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2 19:34최종 업데이트 24.03.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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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은 국어사전의 뜻과는 달리 전혀 높임말로 들리지 않는다. 좋은 뜻이라 해도 다 큰 어른에게 '순진'하다고 말하는 게 칭찬일 수 있을까? '투정'도 그런 낱말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사전에는 '무엇이 마땅치 않거나 불만이 있을 때 떼를 쓰며 조르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기에 보통은 어린아이에게 부정적 의미로 쓰지만, 어른에게 쓰면 심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지만, 어른에게 사용된 이 투정이란 말이 모욕은커녕 소박한 다짐이요, 은근한 맹세의 표현으로 들릴 때가 있다. 유진오의 수필 <해바라기>를 들을 때가 그랬다.


수필 <해바라기>는 '이 꼴'이란 표현까지 써 가며 자기 신세 한탄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는데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신을, 비슷한 나이에 위대한 작품을 쓰거나 업적을 남긴 이들과 비교하며 한탄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살았지만 그가 부러워하는 위대한 정신은 시대나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그 벽을 뚫고 시대와 환경을 창조해 냈음을 강조한다.

작가가 이런 글을 쓴 걸 보면, 자기가 못한다거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젊은 나이에 시대와 환경을 창조해 낸 위대한 인물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작가는 할 수는 있는데 뭔가 안 맞아서 조금 늦어지는 거고, 그래서 조급한 마음으로 하려다 보니 자기한테 불만이 생긴 것 같다. 한마디로 작가는 자기 자신한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 투정은 밉지 않다. 부정적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소박한 다짐 같고, 은근한 맹세 같다. 문학가요, 법학자요, 교육자에다 정치인까지 두루 성공의 길을 걸어온 유진오도 이렇게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가고 생뚱맞게 위안도 됐다. 

뜬금없이 해바라기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쓰러진 해바라기 해바라기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일 뿐 결코 내 핑계나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 김미래/달리


작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무척 답답했던 것 같다. 같은 씨에서 나왔지만, 볕이 잘 드는 앞마당에서 싱싱하게 우쭐대는 해바라기보다는 볕도 안 드는 서재 앞에서 병들어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에 더욱 애정을 느끼고 심지어 동질감까지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해바라기를 보며 분노하고 또 한편으론 경탄하는데, 나도 이 장면에서 가슴이 터지고 말았다. 
 
보기 싫었다. 감정도 사고도 없는 식물이건만, 나에게는 그것이 생존 경쟁에 패배해 넘어진 인생의 패자 같이 보였다. 눈물을 흘리고 운명을 저주하면서, 자기를 그런 운명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의 손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중략)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꽃 필 희망은커녕 더 자랄 희망조차 없는 해바라기는 줄기와 잎이 흙에 묻힌 채 그래도 또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갑자기 가슴이 떨려 왔다. 동정 때문도, 슬픔 때문도 아니었다. 뜬금없이 그 해바라기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흔들고 애써 숨을 크게 내쉬어 봐도 자꾸 그 해바라기가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해바라기가 나를 변명해 주는 것 같았고, 엉뚱하게도 위안을 주는 것 같았다.

'제길, 이봐요, 작가님, 겨우 그런 걸로 이 꼴이라고 투정을 부리십니까? 그럼 내 꼴은 뭔데요? 그 나이에 이미 교수님 아니십니까?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이겁니다. 근데 당신 서재 앞, 생존 경쟁에 패배한 그 해바라기 같은 신세라서 그럴 뿐이라고요.'

시력을 잃고 난 후에 내가 겪는 어려움 중에서 어떤 게 가장 힘드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다르니까. 이때는 온통 하얗거나 까맣거나, 가끔은 하얀 배경에 얼룩이 지고 까만 배경에 뭔가가 반짝이지만, 그렇게 다르지 않은 같은 모습만이 매일 매일 내 시야를 채우고 있다는 게 제일 힘들었다. 희망의 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경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생의 경쟁에서 패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내 모습이 꼭 그 해바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뽑아 들었다. 저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해바라기>의 작가처럼 당당하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게 있자니 이번에는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멀쩡히 책을 잘 듣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은근히 오기가 났다. 현실을 부정하는 건 바보짓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아무렇게나 확대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작가가 내게 이런 터무니없는 감정을 주려고 이 글을 썼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시력을 잃은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해바라기와 같은 처지일 수는 없었다.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처음부터 재생했다. 음성 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음미하듯 듣고 있는데, 쓰러진 해바라기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장면에서 온통 하얗게 칠해진 내 시야에 그 해바라기가 나타났다. 바닥에 쓰러져 잎과 줄기는 여전히 흙에 덮인 채 간신히 고개만 쳐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해바라기는 찡그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게 뭔가 말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자기하고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를 구실 삼아 핑계를 대지 말라고 했다. 자기를 그린 작가는 자기를 통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뿐인데, 왜 나는 자기를 두고 한심스러운 투정만 하고 있냐고 짐짓 꾸짖는 것도 같았다.

