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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여행하기 피곤한 대륙이다. 무슨 말이냐면, 떠나기 전 여행지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유럽 여행지 대부분이 성당, 미술관, 유적지 같은 곳이다 보니 유럽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채우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다.

평소 관심도 없었던 서양 미술사 책을 집어 들게 된 것도 순전히 여행 때문이었다. 대단한 깡다구가 있는 여행자가 아니면 유럽을 가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그냥 지나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바다 건너 찾아간 박물관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모나리자, 비너스 말고 더 넉넉한 미술 지식을 담아야 했다. 나는 떠나기 전 '유럽 미술관 산책'류의 책 서너 권을 스캔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앞에 섰다.

루브르 박물관과 그 유명한 피라미드 입구
 루브르 박물관과 그 유명한 피라미드 입구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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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예술 작품을 자석처럼 빨아들인 루브르. 프랑스의 상징.

여행책자에 소개된 대로라면 이 박물관은 총 40만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한 작품 당 30초씩만 감상해도 일 주일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무엇이든 압축해서 빨리빨리 해치우는 데 세계 최고 아닌가. 난 책이 시키는 대로 유명한 작품들을 골라 동선을 짰다. 다행인지 내가 아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아 한나절이면 될 것 같았다. 역시 모나리자는 맨 나중에 보는 걸로 하고. 그리하여 루브르 '다이제스트' 투어가 시작됐다. 제목은 '모나리자 찾아 삼만리'.

그러나 박물관 투어는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해세력(?)들이 많았다. 우선 미술 관람을 방해하는 건 미술작품 그 자체였다. 40만 점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수용하다 보니 워낙 많은 그림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시선을 어지럽혔다. 특히 고대와 중세 시대 그림이 집중돼 있는 이곳은 그림 규모도 다들 장난이 아니어서 고개를 쭉 빼고 올려다 봐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성서나 신화 내용이 그림의 주요 모티프가 되다 보니 그림을 통해 성스러움을 표현하려 하고, 그러려면 일단 그림의 규모부터 크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작품이 몰려 있는 옆 동네 오르세 미술관이 루브르보다 관람하기 편한 이유도 일단은 그림들이 '힘'을 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는 사람들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간 시기이기 때문에 그림들도 대체로 소박한 편이다. 루브르가 왕궁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고 오르세가 폐쇄된 기차역을 단장해 만들었다는 태생적 차이도 영향이 전혀 없진 않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 내부. 관대하게도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은 관람객이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빽빽한 그림들이 압박이다.
 루브르 박물관 내부. 관대하게도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은 관람객이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빽빽한 그림들이 압박이다.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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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 좀 다르지만 고전예술을 감상하려면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역사, 사회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쳐다봐도 그림을 읽을 수 없다. 이 시대 예술은 온통 기독교 성서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로 점철돼 있어 그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시대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그림에 나타난 1차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그림에 나타난 인물, 사물들이 상징하는 2차적 의미까지 읽어내야 한다. 그 시대의 미술 문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서양사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그림 읽기의 척도로 귀결된다. 나는 그만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또 관람을 방해하는 건 체력이다. 박물관 개관 시간에 맞춰 입장했다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줄곧 '걷고 서고'를 반복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박물관 투어는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거의 '노동' 수준이다. 영양분을 보충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나리자까지는 거쳐야할 포스트가 몇 개 남았지만 그냥 다 지나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림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방을 지나치다 의자가 보이는 대로 털썩 앉았다. 뜨거워진 발바닥에 진짜 연기라도 나는 것 같았다. 멍하니 바닥만 바라봤다. 갑자기 든 생각. 관람객들을 위해 바닥을 우레탄으로 깔면 얼마나 좋을까. 중간 중간에 지압 돌도 깔고 말이지.

모나리자를 가기 전 거쳐간 포스트. 그 유명한 니케 여신. 기품이 느껴진다.
 모나리자를 가기 전 거쳐간 포스트. 그 유명한 니케 여신. 기품이 느껴진다.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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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쯤 되자 이젠 도저히 그림을 볼 엄두가 안 났다. 아쉬운 대로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곧장 모나리자로 향했다. 모나리자에 근접했는지 방을 연결하는 문에는 '모나리자는 이쪽입니다'하는 안내문도 걸려 있었다. 안내문을 써 붙였다는 게 참 재밌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이 별 수 없이 다 나 같은 사람이군, 생각했다. 드디어 투어의 최종 목적지인 모나리자 방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대는 걸 보니 이 방이 맞구나 싶었다. '다 됐다' 생각하는 순간 힘이 쭉 빠졌다.

방탄 유리 안에 들어 있는 모나리자는 집에 있는 텔레비전 브라운관 크기만큼 작았다. 조명 때문에 유리가 반짝여서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경계라인도 멀찌감치 설치해 놓아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휴대폰, 카메라를 쥐고 손을 뻗어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나도 감상은 둘째 치고, 모나리자 앞에서 '확인 도장'부터 찍었다. 이로써 임무 완수.

모나리자를 모셔놓은 방.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두꺼운 유리를 뚫고 그림을 관람해야 하는 이중 고통.
 모나리자를 모셔놓은 방.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두꺼운 유리를 뚫고 그림을 관람해야 하는 이중 고통.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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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그림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여행지에 와서 굳이 미술관을 찾아가는 이유는 뭘까. 유명한 그림에 대한 정보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림 읽기도 굳이 루브르에 오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평소 한국에 있을 때도 미술관을 찾지 않는 내가 왜 루브르나 오르세를 찾아가 이미 익히 봐 왔던 작품들을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걸까.

이른바 '원작'에 대한 아우라가 사라진 오늘날, 원작보다 원작 앞에서 찍은 여행자의 사진이 더 큰 아우라를 발휘하기 때문이리라. 원작을 마주했을 때 원작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게 아니라 원작 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찰나의 감격을 느끼기 위해 바다 건너 루브르를 향하고 있다.

루브르의 또 다른 마스코트, 비너스
 루브르의 또 다른 마스코트, 비너스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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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콧대 높은 루브르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부터 거둬들인 입장료를 어디에다 쓰는지 궁금해졌다. 루브르는 프랑스에 있지만 그건 온전한 프랑스의 힘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루브르의 권위를 세워주고 막대한 관광수입을 프랑스에 안겨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입 역시 세계에 환원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실제로 루브르의 수익금이 상당 부분 공익에 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말은 무효가 되겠지. 하지만 그 수입이 전적으로 프랑스에 귀속된다면, 10유로를 지불한 나로선 썩 유쾌하지 않다. 루브르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물을 수집(약탈)해 명성을 쌓은 유명한 박물관, 미술관들이 자신들은 관리비나 유지비 정도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시 전 세계에 환원한다는 자발적 협약이라도 맺으면 좋겠다. 그런 '쿨'한 모습을 기대하기엔 역시 무리겠지.

개인적으로 루브르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디르케.
 개인적으로 루브르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디르케.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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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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