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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S의 집'(웨딩샵)을 알게 된 건 내 조카 정정남으로 인해서다. 정남이는 몇 해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웨딩드레스를 해 입자고 그곳을 들락거렸던 듯싶다.

정남이의 엄마는 내 둘째 누나고, 이름은 '김대수'다. 우리 집안은 딸네의 이름들이 참 독특하다. 서두에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대수 누나보다 며칠 먼저 나왔던 사촌누나의 이름은 '김천둥'이다.

내 할아버지는 유복하게도 마흔 명이 넘는 손자, 손녀를 보셨다. 그들의 이름을 손수 지어 붙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진, 종자를 돌림으로 쓰는 사내들에 비해 딸네의 이름을 짓는 일엔 별 고심의 흔적이 없다.

@BRI@오십몇 년 전 늦가을, 별스럽게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렸고, 며칠 후 자연스럽게 큰물이 나서 강이 불었다. 천둥 치던 날 낳은 손녀는 김천둥이 됐고, 강이 넘친 날 낳은 손녀는 김대수(大水)가 됐다.

셋째 누나는 '김인자'다. 대충 짚은 출산일을 한참 넘겨도 소식이 없기에 이제나저제나 하던 찰나, 떡 두꺼비 같은 딸이 나왔다.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순 강원도 말로 "인자, 나왔드나?" 했고 즉석에서 김인자로 명명했다.

넷째 누나는 '김갑녀'고, 다섯째 누나는 '김을자'다. 내가 다리 사이에 번데기 하나를 못 달고 밋밋하게 나왔더라면 당연히 '김병자'가 됐을 것이다. 평생을 병자로 불리지 않게 된 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름 대신 '감자'로 불렸던 갑녀는, 중학시절에 할아버지 앞에서 한을 풀었다.

한여름 날 할아버지를 모시고 강냉이, 감자를 삶아 가족이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녀는 그중 제일 큰 감자를 집어 땅바닥에 던지고는 할아버지 보란 듯이 '콱' 밟아 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아버지에게 안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지만, 그 후로는 "그래, 나 감자 맞다!" 그러고 살았다.

▲ 'S의 집'(웨딩샵) 전경.
ⓒ 박정훈
아무튼 대수 누나의 맏딸 정남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숱한 고생을 하다가 듬직한 남편을 구해서 결혼을 하게 됐었다. 총각이었던 삼촌(나)을 젖히고 면사포를 쓰자니 조금 민망했던가 보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삼촌, 지금 빨리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S의 집(웨딩샵)'으로 왓!" 했다. 뭔 일인가 하다가, 혹시 좋은 일인가 싶어 그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나는 'S의 집'이 여자들 신부 교육하는 학원인 줄 알았다.

'S의 집' 문을 살며시 열자, 화사한 드레스며 화려한 조명이 내겐 별천지 같았다. 신부의 집은 웨딩드레스를 빌려주거나, 무대 연주복 등등을 만들어주고 빌려주는 종합 드레스숍이었다.

뭘 잘못 왔나 싶어 나가려는데, 호호 아줌마와 왈순아지매의 어감을 연상시키는 중년의 여인이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았다.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녀에게 신원조회를 당했다. 정남이의 뜻을 대충 알아챈 나는 유쾌하게 나를 떠벌였다. 예나 지금이나 '울랄라'로 불리는 내가 주눅이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의 예상대로 며칠 후, 나를 조사했던 'S의 집' 원장 김윤옥씨는 "근사하다"는 말과 함께 아리따운 여성을 내게 소개했다. 그녀는 생각이 많고 고상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듣거나 말거나 유감없이 또 떠벌였다.

▲ 무언가 작업 중인 김윤옥 원장(사진 오른쪽)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이송이(27)씨.
ⓒ 박정훈
반응은 헤어지고 두 시간 만에 바로 왔다. "저, 잘 들어갔습니까?, 내일도 저는 노는데…. 또 만나고 싶고…"라는 그런 내용의 전화를 했다.

그녀는 명쾌했다. "저 됐구요, 싫은 대요…"라고 했다. 하하하, 내가 너무 떠들었던 것 같다.

그러고 또 며칠 후 늦은 저녁, 'S의 집'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이번엔 조금 긴장을 하고 S의 집 문을 열었다. 원장은 약간 까무잡잡한 여성에게 드레스를 입혀놓고 마무리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조금 불안해하는 빛을 보였다. 한쪽엔 까만 정장을 어색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은 정말 기구했다.

김씨 성을 가진 그 조선족 남자는 한국생활이 7, 8년을 넘어 거의 한국사람 같았지만 여전히 불법이라 늘 불안한 생활이었다. 얼마 전엔 죽자고 모은 돈을, 가게를 얻어 중국농산물 장사를 하자는 누구에게 속아 날려 먹은 상태였다. 여자는 내가 생전 처음 본 캄보디아 사람이었는데 갸름한 얼굴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인형 같았다.

그들은 원장의 집 근처인 응암동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었고, 세 번만 만나도 인사를 하는 원장의 성격 탓에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그들이 어찌해서 만나고 같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까르나(?) 비슷하게 불렸던 그녀는 눈에 띄게 배가 불러 있었다. 원장은 특별한 그 커플에게 웨딩복을 입히고 사진 한 장을 선물할 참이었다.

내가 불려간 건 시끄러운 내 성격을 꿰고 있던 원장이 분위기를 좀 띄워 달라는 요구였다. 또 어떤 여성을 만나게 될까? 내심 기대했던 나는 기꺼이 들러리 역을 수행했다. 사진을 찍고 중국요리를 시켜 먹을 때 까리나는 자장면에 식초 넣듯, 눈물을 쏟아 김씨 맘을 아프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배갈 한 잔을 원샷 시켜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었다. 그제야 약간의 경계를 풀고 한바탕 웃음을 쏟았다. 식을 못 올리고 변변한 사진 한 장 걸어 두지 못해 특히 자녀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가난한 부부를 만나면 원장은 그런 선물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진을 받아가는 부인은 반듯이 눈물을 보이고 그럴 때 짠한 보람을 느낀다고 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참 좋은 일이라 지금도 생각한다.

들러리를 섰던 건 벌써 재작년의 일이 됐고, 그들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나는 아는 바 없다. 하지만 그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글에다 대고 웨딩복이 얼마고, 싼 건 얼마고, 무대복이 딴 데보다 훨씬 싸다. 그런 얘기를 달수가 없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입어 본 적도, 입혀본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원장의 성품을 아는 나는 누구든 크게 불평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사정이 여러모로 거시기 하다면 대현동 이대 앞에 있는 'S의 집'에 들러서 툭 터놓고 "잘 해주세요"라고 그런 부탁을 해 보시길 조용히 귀띔한다.

원장은 또 1백여 건의 혼사를 주선한 뚜쟁이로 알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아직 혼자이고 누군가를 만나게 되길 갈망한다면 'S의 집' 원장 김윤옥씨를 찾아가 조용히 속삭여 보시라고 알려 드린다. 소개비 달라고 할 일 없으니 걱정 놓으시고….

세월은 강처럼 흘러 김윤옥 원장을 본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조카 정정남이를 통해 여전히 유쾌하게 계심을 듣고 있다. 이 글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 또한 흐뭇했음을 전하고 싶다.

소리 안 나는 화사한 봉사, 그 빛이 점점 번져가서 세상이 좀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

▲ 화려한 여러 웨딩복들 (나는 언제 누구에게 저걸 입혀 볼까)
ⓒ 박정훈

덧붙이는 글 | 이 물건 여기 가면 싸다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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