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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3일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위원장이 부산을 방문해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저는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며 "그분들께 제가 사과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의 민주화세력에 대한 사과는 이번이 세 번째다.

그러나 사과의 내용이 부정확하고 진정성 또한 결여되어 있어 '무엇'을 '왜' 사과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사유화된 국가권력에 강압적으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재산을 침탈당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경향신문 '강제'매각이다.

박정희의 언론장악 음모 

박정희는 1961년 반공과 국가안보 강화, 부정부패 척결, 경제개발 등 6개항의 혁명공약을 내걸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으로 막 돋아나려는 민주주의 싹을 짓밟아 버렸다. 5.16은 정치군인들이 자유로운 선거로 수립된 합법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한 쿠데타였다.

이를 호도하기 위해, 1962년 12월 26일 헌법을 개정하면서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 하여, 5.16쿠데타가 자신이 유린한 4.19혁명을 계승한 것이라는 궤변까지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가 세운 '3.1운동-4.19의거-5.16혁명'의 역사발전 정식은 1980년 제정된 전두환의 5공화국 헌법에서 '3.1운동-5공화국'으로 바뀌었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개정된 헌법에서 '3.1운동-4.19민주이념'으로 정식화한다. 박정희의 '아들'을 자처하는 전두환조차 5.16을 헌법전문에서 삭제한 것이다.

박정희는, 합법정부를 전복한 군사정변이 정당하지 못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혁명공약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다시 본연의 임무인 군으로 되돌아가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963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이양이라는 당초 약속을 번복하고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정부를 뒤엎은 군사쿠데타에 이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박정희의 제3공화국은 출발부터 정통성이 결여되었다.

정통성을 결여한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비판적인 언론이었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여론과 언론의 힘에 의해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그는 특히 말 많은 지식인, 신문기자, 종교인들에게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어떤 때 그는 자기를 꼬집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구겨 쥐고 내 앞에서 부르르 전율하면서 증오를 이기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고사하고 새파란 젊은이들의 붓끝에서 자기가 이리저리 놀림감이 되는 것을 자신의 철두철미한 권위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홍보 및 여론의 효율적 통제를 위해 언론기관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중정) 등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사유재산과 언론기관을 강탈한 것이 부일장학회였다.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중정에 의해 체포·구속된 김지태는 석방의 대가로 자신 소유의 부산일보 주식 100%,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와 부일장학회 장학사업을 위해 준비해 둔 토지 10만여 평을 국가에 '기부'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기부'받은 재산을 토대로 5.16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중정이 김지태를 구속하고 언론 3사의 헌납을 강요하던 시기에 천주교유지재단이 경향신문의 매각을 추진하자, 박정희 의장은 자신과 친분이 돈독한 시인 구상(具常)을 내세워 경향신문 인수를 추진하여 매매계약까지 체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측은 자금원이 박 의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계약금 3억 환을 돌려주고 계약을 파기하였다.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반대 운동의 와중에 계엄령을 선포한 박정희는 언론을 더욱 철저하게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한 듯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경향신문 매각 사태가 일어났다. 부일장학회 사건이 '헌납'의 성격을 띤 것이라면 경향신문은 '매각'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상이 모두 언론사이고, 중정이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5.16장학회 소유가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경향신문 탄압 배경

1964년 한일협정반대 데모가 격화됨에 따라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정권은 정국의 혼란은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과 학생들의 부화뇌동 때문이라며 차제에 언론을 단단히 통제하겠다고 벼르고, 7월 30일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에 제안하게 한 뒤, 8월 2일 심야에 야당이 퇴장한 가운데 강행 통과시켰다. 언론의 윤리 확립을 빙자해 언론을 통제하려는 방침을 세운 것이었다.

이어 정부는 8월 31일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끝까지 반대하는 4개 언론사에 대하여 정부광고 중단, 신문용지 배급과 은행 융자의 제한, 출입기자의 관청출입 금지, 언론인 사생활 정보 수집은 물론 나아가 정간 또는 폐간 조치 등을 취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무장관이던 공보부장관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법 시행을 강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박정희도 견디다 못해 9월 9일에는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 보류를 결정함으로써 여론에 일단 굴복하고 말았다.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둘러싼 언론파동은 표명 상으로는 언론계의 승리로 끝났으나 언론을 다스리겠다는 박정희의 의지가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법 시행 보류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그 후 박정희 정권은 더욱 효과적인 언론대책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언론을 적절히 통제하는 언론담당보정반을 중앙정보부 내에 설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김형욱은 국내담당 제3국장에게 책임을 지우고 언론통제방침을 세워 각 신문사 담당요원을 임명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경향신문이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많은 언론사들 가운데 경향신문이 박정희정권 언론공작의 우선 대상이 된 까닭은 신문의 논조 때문이었다. 경향신문은 자유당 시절 독재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다가 폐간된 전력이 있는 언론으로 한일회담과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를 주도하였다. 경향신문이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연루 자료를 보유하여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태성 간첩 사건 보도 등을 통해 박정희 후보의 아킬레스건인 좌익사상 전력문제를 부각시켰다. 경향신문은 1964년 2월 1일 삼분폭리(三粉暴利)의 내막을 파헤쳐 정치쟁점화 시킨데 이어, 같은 해 5월 9일 '허기진 군상' 시리즈를 통해 가난한 농촌과 영세민들의 궁핍한 삶을 생생하게 고발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마침내 이해 5월 12일 '정일권 내각에게 바란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가 문제가 되어 경향신문 관계자 10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격화되어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허기진 군상' 시리즈 등의 폭로기사와 르포기사가 북의 신문 방송에 인용됨에 따라 북측을 이롭게 했다는 등의 이유로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 등 3명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한편 박정권은 사장 이준구를 구속했다가 풀어줌으로써 신문의 논조 변화를 기대하였으나, 경향신문의 비판적인 논조는 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신문발행인협회 회장이었던 이준구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당시 경향신문으로 하여금 강도 높게 정부를 비판하도록 하였다. 

