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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은 서라벌 남쪽에 솟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에서 뻗어 내린 약 40여개의 등성이와 골짜기를 말하며 약 180여개의 봉우리가 있다.

 

아주 오래전 서라벌이라 불리던 경주는 맑은 시내가 흐르는 푸른 벌판이었다.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이 평화로운 땅을 찾은 두 신을 보았다.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과 부드럽고 고운 얼굴의 여신이었다. 너무 놀란 처녀는 “저기 산 같은 사람 봐라!” 해야 할 것을 “ 산 봐라!”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비명에 놀란 두 신이 발길을 멈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처녀의 외침으로 두 신이 산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낭산이 되었고, 남신은 억센 바위의 장엄한 남산이 되었다.

 

경주의 산치고 신라의 유적이 없는 산이 없지만 그 으뜸의 자리에는 남산이 서있다. 남산을 불국토로 여긴 신라인들이 천년을 두고 보듬었으니 남산 자체가 그대로 절이며 신앙인 셈이다.

 

사실 경주를 다녀가는 많은 사람들이 시내와 보문단지 등의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가지만 남산에 있는 수많은 역사적 유물, 유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초등학교 수학여행과 중학교 봄소풍으로 남산을 오른 이후로 처음인 경주방문을 답사라는 계기를 통해 다시 방문할 수 있어 뜻 깊은 여행이었다.

 

오래전 올라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다시금 남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장엄하게 늘어서있는 남산을 보면서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남산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파란 하늘만큼이나 쾌청한 날씨여서 산에 오르기는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삼릉골 앞에서 내려 인원 점검을 하고 일용할 양식을 배분받고 등산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나의 두 번째 남산 등반이 시작된다.

 

 

  삼릉골 앞으로 많은 나무들이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우뚝 서있다. 천년을 그렇게 나라를 지키듯 남산을 지켜온 것일까. 삼릉골 입구 나지막한 곳에는 옛 신라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이름의 기원이 되기도 한 삼릉은 그저 평범하게 생긴 원형의 봉분이다. 세 왕은 모두 신라 왕조의 박, 석, 김의 세 성씨 중 박씨 성을 가진 왕으로 지금은 수많은 등산객들의 발자국 소리를 벗 삼아 지내고 있었다.

 

 

  삼릉 계곡은 냉골이라고도 하는데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계곡물에 손을 씻었는데 더운 날씨에도 얼음장 같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5분 정도 오르니 첫 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삼릉골은 남산에서 가장 길고도 가장 많은 불상조각이 있는 계곡이다. 그 중 첫 번째 만난 석불좌상은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위 사진)인데 안타깝게도 목이 잘린 채 결가부좌하고 앉아있는 부처님이었다. 손도 잘린 채 몸만 남았는데도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는 그 모습이 의연하다 못해 마음이 아파왔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부처의 자태가 무척이나 신비스러웠다.

 

 

  석불좌상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가니 높이 솟은 돌기둥에 관음보살이 새겨져 있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위 사진)은 조금 덩치가 있어 풍만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서 친근함을 더해주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옆집 아줌마 같은 느낌이다.

 

교수님께서 남산에서‘가장 예쁜 불상’이라고 하셨다. 남산의 유적들은 모두 자연과 조화로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과 함께 감상해야 제 맛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어느 책에서는 이렇게 써놓았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지려 할 때 노을이 관세음보살의 얼굴에 비추니 보살의 얼굴이 화기에 찬다. 붉은 해가 서방정토로 돌아갈 때 하늘도, 산도, 냇물도 온누리가 금빛으로 바뀌는 순간 본 고향의 아미타불을 향해 밝은 웃음을 보내는 이 보살의 모습에는 누리의 환희가 넘친다.’

 

비록 내가 보았던 때가 오전이라 금빛 환희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인자한 그 미소만큼은 충분히 나에게 환영의 인사가 되었다.

 

한걸음씩 정상을 향해 내딛으면서 천년을 거슬러 올라 옛 신라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려 했다. 나를 스치는 많은 등산객들의 발걸음에도 시간과 역사를 울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살포시 언덕에 오르자 큰 바위에 새겨진 여섯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처럼 나란히 서있는 마애선각육존불상(아래 사진)은 조각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연필 하나로 그려놓은 것처럼 그 필치는 아주 능숙한 듯 느껴졌다. 처음엔 이름 없는 바위에 불과했을지나, 그 다듬지 않은 바위는 이제 천년의 시간을 흘러 많은 이들의 기도를 감내하는 신성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 바위 뒤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그동안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경주 땅이 내려다보인다.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 얼마나 시원한지, 중생을 굽어보는 느낌이 바로 그러했을 것 같았다.

