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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크다

기독교 역사상 반 기독교적 사회 정서가 전무했던 시대는 없었지만 요즘은 심각할 정도이다. 기독교 관련기사에 달리는 댓글의 분위기가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반감을 넘어 일련의 분노에 가까운 정서를 감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 정권 들어 그 농도는 더 짙어졌다. 대통령이 교회 평신도 직급 중에선 가장 높은(?) 장로 출신이기 때문일 게다. 아니 단순히 장로 출신의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으로서의 실정(失政)과 실격(失格)의 배경에 기독교적 영성내지는 그 속성이 작용한다고 대중은 보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인, 그들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변명하고 한편으론 사회적 환심을 사려고 애쓴다. 변명은 주로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일 뿐'이라는 논리로 전개되고, 환심을 사려는 노력은 주로 대 사회적 봉사와 구제(나눔)를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닌 것 같다. '부분'을 강조하기엔 기독교회의 타락과 실격(失格)이 너무 보편적이고 대 사회적 봉사로 환심을 사기엔 속셈(그렇게 해서 상실한 교회의 세력을 다시 확보하고자 하는)이 너무 훤하다.

뭘까? 그들은 뭘 잃어버린 것일까? 무엇을 잃었기에 부정도 못하고 변명과 위선의 옷을 입으려는 것일까? 또 뭘까? 그들에게 태연히 반감을 노출하며 차라리 냉담함으로 일정한 선을 그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들의 무엇을 역겨워 하는 것일까? 도덕성일까? 기독교인, 그들이 약간의 도덕성을 회복하면 그들에 대한 사회적 정서는 다시 우호적이 될까? 아님 교회가 복지를 위해 좀 더 많은 자원을 내놓으면? 예배당을 지금보다 조금 작게 지으면? 목사들의 수위와 수준이 조금 격상되면 교회를 향한 사회적 분위기는 반전될 수 있을까?

기독교인, 그들의 매력을 잃어버렸다

이 땅에 세워진 첫 기독교회는 1978년 전의 예루살렘 교회이다. 이 단 하나의 교회가 처음 7∼8년 동안 기독교회를 대표하며 존재했다. 교회가 하나뿐인 그 때에도 교회는 욕을 먹었다. 그러나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욕은 지금의 교회가 받는 수모와는 많이 달랐다. 당시 교회에 쏟아진 반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로마 집권층으로부터 받는 경계와 탄압에 가까웠다. 이들은 모두 보수적 기득권 계층이었다. 이들이 기독교회에 쏟아 붓는 반감과 분노는 사실 두려움이었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가져다준 자신들의 격식과 통제 속으로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 교회의 공동체적 삶이 그들의 안정감을 위협했던 것이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같이' 살았다. 정치 종교적으로 한 뛰어난 지도자의 역량 밑에 숨죽여 사는 것이 익숙하던 당시에 그건 충격이었다. 그들은 '격을 넘었다'. 인구통계 시 사람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던 여성들이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지도자로 활동하고, 노예와 주인이 말을 트며,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네 것 내 것 없이 한솥밥을 먹을 뿐 아니라 채무자와 채권자, 글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지내니 당시로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저한 공동체성(共同體性) 안에서,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무엇이 될 것인지, 자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될 것인지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환심을 사려고 복지기금을 내놓는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사회적인 큰 인물을 배출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정신)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용인되어 온 장벽들을 부수며 새롭게 이뤄 가시는 그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시될 때마다 그들은 기꺼이 공동체적인 삶으로 그것에 반응하며 실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신념을 영원한 세계로까지 끌어올리며 이를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증명해 나갔다. 또한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증명될 때마다 그들은 함께 사는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보며 삶의 목적과 확신이 없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매력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이 당연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보는 예루살렘 교회는 결코 뻔한 곳이 아니었다.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무엇이 있었다. 물론 매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시민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출석한 것은 아니다. 아주 소수였다.