중앙정보부의 공작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경향신문에서 이준구가 손을 떼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경향신문 강제매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정이 공안사건을 확대·조작하였음이 지난 2005년 7월 22일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진실위)'의 진상조사 발표를 통해 드러났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군사정권이 중정 등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사유재산과 언론기관을 강탈하였다는 의혹이 피해 당사자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데 따른 조사결과였다.

윤우현 간첩사건 : 1965년 4월 8일 중정은 경향신문 체육부장 이형백이 연루된 무전간첩(無電間諜) 사건과 경향신문 동경지사장인 윤우현이 월북한 사실을 발표하고, 5월 8일에는 사장 이준구와 그의 처남인 업무부국장 등을 이 사건과 연관시켜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중정은 윤우현이 경향신문 동경지사장 신분으로 국내에 들어와 경향신문 사장 이준구와 자신의 고종사촌을 활용하여 각종 정보자료 수집 및 간첩침투를 위한 공작을 전개하다가 입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중정은 윤우현의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주일 파견관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이준구 사장을 압박하기 위해 윤우현을 이형백간첩사건에 연계시킨 것이다.

이형백 간첩사건 : 1965년 4월 8일 중정은 언론기관을 배후 조종하라는 지시를 받고 남파된 북한 간첩 이문백에 의해 포섭된 경향신문 체육부장 이형백 등 무전간첩 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였다. 친동생인 이문백과 접선한 이형백이 사장 이준구를 포섭대상으로 삼고 농촌의 참상을 과장 보도케 했다는 것이었다. 1965년 9월 검찰은 윤우현·이형백 간첩사건과 관련 이준구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징역 3년을,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로 볼 때, 중정은 남파간첩 이문백과 연계된 이형백 등이 적발되자, 경향신문 체육부장 이형백 간첩사건과 경향신문 동경지사장 윤우현 월북사건을 한데 묶어 발표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사장 이준구는 간첩들에 의해 포섭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한편, 이준구에게 경향신문 경영권을 포기하도록 압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향신문 강제 매각

당시 경향신문은 비슷한 독자층을 가진 중앙일간지들에 비해 재정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였다. 그런데 1965년 7월 3일 제일은행과 한일은행이, 같은 달 5일에는 서울은행이 각각 경향신문사로 '대출금상환통지장'을 보내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각 은행이 언론사 대출금에 대해서는 상환 기일을 관례적으로 자동 연기해 주었는데 반해, 경향신문에 대해서는 만기일을 불과 2~3일 남겨놓고 상환을 통보한 것이다. 이어 7월 9일부터 법원에 경향신문 부동산에 대한 경매를 신청하였고, 법원은 9월 7일 부동산 경매개시를 결정하였다. 1966년 1월 25일 실시된 경향신문에 대한 경매는 박정희 대통령과 동향으로 단독 입찰한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2억 1천 8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당시 기아산업은 산업은행의 법정관리를 받고 있어 경향신문을 인수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준구는 간첩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상황에서도 신문사를 포기하지 않았고, 경향신문의 법적인 매각이 이루어진 1966년 1월 25일 이후에도 주식을 양도하지 않았다. 중정은 이형백·윤우현 간첩사건만으로는 이준구 부부를 굴복시킬 수 없게 되자, 이준구에게 다른 혐의를 적용하거나 당사자들을 협박하고 주변 인물들을 압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한편 이준구 부부는 국가권력에 맞서 1년 가까이 신문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준구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등 고립감에 빠져 더 이상 신문사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66년 4월 초순경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주식을 양도하였다. 그러자 김형욱은 이준구를 다음 공판 기일인 4월 19일에 맞춰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국가보안법, 반공법 부분은 무죄로 해주겠지만 중정도 체면이 있으니 외환관리법은 선고유예로 하겠다고 하였다. 이준구는 실제로 이날 벌어진 2심에서 김형욱이 약속한대로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수장학회로의 귀속

