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3 16:39최종 업데이트 24.01.2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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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기자말]
세월호 희생자 304명 가운데는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를 제외한 일반인이 45명 있다. 여행과 이사, 출장을 위해 세월호에 탄 일반 승객과 승무원 그리고 사고 이후 구조를 하다 희생된 민간 잠수사다.

45명이라는 숫자는 한 학년 대다수에 이르는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에 비하면 적은 수일지 몰라도 이들을 숫자가 아닌 한 명의 생명으로 본다면 결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다.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45명의 세월호참사 일반인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녀이고 연인이자 친구이며, 우리나라 안전 시스템에 큰 경종을 울린 45명의 희생은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해 10월, 세월호일반인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족협의회) 전태호 위원장(47)을 만나 그동안 일반인 유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그는 참사와 관련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단체 대표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억하고자 애쓰는 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언제든 다시 전화할 것 같은데..."
 

세월호일반인유가족협의회 전태호 위원장. ⓒ 변정정희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자주 나가셨어요. 누님이 그쪽에 있어 일 년에 몇 개월은 미국에 몇 개월은 한국에 계셨어요. 한국에 계실 땐 아버지 집을 일주일에 한 번씩 무조건 갔어요. 토요일이면 아버지랑 저녁 먹으며 얘기하다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식구들과 다 같이 교회 갔다가 점심 먹고 헤어졌어요. 그래서 사실 추석, 구정 때 빼고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걸 별로 못 느껴요. 한 번씩 전화해서 '아빤데 며칠 몇 시 몇 번 항공편으로 들어가니까 공항으로 나와라' 그러셨으니까 언제든 다시 전화하실 거 같은 느낌이죠."


함께 했던 주말 식사가 예고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들뿐 아니라 다른 가족, 특히 어머니에게 더 크게 나타났다. 세월호참사가 있기 전 그의 부모님은 한국에 있을 때나 미국에 있을 때나 모든 곳에서 늘 함께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께 전화하셨어요. 구조 온다고. 큰 배는 그렇게까지 빨리 안 넘어가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거죠.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저한테 아버지랑 통화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전화 연결이 안 돼요. 전 업무 때문에 그날 당진에 있었거든요. 바로 일정 취소하고 현장으로 내려갔어요. 오후에 동생, 고모 부부, 작은아버지 다 내려오시는데 어머니는 내려오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죠."
 

세월호일반인희생자추모관에 안치한 전태호 위원장의 아버지 고 전종현(당시 70세)님. ⓒ 변정정희

 
아버지는 사고 이틀 뒤인 지난 2014년 4월 18일 오전 11시, 진도 해역 사고 지점에서 900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됐다. 아버지의 말씀은 대체로 옳았지만, 그날 걱정하지 말라던 말은 틀렸다.

"어머니께 '한국에 있는 게 힘드니 미국에 가시는 게 어떻겠냐'고 여쭸어요. 그랬더니 '거기 가면 니 아빠 더 생각나서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시더라고요. 살고 있는 집을 나와 이사를 여러 번 했죠. 어머니 입장에서는 여기저기 다 아버지가 있는 것 같으니까 싫으신 거죠. 몇 년 힘들었어요.

지금은 좋아지셨어요. 다행이었던 게 주변분들이 챙겨주셨어요. 제가 유가족협의회 일로 바빠서 못 챙기는 상황이면 아는 형이 본인 부모님 놀러 가실 때 같이 모시고 갔다 오고 그랬어요. 또 교회 지인 중 한 분은 평일 저녁에 어머니가 혼자 계시니까 같이 저녁 먹고 주무시기도 하고요. 어머니 친구분들도 툭 하면 '야 바람 쐬러 가자'라면서 끌고 나가시더라고요. 어머니도 처음에 안 가신다고 그러시더니 요즘은 왔다 갔다 하세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확실히 차이가 많이 나죠. 어머니는 도움의 손길을 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상당히 많아 회복이 빠른 편이었고, 그러지 못하신 분들은 아직 많이 힘들어 하십니다."

일반인 유가족 중에는 희생자가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와 이곳에 아는 이 하나 없는 해외동포도,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다 잃은 어린이도, 한 집안에 아들과 조카가 한 번에 사라져 주저앉아 버린 엄마와 그 자매도 있다. 개인마다 상황이 다르기에 주변의 도움보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모두 함께 손을 맞잡을 때 가능해진다. 그가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은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처음에 (유가족협의회 대표)안 하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속한 자전거 동호회 유가족들끼리만 얘기하고 끝내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른 일반인 유가족에게서 연락이 온 거죠. 그분들 만나 도와드리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에요."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반인 유가족들은 서로 연락해 힘을 모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모든 포커스는 이슈화되는 곳에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왜? 뭔가를 하나 했을 때 파급 효과를 내기 위해선 포커스가 맞춰진 쪽에 가야 이슈가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세월호참사도 마찬가지예요. 세월호 공식 수식어가 '세월호=단원고'로 형성되어 있어요. 일반 시민들한테 세월호 유가족은 단원고 유가족밖에 모르는 거죠. 나머지 유가족들은 누가 있어?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거예요."