나도 몰래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가슴이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는 기분 좋은 터짐이었다. 그 해바라기는 자기를 핑계 삼아 해보지도 않고,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위안을 삼고 심지어 변명거리로까지 삼으려던 나를 깨닫게 해 준 것이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려니까 이것저것 생각지 못한 방해 때문에 안타깝고 조바심이 나서 부리는 투정과 아예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투정은 분명 다르다. 앞의 것이 <해바라기> 작가의 것이었다면, 뒤의 것은 내 것이었고 그건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날 좀 응원해줘
  

걷고 기타치고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려니까 부리는 투정은 가끔은 소박한 다짐이요, 은근한 맹세의 다른 말이다. ⓒ 김미래/달리

 
난 이래서도 안 됐지만, 이런 사람도 아니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뭔가를 하려고 참으로 많이 투정을 부렸지만, 그건 절대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엄살도 부리고, 핑계도 댔지만 그건 또 다른 다짐이었고, 응원해 달라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 산길을 오르고, 탄천길을 걸으면서 언제나 신고 있던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와 줄어들 줄 모르는 긴 바지에 투정을 부렸지만, 내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허구한 날 이런 내 투정을 들어야 했던 이들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핀잔 아닌 핀잔만 줬다.

기타를 배우면서도 볼 수만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1플랫에서 4플랫, 다시 2플랫에서 7플랫으로 오가는 코드 진행에 못하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난 여전히 웃고 있었고,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내게 기타 배우기를 그만두라 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 100편 외우기에 도전하면서, 외워도 외워도 자꾸만 까먹는 내게 투정을 부리고, '그칠 줄'이었나 '그칠 줄을'이었나, '좋아하던'이었나 '기뻐하던'이었나, '걷겠다'였던가 '걸어가겠다'였던가를 헷갈리며 연방 투정을 부렸어도 싫어서가 아니었다. 포기하지 말자고 내게 던지는 애교였고, 은근한 격려였고, 가벼운 다짐이었다.

수필 속 해바라기를 나 자신과 혼동하면서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걸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걸 나한테 권한다고 투덜대고 화를 냈다. 부끄러운 일이다. 다행히도 그 해바라기가 다시 나를 찾아줬다. 언젠가 수필 <해바라기>는 잊을지 모르겠지만, 이 해바라기의 가르침만은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

문득 시 하나가 떠올랐다. 부러움인지 시기심인지 모를, 처음 읽었을 때 나도 그런 친구를 갖게 해 달라고 투정을 부렸던 시, 이해인 수녀님의 시, <작은 기도>. 천천히 외워 봤다.
 
내가 힘들 때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고
잠잠히 기도만 해주는
친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투정을 부릴만하지 않은가? 이런 친구가 어디 흔하냔 말이다. 그냥 그래서 처음에 나는 부럽기만 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있는데,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런저런 이유로 찾지 못하는 친구를 주셨으니 반드시 찾겠다는 다짐으로 이렇게 기도하셨나 보다.
 
내 안에
곧잘 날아다니는
근심의 새들이
잠시 앉아 쉬어 가는
나무를 닮은 친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친구는 더욱 귀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친구는 나무를 닮았다. 분명 어딘가에 있는데,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기가 어렵다. 아, 그래서 이렇게 에둘러 투정을 부리셨나 보다. 어딘가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친구를 찾겠다는 소박한 다짐이요 은근한 맹세로서.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려는데 어려우니까 이런 기도를 하시는 걸까? 반성하는 뜻에서 나도 짧은 시 하나.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근데 이건 제 속뜻이 아닌 거 잘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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