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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20, 30대 청년 6명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파견노동자로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실명 청년들에게 닥친 비극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고,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는지 파헤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시력을 잃은 청년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주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준 그의 집에서.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준 그의 집에서.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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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의 어느 날 인천 가족공원 봉안당. 서른다섯 살 전정훈씨가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위패 앞에 섰다. 9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었다. 아버지는 인천 남동공단의 한 공장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뒤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

1년에 한두 번은 꼭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이날 정훈씨의 마음은 여느 때와는 크게 달랐다. "죄송해요. 왜 저한테 이런 일이 터졌는지 모르겠어요." 정훈씨는 속울음을 삼켰다.

"제발 눈을 낫게 해주세요..."

정훈씨는 2016년 1월 인천 남동공단의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시력을 잃었다. 당시 병원은 그가 시력을 잃은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지만, 산업재해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로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은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큰 산업재해를 당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정훈씨는 시력을 잃은 후 암흑의 시간을 보냈다. 시력을 잃은 이유라도 알고 싶었지만,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두 달 뒤, 재활치료사인 정훈씨의 친척 형은 우연히 메틸알코올(메탄올) 중독 사고를 다룬 뉴스를 접했다. 노동단체에 정훈씨의 일을 전했고,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가 정훈씨의 집을 찾아왔다. 비극만 계속 이어지라는 법은 없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가 도와줬을까.

국회 기자회견장에 섰다

지난해 10월 12일 메탄올 중독 실명 피해자들이 야당 국회의원들과 노동건강연대의 도움으로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 섰다. 왼쪽에서 3번째 전정훈씨, 4번째가 김영신씨다.
 지난해 10월 12일 메탄올 중독 실명 피해자들이 야당 국회의원들과 노동건강연대의 도움으로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 섰다. 왼쪽에서 3번째 전정훈씨, 4번째가 김영신씨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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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영 노무사는 정훈씨에게 그해 1월 인체에 치명적인 고농도의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고 뇌를 다친 청년 4명의 이야기를 전했다. 정훈씨는 놀랐다.

이들과 정훈씨에겐 닮은 점이 많았다. 모두 삼성·LG전자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다쳤다. 세상에 처음 알려진 첫 번째 피해자 이현순씨가 쓰러진 날과 정훈씨가 쓰러진 날은 같았다. 다만 현순씨가 다니던 회사와 달리, 정훈씨가 다닌 BK테크는 메탄올을 사용한 사실을 숨겼다.

정훈씨는 또 다른 피해자 이진희씨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메탄올 중독 탓에 시력을 잃었음을 확신했다. 정훈씨가 쓰러지고 한 달 뒤 진희씨가 쓰러졌다. 그녀가 다닌 회사의 이름은 BK테크. 정훈씨가 다닌 바로 그 회사였다.

"8개월 만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회사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정말 많이 화가 났어요."

박혜영 노무사는 국회 기자회견에 나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정훈씨는 망설였다. 정훈씨의 동생은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 아니냐"라고 걱정했다.

"왜 시력을 잃었는지 모른 채 집에서 숨어 지내는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해 10월 12일 정훈씨는 또 다른 피해자 김영신씨와 함께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 섰다. 두 사람은 취재진 앞에서 메시지를 적은 종이를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시력을 잃었을 추가 피해자를 찾아주세요.'
'제가 위험하게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용기로 인해,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이 청년 몇 명만의 불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희미한 세상

전정훈씨.
 전정훈씨.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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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5월 정훈씨를 여러 차례 만났다. 정훈씨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정훈씨가 보는 세상은 희미하다. 사물에 눈을 바싹 가져다 대야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헤쳐 가고 있다.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종종 집 주변을 걷는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처음엔 턱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집 앞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다. 귀로 주변에 차가 있는지 살피고 길을 건넌다. 신호등의 색깔이 보이지 않는 탓에, 사람의 움직임을 보고 따라 걷는다.

그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법도 터득했다. 문자메시지 화면을 갈무리한 뒤 저장하고, 이를 최대한 확대해서 본다.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지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장애인으로서 세상의 벽에 부딪힐 때도 많다. 그가 도움을 받기 위해 인천시청 장애인복지과를 찾았을 때 공무원에게서 들은 말은 "여기 앉으세요"가 아니었다.

"장애인이 받는 혜택이 담긴 책자는 동 주민센터에 있어요. 가까운 주민센터에 가서 안내를 받으세요."

정훈씨와 동행한 박혜영 노무사가 발끈했다.

박혜영 노무사 : "정훈씨는 이미 주민센터에 다녀왔어요. 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어요.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연결된 기관이 없다면서 알아서 찾아가라고 했대요."

장애인복지과 공무원 : "주민센터 분들이 복지관 현황을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현황은 인천시청 홈페이지에..."

박혜영 : "시각장애인이라 볼 수가 없잖아요."

공무원 : "옆에 있는 분이 도움을 주시면..."

박혜영 : "혼자 사는 분이에요. 그러면 시각장애인이 도움을 요청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제야 공무원들은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 공무원들과 짧은 대화가 끝난 후, 정훈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위치를 확인해 3시간 걸어 찾아갔잖아요. 그런데 복지관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장애인 등록증을 신청하라고 알려준 기관이 없었어요. 1월에 혼자 가서 신청했어요.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어요. 제가 찾으러 갔잖아요."

