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 서클'은 칼 폴라니가 청년 시절 대학의 후진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비밀 모임의 이름입니다. 정치의 계절, 겨울입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무슨 기준으로 정치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 됐습니다.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모비딕 프로젝트'를 연재합니다. 거대한 고래, 모비딕을 쫓는 마음으로 후보자를 추적하는 '갈릴레이 서클'의 총선 기획입니다. [편집자말] |
"인민군이 찾아왔어. 끌려가서 며칠 동안 수사를 받았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북한에 끌려 다니는 거야. 걔네한테 뭘 퍼주고 양보하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걔네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김재삼, 91세, 1948년 월남)앞서 우리는 노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조명했다. 노인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결정은 그들이 경험한 사건에 기인한다는 가정에서였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재삼씨는 인민군에 의한 정치 탄압을 겪었다. 그 사건으로 김씨는 북한에 대한 반감을 품고 살아왔다. 현재 그는 확고한 여당 지지자다. 북한에 우호적인 야당을 찍는 것은 적과 손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탑골의 표'는 저마다 사연이 가득했다. 김씨 이외에도 여섯 명의 노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생애사적 경험과 정치성향 간의 연결고리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전문가와 함께 개별 사례를 심층 분석했다. 다만 아래의 분석은 사례 연구 전문가가 직관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개별 노인의 생애사를 일반화해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인생의 황금기가 군사정권, 민주적이지 않으면 언제든 돌아설 것
'노력하면 된다'던 오철(65)씨의 생애 경험은 성공이다. 오씨는 70, 80년대 인생의 황금기를 경험했다. 분석에 참여한 이아무개(37) 상담심리사는 "젊은 나이에 자금을 마련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오씨가 굉장히 진취적이고 성공 욕구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당시 정부가 발주한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해 돈을 벌면서 큰 성취감을 맛 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씨가 무상 복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분석에 따르면 그의 '노력=성공' 방정식은 생애 경험을 통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상담사는 "오씨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던 고도 성장기에서 성장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무상 복지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운동권 출신에서 전향한 김민상(60)씨에겐 1987년 민주화가 생애 경험이었다. 김씨는 "민주화가 됐으니 이젠 경제발전을 챙겨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이 상담사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개헌을 이끌어 냈으니 큰 경험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대통령 직선제와 같이 거시적인 측면을 보고 정권의 민주성을 판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담사는 "만약 현 정부의 반민주적인 통치행위가 크게 드러난다면 김씨의 정치 성향은 다시 바뀔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전체주의 사고방식에 익숙, 전쟁 트라우마의 영향
월드피스자유연합 회원이기도 한 민경백(68)씨는 다른 노인에 비해 두드러지는 생애 사건이 없었다. 다만 이 상담사는 "민씨의 성장배경 자체가 생애사적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민씨는 기득권층의 자녀로 부족함 없이 자랐기 때문에 당시 정권에 반감을 갖지 않은 것이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졌을 것이라는 게 이 상담사의 설명이다. 그는 "민씨는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의사소통 방식에 익숙한 타입으로 보인다"면서 "따라서 세월호 특조위를 해체하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점순(67)씨는 민씨와 같은 단체에 속해 있었지만 스스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4대노동개혁 찬성 등 정부·여당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다. 박씨는 아버지가 6·25 전쟁으로 나라에 몸 바쳐 돌아가신 일을 비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국가를 위한 고결한 희생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이 상담사는 "이 같은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국가주의적 국가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성장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가난해서 '고급 정보' 취할 여유 없어
김귀한(65)씨는 빈곤으로 비참한 시절을 보냈지만 당시 정권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김씨의 생애 경험과 정치성향 간 괴리에 대해 이 상담사는 "고급 정보의 부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김씨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의 물가상승률은 16%에 달했다.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즉 김씨가 가난한 형편때문에 기본적 욕구를 채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고, 결국 사회적 관심이 다른 이보다 적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사례 중 유일하게 야당 지지성향을 보인 박노인(77)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부친과 조카의 죽음으로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를 경험한 것이 결정적 요인인 셈이다. 또한 박씨는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애착관계가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담사는 "박씨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아버지의 정치성향을 존중했던 것 같다"면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정치적 식견을 자기 것으로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조카를 광주민주항쟁 때 잃은 생애 경험이 그 같은 정치성향을 더 강화했을 것이라는 게 상담사의 분석이다.
블라인드 테스트 : 공약만 보고 투표 한다면?생애사적 경험이 노인 유권자의 투표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도 진행했다. 노인을 대상으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제시한 노인 공약의 선호도를 조사했다. 단 정당명은 가린 상태에서 노인들에게 "공약만 본다면 어디에 투표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실험 결과 정당 공약 간 큰 차이가 없었다. 조사에 참여한 44명의 노인 중 22명이 새누리당의 공약을 선호했으며, 나머지 20명은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을 택했다. 대부분이 여당 지지자라고 밝힌 것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앞서 인터뷰한 김재삼씨는 새누리당이 제시한 공약에 투표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런 것들보다 나라를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면서 생애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를 했다. 김씨 이외의 대다수 노인들도 복지 공약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4) 유권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유권자는 다른 연령대보다 가장 낮은 18.5%만이 후보자 선택 시 정책·공약을 중요하게 고려한다고 응답했다. 위 실험의 표본은 부족했지만 관련 통계가 '노인 유권자의 투표에서 공약이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노인에겐 복지 공약보다 나라가 1순위였다. 실험에 참여한 노인들은 본인들을 위한 공약을 두고 '나라 걱정'부터 했다. 복지 정책이 실현됐을 때 나라 곳간이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생애사적 경험으로 인해 노인들은 '나'라는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로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인물의 리더십, 나라의 안보와 같은 큰 틀 안에서만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에 김형수 한국노년교육학회 부회장은 정당이 발표한 노인 공약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즉 정치권이 노인 유권자를 단순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여당은 '노인 유권자의 표는 내 표다'고 당연하게 여겨 매력 있는 공약을 개발하지 않는다"면서 "반면 야당은 노인 유권자의 생애 경험 등을 고려해 접근 방식을 세분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4·13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 각 정당은 노인 유권자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이들은 경쟁적으로 좋아 보이는 공약을 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노인의 생애사가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이다. 틀니를 해 주고, 월 20만원씩 지급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문제에만 집중한 대증요법이다. 이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하품이 나오더라도 참고.'
덧붙이는 글 | "후보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소수 정당의 후보가 단 한 명의 국민을 대변한다더라도 그 후보는 조명 받아야 합니다. '갈릴레이 서클'이 기획한 <모비딕 프로젝트>는 기성언론이 비추지 않은 구석 정치를 비춥니다. 우리의 발칙하고 빛나는 생각들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