경향신문을 낙찰받은 김철호는 1966년 4월 주식을 양도받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로 제헌국회의원이자 1950년대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박찬현에게 경영을 맡겼고, 주식도 50%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쳤다. 1969년 1월에는 신진자동차측에 소유권을 넘기라는 이후락 비서실장의 요구를 받아 주식을 양도하였고, 이후 경영난이 심화되자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방송 사장 이환의에게 경향신문과 통합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결국 경향신문도 5.16장학회 소유가 되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회고록에서 경향신문이 5.16장학회로 귀속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얼마 후 김철호가 이후락에게 불려가 경향신문 주식의 50퍼센트를 청와대 즉 박정희에게 헌납하라는 압력을 받고 굴복하여 고스란히 그걸 상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박정희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 뒤 1년쯤 지났을 때 김철호가 은행 융자를 제대로 못 갚는다고 다시 이후락에게 불려갔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건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오. 경향신문을 신진자동차 김창원에게 넘겨주시오'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여보시오, 이 실장. 당신 그런 식으로 하다간 나중에 큰코다칠 줄 아시오. 김철호가 이병철처럼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주식의 반을 청와대에 바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 식으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하면 누가 대통령을 신뢰하겠소? 주는 척하다가 모두 가로챈다고 그럴  것 아니오?'

'난들 어떡합니까. 각하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그것으로 이후락은 나에게 호되게 당했다. 결국 경향신문은 김창원에게 넘어갔다. 이번에는 내가 김창원을 호출하여 혼 구멍을 내주었다.

'다른 사람이 인수했으면 몇 년 운영해보도록 할 것이지 이후락 씨에게 가서 살살 쑤셔서 남의 신문사를 그렇게 가로챈단 말이오? 당신이 그 따위로 굴었다간 안 당할 줄 알아?'

결국 훗날 경향신문은 문화방송과 더불어 송두리째 박정희의 소유가 되었고 요사이는 유신언론의 선봉장인 최석채가 회장이 되어 박정희의 재산인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정성들여 박정희의 친위언론으로 가꾸고 있다."(<김형욱회고록> 중 3권 172-173쪽)

5.16 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를 따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박근혜가 1995년 9월 6일부터 2005년 3월 29일까지 10년 동안 이사장을 지냈다. 박근혜는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판공비, 급여 등 2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아 갔다.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1월 정수장학회는 직원 임금을 삭감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반면 이사장 급여는 2배로 뛰었다. 2005년 3월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내놓고 물러났지만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었던 최필립을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앉힘으로써 손을 때는 시늉만 했을 뿐 사실상 지금도 정수재단을 소유하고 있다. 현재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 지분 100%와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대지 723평, 그리고 MBC 지분 30%를 갖고 있다.

남는 문제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는 경향신문 매각이 5.16쿠데타 이후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정이 동원되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자의와 국가기관인 중정에 의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의 자유가 유린되고 사유재산이 침탈당한 것이다. 특히 경향신문을 강제로 매각하는 과정에서 공안사건을 확대하는 등 대공수사권을 남용함으로써 언론탄압을 자행하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언론장악을 위해 안보위기마저 조작하였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이 중정의 압력에 의해 강제 매각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상 이에 합당한 시정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당시 군사정권을 비판하다가 정권의 탄압을 받아 매각당한 경향신문의 언론활동을 재평가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언론인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명예회복을 시키는 조치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 건물과 부지를 보유하여 경영상 큰 어려움이 없던 경향신문사가 강제매각과 통폐합 과정에서 심각한 적자에 이름으로써 매달 사옥의 토지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 등 큰 손실을 입어 왔으므로 이러한 손실을 보전할 방안을 강구할 필요도 있다.

지난 3월 19일 정수장학회 사회적 환수를 위해, '정수장학회 사회 환수와 독립정론 부산일보 쟁취 공대위'가 공식출범하였다. 박근혜 위원장과 최필립 이사장이 정수장학회 환원의지를 보이지 않자, 공대위가 환수운동에 나선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강탈된 정수장학회를 실질적으로 사회 환원하라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대해, 박근혜 전 이사장과 최필립 현 이사장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동문서답만 하고 있다. 박근혜가 "나는 관련 없다. 정수장학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공을 넘기자, 최필립은 "정수장학회는 박근혜 위원장과 무관하며, 사회 환원 요구는 일부의 정치공세"라고 화답했다. 이어 박근혜는 "저한테 자꾸 누구 사퇴시키라는 건 얘기가 안 된다" 또 다시 책임이 없음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난 2월 24일 법원에 의해 정수장학회가 법률적으로도 불법적으로 강탈한 '장물'임이 확인된 이상,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요구가 총·대선을 앞둔 정치공세이라는 반발은 설득력이 없다. 박근혜 위원장이 진정으로 민주화세력에 대해 사과할 의향이 있다면, 부친의 과오를 솔직히 국민 앞에 사죄하고 독재정치의 유산인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책임 있는 자세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참고 문헌 :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2005.7.22)
- 이 글을 쓴 한상권 기자는 학술단체협의회·'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통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경향신문, #정수장학회, #박정희, #박근혜, #부일장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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