 

이어 만난 불상 역시 선각된 불상이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전문가에 의하면 미완성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코는 길고, 입술은 두꺼워 조금은 웃기게 생겼다. 그래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사실 전통적인 불상의 인상은 아니지만 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오랜만에 맑은 날씨라서 그런지 답사팀 외에도 등산객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물과 간식거리를 얻어 먹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산 능선이 보이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바로 상선암이다. 상선암은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라고 한다. 내가 중학교 때 남산에 올랐을 적에도 이곳에서 쉬어갔던 생각이 난다. 작은 규모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쉬게 해주는 넉넉한 곳이다.

 

 

  상선암에서 조금만 오르면 아주 큰 불상이 하나 있다. 이른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위사진) 이라 하는데, 남산 불상 중에서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한다. 거대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뿐만 아니라 자비에 넘치는 얼굴 모습은 믿음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며, 신령스러운 이 암벽 아래에는 기도하기에 알맞은 터가 자연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서 소원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그시 감은 듯하지만 경주 들판을 내려다보는 이 부처님의 눈빛에는 분명 중생구원의 소망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작은 바람 하나를 부처님의 작은 눈빛 속에 놓아두고 왔다.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드디어 남산 산 능선에 올랐다. 산 아래로 보이는 경주 들판이 이처럼 시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밟고 섰던 바위를 상사암(상사바위)이라 부른다고 한다. 길이 25m정도 되는 큰 바위로 조금은 험상궂게 생긴 험한 바위인데 아득한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주던 바위라고 한다. 지금도 바위 동쪽 면 가운데에 작은 감실이 있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촛불 자국이 역력하다.

 

 

  상사바위에서부터 정상에 이르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흙길이었다. 한층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는데, 20여분 정도 걷자 금오산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정상 표지석은 내 키를 넘는 큰 바위에 새로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금오산의 정상이구나 하며 가슴 벅찬 느낌을 만끽할 수 있음으로 충분했다. 금오산이라고 적힌 바위의 한쪽 면에 내 눈길을 잡은 글귀가 있었다.‘남기는 것은 발자국, 가져가는 것은 추억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정상에서 우리는 준비된 도시락을 먹고 꽤 오랜 시간 휴식을 취했다. 바위틈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금오산 정상에서 나는 또 하나의 추억을 가져가고 있었다.

 

 

   정상에서 약간 아래쪽으로는 남산횡단도로를 따라 걸었다. 걷기에 불편함이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로라고해서 차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남산횡단도로를 따라 남산의 늦여름, 초가을 풍치를 마음껏 느끼며 걸었다. 낮게 자란 소나무들이 좌우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나와 친구가 되었다.

 

 

  20여 분 정도 걷다가 용장골로 접어들었다. 바윗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장사지에 이른다. 이번 남산 답사 코스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곳 용장사지다. 특히 용장사지 삼층석탑(위 사진)의 위용은 정말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대했다.

 

탑 형태는 전형적인 신라탑의 2층 기단을 이루었으나 자연암석 위에 바로 상층기단을 세워 남산 전체를 하층 기단으로 삼았다. 남산이 모두 이 탑 아래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어찌 기발하지 않으며, 광대한 마음이 아닐 수 있을까. 나는 한참을 탑 옆에 앉아 바람을 맞았다.

 

용장사지 석탑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밧줄을 타고 힘겹게 내려가면 마애여래좌상과 용장사지 석불좌상이 있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껏 보아온 마애불 가운데 손꼽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긴장되고 활력에 차 있으며, 세련된 선의 흐름이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준다. 뚜렷한 항마촉지인은 어떤 악의 무리라도 누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강한 힘을 담고 있어 든든함마저 나타내고 있다.

 

 

  용장사지 석불좌상(위 사진)은 삼층석탑형의 높은 대좌 위에 놓여있어 삼륜대좌불이라고도 한다. 둥근형태의 특이한 대좌위에 목이 없이 몸체만 남아있는데, 신라시대 대현스님이 염불을 하며 불상 주위를 돌면 불상도 함께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디 가도 이런 특이한 모습의 불상은 본 적이 없다. 덧붙여 교수님께서 남산에서‘가장 섹시한 불상’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석공의 커다란 위상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불상 등 이만하면 내가 용장사지를 손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용장사지에서 산을 내려왔다.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다고 했던가. 40분정도 내려와서야 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온종일 걸었더니 다리가 꽤나 아프고 묵직했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경주 문화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남산에서 적지만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하루였다.

 

경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소중한 유산이 가득한 역사적 유적지이다. 남산은 ‘땅 위에 옮겨진 부처님 세상’이라고 했다. 수많은 불교 유적이 산재한 남산에서, 물론 아직 그 일부밖에 보지는 못했지만, 신라인들의 거룩한 민족의식을 담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나 담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단한번의 느낌으로 그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남산의 경이로움은 어지간히 신비화되어 있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어떤 책에 따르면 남산을 대략적으로 훑어보는 데도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이제 시작이다. 한 두 번의 추억은 아련하지만, 수차례의 견고한 느낌은 나의 신념이 되고, 지적 재산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태그:#경주, #경주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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