이방교회들이 세워지기 전 8년 이란 긴 시간동안 대략 4천명정도의 신자만이 출석했을 뿐 시민들 대다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했다. 대다수 시민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이 교회에 매력과 호기심을 가진 구조! 자신들의 삶의 양식, 삶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교회의 공동체적 삶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그 무엇이었다.

자아중독의 교회

교회는 이 공동체성이라는 처음 교회의 유전자를 잃어버렸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첫째, 나와 내 자녀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될 것인가이다. 철저히 '내가 무엇이 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깊게 믿는 것 같지 않다. 그들의 주님이 공동체 안에서 하시려는 일에도 별반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다만 자신이 되고 싶은 그것과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증명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뿐이다.

성경의 말씀은 한 개인의 꿈을 이루거나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 분명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항상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 두 번째로, 그들은 사회에 대한 왜곡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아주 출중한 인물을 교회가 배출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것이다. 그렇게 배출된 인물이 사회를 장악하고 다스려야 교회의 우월성과 신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믿는 것이다.

대 사회적 책임감이야 그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건 처음 교회의 유전자가 아니다. 처음 교회는 그 실험을 자신들 안에서 행했을 뿐이다. 무거운 부담감을 가지고 교회의 우월성을 사회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안에서 실험, 또는 증명된 적도 없는 가치를 사회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배출하려는 부담감에서 놓임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배출된 대제사장은 교회와 나라 안에서 무지한 대중을 구원하기 위해 고뇌에 찬 대사(大事)를 감행한다.

그 모습이 수백억의 교회당을 건축하는 모습으로, 수천년 유유히 흘러온 강들을 뜯어고치는 토목 공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수고와 진정성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첫 교회의 유전자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이다.

사도들은 교인들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일러주었다. 그전 까지는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한 사람의 제사장이 제사를 잘 드리고 못 드림에 따라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성결과 구원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역설적으로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제사장의 기능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같이 살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한 사람이 고뇌에 찬 모습으로 백성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대사(大事)를 꾸미는 모습은 그들에게 웃음거리였다. 대사를 행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족했다. 그 한 분 안에서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던 것이다.

공동체성이 필요하다

신약성서 중 절반이상을 집필하고 하나뿐인 예루살렘 교회가 여러 나라와 민족가운데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바울이란 인물도 처음엔 보수 기득권층의 대변자로 교회를 와해시키는데 자기 삶을 불태웠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다메섹이란 동네에서 신비체험을 한 후, 두려움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잠깐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속에 '증명되고 있는 신념', 즉 자유와 신비, 시대와 세대, 격식과 경계, 성과 신분을 관통한 사랑과 자유의 삶을 보며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바로 아라비아 나바테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베일에 가려진 침묵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소아시아로 돌아와 수많은 이방인 교회들을 세우는 한편 기독교회의 신학을 확립하고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기독교회는 공동체로 출발하고 공동체 속에서 충격을 받고 공동체로 귀환하여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공동체에 헌신하는 유전자를 가졌다.

하나님 믿는 어느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성취를 이루어야 하나님이 영광 받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통령을 배출하여 백성을 무릎 꿇릴 때 교회의 가치가 증명되며,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무릎 꿇려 기도회에 참석하게 할 때 교회의 힘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공동체적 영성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소속집단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신(神)과 거래하려는 이방 종교의 유전자이다.

그러니 공동체성을 상실한 교회여, 감히 일반 사회를 사랑하려 들지 말라. 확신하건데 당신들끼리 진정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은 당신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일반 사회를 대상으로 실험적 변화를 시도하지 마라. 당신들 안에서 실험되고 증명된 그것만이 사회에 충격과 매력을 줄 뿐이다. 그리고, 교회를 역겨워하는 분들이여. 당신들이 교회를 향해 갖는 반감은 결국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을 질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삶은 진정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가?


태그:#기독교, #MB신앙, #공동체, #반기독교적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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