지난 2016년 4월 16일 인천가족공원 내 일반인 추모관이 먼저 지어졌다. 건립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어떤 이는 놀러 가다 죽었는데 무슨 추모관이냐며 화를 냈고, 어떤 이는 실제로 추모관 벽에 침을 뱉기도 했다.

"일베 리본(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만든 세월호참사 추모를 조롱하는 리본 모양)이라고 아세요? 리본 밑을 역 브이(∧)로 꺾어놨잖아요. 그 논란이 나온 게 2017년도인가 그래요. 저희는 이미 2014년도에 만든 조감도에 지금 리본 모양이 있거든요. 그거 가지고 일반인 유가족이 일베라고 시비를 건 거예요. 일반인 추모관에 사용된 리본이 일베 리본이라고 기사 쓴 기자한테 전화해서 제가 욕을 해버렸어요."

"상처를 준 것도 사람, 치유한 것도 사람이더라고요"
 

일베 논란이 있었던 세월호일반인희생자추모관 외벽의 노란 리본. ⓒ 변정정희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화가 많이 나 보였다. 그동안 받은 수많은 혐오 공격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당시 국가는 대형 참사를 수습할 역량이 부족했고,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와 개인들은 돕기 위해 찾아왔다. 정치권과 언론 역시 합세했다. 하지만 참사로 이미 한 번 상처받은 유가족들은 이후 또 다른 혐오 공격으로 두 번 상처받았다. 상처를 준 것도 사람이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람이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된 많은 연대의 손길은 그의 마음 빗장을 조금씩 열게 했다.

"세월호참사로 처음에 정치 놀음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지금은 그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진정성을 갖고 활동하는 분들만 남았어요. 그중 한 어머니는 일반인 유가족에 대해 알고 난 이후 일반인 추모관에 자주 오셔서 저희와 협업을 많이 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 자녀가 아기였는데, 이제 군대 갈 정도로 컸어요. 그동안 교류도 많이 했고, 연탄 봉사도 같이하고 있어요. 저희 노랑드레 언덕('드레'는 사람 사이의 점잖은 무게를 뜻하며, 시민들이 함께 만든 노란 바람개비 언덕을 부르는 이름-기자 말) 만들기 행사할 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고요. 일반인 희생자에 진실성을 갖고 활동하는 분이죠. 이런 분들은 이슈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순수하게 세월호 유가족한테 뭔가를 해주려는 분들이에요."

 

일반인 유가족과 연대하는 시민 활동가(왼쪽)와 대화 중인 전태호 위원장(오른쪽). ⓒ 변정정희

 
그가 경험한 대로 혐오 공격을 하고 참사를 이용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가 더 안전해지기를 바라며 유가족의 손을 맞잡는 시민이 더 많을 것이다. 긴 시간 지속된 선량한 연대가 바꾼 건 그의 마음만이 아니다.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이에 따라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해 활동하는 '4 ·16 재단'이 생겼다. 일반인 유가족이 연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더 많아졌다. 단원고 유가족들이 주축이 된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와도 현재 원활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지난 8주기 때부터 같은 인천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세월호참사 인천추모위원회'를 만들어 매년 추모 행사를 함께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의미와 향후과제2023 전국순회간담회 @인천’ 행사에서 세월호참사 10주기 인천위원회와 함께하고 있는 전태호 위원장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 세월호일반인희생자추모관

 
이제 그의 화는 다 풀렸을까? 그렇지 않다. 세월호참사 이후 10년이 흘렀고, 정권이 두 번 바뀌고, 초등학생이던 그의 첫째 아들은 성인이 되고, 네 살이던 둘째 아들은 중학생이 됐지만, 평범한 한 가족의 아빠였던 그는 계속 열을 내며 싸우고 있다. 수많은 연대와 작은 변화들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양 사고가 안 날 수는 없죠. 전 세계적으로도 해양 사고가 나요. 근데 제가 열 받는 게 뭐냐면,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사고가 터졌으면 국가에서 살릴 수 있는 사람들 다 구조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살릴 수도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버린 거예요.

그게 열 받는 거예요. 왜 안 구했는지, 그러면 그 안 구했던 상황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얘기를 해보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진상규명이 먼저죠. 책임자 처벌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국민의 행복 및 재산권을 박탈시켰으면 거기에 합당한 처분은 받아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딱 까놓고 얘기하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거예요. 자동차 교통사고라고 치면 뺑소니에요."


지난해 11월 2일 대법원은 세월호 해경 지휘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결국 세월호참사의 구조 실패에 대해 유죄 선고받은 건 당시 해경 현장 지휘관 김경일 123 정장이 유일하다.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지휘부는 처벌되지 않고 말단의 현장 관리자만 처벌받은 것이다. 이는 앞으로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나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끔찍한 예시가 됐다. 세월호참사뿐 아니라 이태원참사도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지난해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연대의 의미로 일반인 추모관에 방문했다. 그날 그는 유가족들을 만나 당부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셔라. 세월호참사 터진 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 해결된 거 없다. 우리 싸우는 거 진행형이다. 이태원참사는 1 년밖에 안 됐는데 결과가 나올 거로 생각하시냐? 끝까지 싸워야 해결의 기미가 보일 것이다, 그 얘기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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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주로 TV 다큐멘터리, 라디오를 비롯한 방송에서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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