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요 그런데 밭은 스스로 예술을 하고 있었던 거죠. 아, 여기서 놀면 되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온 참가자들이 순례자처럼 포도밭을 걷는다. ⓒ 그레잇테이블

 

포도밭 물탱크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 그레잇테이블

 
이렇게 해서 밭에서 노는 것을 기획하게 되었고 우리 양조장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우루루 내렸다. 반짝반짝하고 손이 하얀 청춘남녀들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놀까, 걱정은 기우였다. 다들 참 잘 논다. 밭을 쫓아다니는 거위들과 같다. 밭에서 앉을 방석도 만들고 와인병으로 초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콕 박혀 드로잉도 한다. "밥은 언제 먹어요?' 다들 부엌 앞에서 안절부절할 즈음에 식사종을 울리니 와아, 신나는 탄성을 지른다.
    

양조장 바닥에 털썩 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 ⓒ 그레잇테이블

 
양조장 발효탱크 옆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신다. 내 눈에는 양조장 벽에 붙었던 효모들이 날아다니며 청춘 남녀의 어깨와 볼과 머리카락에 붙는 것이 보인다. 효모들에게 오늘은 잔칫날이다. 바깥 포도나무들도 오늘은 잔칫날, 노는 날이다. 가마솥에서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밭으로 간 사람들이 이건 뭐죠? 저건 뭐죠? 거위는 물지 않아요? 닭은 도망가지 않아요? 재잘재잘 질문도 많고, 잘도 놀고 잘도 웃는다. 주인장 눈에는 포도나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보인다. 듣는 것이라곤 바람 소리에 섞인 농부의 발자국소리와 걱정스러운 한숨밖에 없었는데 베짱이들 노는 소리들에 포도나무들도 춤을 춘다.
 

양조장 앞마당에서 예술가와 참가자들이 함께 대화하고 있다. ⓒ 그레잇테이블

 

그레잇 테이블과 함께 재미났어요, 즐거웠어요. ⓒ 그레잇테이블

 
"그레잇테이블과 함께 즐거웠어요!" "잘 놀았어요!" "잘 쉬었어요!" 다들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떠난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것만 같은데 좋았다고 말해주니 뭉클한 마음이 든다. 부족함에도 응원해주는 그들이 너무 고맙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낭만적인 사람이 되나보다. 이제 농사를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고 술을 잘 담을 힘을 다시 얻었다. 다들 멀리서 와서 놀면서 새 양조장에 지신밟기를 해주셨다.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버스가 떠나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비님,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오니 그 여운이 잔잔하게 남더라고요. 그냥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나 봐요. 밭을 걷고 나무들을 만지고, 양조장 발효탱크 옆 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던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나요. 재미있는 것은 장에서 가서 채소들을 살 때 문득 농부님이 생각난다는 거에요. 와인을 살 때도 옛날에는 그냥 가격을 보고 선택했는데, 그레잇테이블 이후로는 이 와인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에요. 재미있는 변화 아닌가요?"

그날 참석자 한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삶의 변화를 주는 터닝포인트란 것이 있다. 오 감독도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밭은 나에게 일터였다. 그녀가 마술처럼 그곳을 놀이터로 만들어주었다. 밭에 가서 일도 하지만 이제 나는 거기서 놀기도 한다. 놀기 좋은 일터가 된 것이다. 방방곡곡 면마다 잘 노는 문화기획자 한 명씩만 있다면 좋겠다. "이번 주에 우리 밭에 좀 놀아줘요!" 밭일이 힘들 때 면사무소에 가서 이럴 수 있다면 농부란 직업도 할 만한 것이 되겠지. "그런데 오 감독님 우리 언제 또 노는가요?"
 

언제 다시 한번 놀아봅시다! ⓒ 그레잇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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