동 주민센터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는 시청을 찾았다.
 동 주민센터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는 시청을 찾았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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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닌 가난을 물려받는 사람

정훈씨를 처음 만난 건 4월 2일이다. 그날 정훈씨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세습을 꼽았다. 누군가는 돈과 권력을 세습 받고, 누군가는 가난을 물려준다는 뜻이었다. 그가 그날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인생을 들려준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 2007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공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동공단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 모터에 오른쪽 팔이 빨려 들어갔어요. 신경과 힘줄이 끊어졌어요. 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어요."

아버지는 치료를 받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은 뒤늦게 아버지의 척추 3, 4번이 부러진 사실을 확인했다. 이미 때는 늦었다. 여러 합병증이 발병해, 그해 8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군대에서 막 돌아온 스물다섯의 정훈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남동생과 함께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다. 파견업체 문을 두드렸다. 그에게 왜 최저임금을 받는 파견노동자가 됐느냐고 물었다.

"주로 야간에 일했어요. 한 달 3, 4번 쉬고, 12시간 밤샘 근무를 한 적이 많았죠. 그렇게 하면 돈 좀 더 벌 수 있었어요. 230만~250만 원을 받았어요."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밤샘 근무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자고, 오후에 일어나서 밥 먹고 회사에 갔어요. 그런 삶을 살았어요. 남들은 20대 때 추억이 많잖아요. 저는 없어요. 공장에서 일밖에 안 했으니까. 놀 줄도 몰라요."

세상은 아이러니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오히려 골병이 들어 일을 못 하게 됐다. 한때 스마트폰 염료공장에서 일했다. 하루에 수천 번 기계 손잡이를 눌러야 했다. 얼마 뒤 팔을 들기 어려웠다. 2013년 일을 그만두고 2년 동안 집에서 끙끙 앓았다. 벌어놓은 돈으로 살았다.

"파견노동자라 아프다고 병가를 낼 수도 없었어요.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라는 게 회사 분위기니까, 아파도 이를 악물고 일했어요. 사실 공장에서 팔이 절단되지 않는 이상 산업재해를 인정하거나 치료를 해주지 않아요. 어떠한 보상도 못 받고, 그냥 회사를 나왔죠. 어떻게 보면 직원이 아니라, 부품이었죠."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집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2015년 9월 다시 일을 구하기 위해 파견업체 대성컴퍼니를 찾았다. 그곳에서는 정훈씨를 삼성전자 하청업체 BK테크로 보냈다.

바쁠 때는, 주6일 밤샘 근무를 했다. 공작기계를 사용해 스마트폰 부품을 만들었다. 공작기계에서는 스마트폰 부품을 매끈하게 가공하기 위해 메탄올이 뿜어져 나왔다. 공작기계에 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메탄올이 떨어지면, 정훈씨는 어떠한 보호장비도 없이 메탄올을 직접 옮겨 공작기계에 넣어야 했다. 그렇게 메탄올 증기가 정훈씨 인체에 스며들었다.

정훈씨는 2016년 1월 16일을 잊지 못한다. 토요일, 회사가 이전하는 날이었다. 정훈씨도 불려 나왔다. 낮 12시, 몸살이 난 것처럼 으슬으슬 추웠다. 세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저히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용기를 내서 조퇴했다.

집으로 오는 길, 신호등 색깔도 버스 번호판도 보이지 않다. 아무 버스나 탔다. 중간에 내려 한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오후 3시께 집 화장실에 쓰러진 채로 동생에게 발견됐다.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9년 전 아버지가 실려 간 바로 그 병원이었다.

"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정훈씨의 세상은 암흑이었다. 정훈씨는 각종 검사를 받았다. 병원은 정훈씨가 시력을 잃은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마약검사까지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회사 쪽에 알코올을 쓰는지 물었지만, BK테크 쪽은 이를 부인했다.

정훈씨는 BK테크를 운영한 안아무개씨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치료를 했다면, 지금 상태보다 낫지 않았을까요. 골든타임을 놓친 것 같아, 너무 아쉬워요."

시력을 잃은 대가, 350만 원

정훈씨가 치료받고 있을 때, 파견업체 대성컴퍼니 쪽에서 매일 찾아왔다. 대성컴퍼니와 BK테크가 서로 상의한 후 정훈씨를 찾은 것이었다. 그쪽에서 합의서를 내밀었다. 정훈씨는 그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일어난 단순 사고에 대한 위로금 350만 원을 지급한다. 추후 회사 쪽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파견업체 쪽은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350만 원의 위로금도 주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당시 병원도 정훈씨가 시력을 잃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훈씨는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합의서에 사인했다. 

시력을 잃은 대가는 350만 원. 그로부터 몇 달 뒤 박혜영 노무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까.

그는 그저 선글라스를 낀 30대 청년이었다

전정훈씨와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
 전정훈씨와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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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한창이었던 지난 4월 12일, 인천의 한 대형쇼핑몰. 전정훈씨가 선글라스를 썼다. 렌즈는 푸른빛을 반사했다. 갈색 프렌치 코트와 제법 잘 어울렸다. "오, 멋져요" 박혜영 노무사와 기자의 탄성에 정훈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훈씨는 앞서 가해자인 BK테크 운영자 안아무개씨의 첫 형사재판에 다녀온 참이었다. 정훈씨 마음은 많이 어지러웠을 것이다. 박혜영 노무사가 "어두워져야 눈이 편하다"라는 정훈씨의 말을 기억해, 쇼핑몰에 정훈씨를 데려간 것이다.

박혜영 노무사도 선글라스를 하나 골랐다. 정훈씨는 트렌치코트에 손을 찔러 넣고 쇼핑몰을 걸어 나왔다. 서로의 모습에 정훈씨도, 박혜영 노무사도, 기자도 마음껏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훈씨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는 그저 선글라스를 낀 30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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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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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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