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미술시간. 그날의 주제는 '나의 꿈'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그림을 그려나갔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표정 하나까지 세심히 그려 넣고, 박카스와 아로나민 골드 광고판도 실감나게 그렸다. 그리고 나는 초록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편의 태클을 피해 공을 몰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당시 여자축구단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뉴스를 보고 이제 때가 왔으니, 나는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비장한 꿈을 품었던 터였다. 나의 꿈은 종종 바뀌었지만 매번 진지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그린 그림을 앞에 나가 발표하다가 나는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내가 미술시간을 장난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그렸다면서. 아니라고 해봤지만 선생님은 무시하며 들어가라고 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림그리기의 즐거움은.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선생님을 찾아가 왜 그러셨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사실 그런 일은 어느 교실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이 가리고, 정답과 오답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어린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붓을 꺾었다.
"조금 더 그려보세요"기를 쓰고 달리던 서울 생활을 접고 마흔에 제주도 시골로 삶터를 옮겼다. 바랐던 느린 삶이 시작됐지만 살아보기는 처음이라 무엇으로 하루를 채울지 몰라 처음엔 생활이 엉거주춤했다. 그러다 마을에 미술치료사가 살고 있는데, 아주 훌륭한 치료사며, 주민들을 위한 워크숍을 연다고 해서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낸 건 좋았는데 막상 빈 종이를 마주하니 막막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데다가 선생님도 옆 사람도 빤히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또 아무거나 마음대로 그리란다. 아휴.. 뭘 그리나... 간신히 어찌어찌 그려서 자신감 결여의 목소리로 다 그렸다고 했더니... 쿠쿵!
"조금 더 그려보세요."운동장 열 바퀴면 끝이지 하고 마지막 힘까지 짜내 뛰었는데, 다섯 바퀴 더 돌라고 할 때의 절망감이랄까. 하지만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도 뛰면 또 뛰어지는 게 사람 아닌가. 꾹 참고 덕지덕지 덧칠을 해보았다. 길고 긴 2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워크숍에 가지 않았다.
글로 그때를 묘사하는 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 온다. 참고로 나는 평소에 목소리가 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편이며, 친구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그림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마음이 쪼그라드는 걸까? 왜 그런지 모르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위축감이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나?그 미술치료사와 나는 알고 보니 동갑이었고 마음이 통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어 사소한 일상을 나누고 삶의 고민과 새로운 계획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과 삶과 마을과 예술을 오갔다. 그러다 내가 겨우 그린 그 그림이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면 나는 쉽게 나는 동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야. 너는 미대를 나오고 화가라서 그 말이 쉬운지 몰라도 나는 예술가로 태어나지 않았어."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계급화 된 예술가에 대한 반감이 뒤섞인 말이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어느 날 우리 고양이가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동네를 헤집고 귤밭을 헤매며 찾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어서 덜컥 겁이 났다. 어디 올무에 걸린 건 아닐까? 다친 건 아닐까? 죽은 건 아닐까. 한밤중에 나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고양이가 여러 색깔의 빛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그림이 '되었다'.
그것은 되었다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그림을 그릴지 몰랐고 다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다보니 그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호흡이 깊어지고 마음에 믿음이 생겨 있었다. 고양이는 안전하며 곧 돌아올 거라는. 그리고 다음날 고양이가 돌아왔다. 다리를 절며 왔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는 달랐다. 글은 머리가 쓰는 거라면 그림은 마음이 그리는 것 같다. 그 일이 있는 후로 그림을 못 그린다는 생각이 멈춰졌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결과물에 대한 압박으로 우리는 그리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 기쁨, 충만함을 잃어버렸던 거구나.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 누구나 알았던 그 즐거움을 빼앗겨 버렸던 거구나. 우리는 예술가로 태어난 게 맞겠구나.
변화는 올까?내가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나는 우리가 모두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예술가는 자신의 삶 전체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자,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한 평생을 쏟아 부어야 이룰 수 있는 완성된 결과물이나 숙련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예술가는 삶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사람들이고,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행위들로 채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 40p.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이 같은 예술이 쓸모없는 행위이지만, 통제가 안 되고 예측 불가능한 안티프레질한 삶의 영역에서는 예술이야말로 우리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온전케 하는 힘이다. 즉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르고, 언제 사랑이 떠나갈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궁극적으로 통제 불능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을, 아름다움을,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케 하는 힘이 예술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예술적인 영감으로 가꾸고자 하는 사람들, 삶의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 51p.
그 뒤로 나는 미술치료사 친구의 워크숍 도우미로 참가해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 나와 사람들은 그림으로 자신이 감춰두었던 마음과 만나기도 하고, 아무에게 말하지 못했던 응어리를 처음으로 털어놓으며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지지와 응원을 받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것은 그림이 가진 힘과 진실한 안내자가 만나 일어나는 작은 기적들이었다.
<변화를 위한 그림일기>는 정은혜가 그림 그리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자신과 만나기를 두려워하며 갈망하는 것의 은유 같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두려움을 넘고 자신을 만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실험하며 찾은 길이다.
어제 한 후배가 SNS에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한 글을 보고는 "변화가 진정 옵니까?" 하는 글을 남겼다. 그 짧은 질문에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그 후배의 질문은 세상의 변화, 자신의 변화를 다 포함한 것이겠지만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애를 쓴 이가 벽에 부딪혀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변화는 옵니다. 당신이 변화를 바란다면. 이 책은 그 길을 도와줄 거예요."
* 정은혜의 개인 블로그
www.flyingfish.kr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혜영은 <변화를 위한 그림일기> 저자인 정은혜의 친구로 지난 5년간 제주도 시골마을에 함께 살며 미술치료의 현장을 도우며 경험했습니다. 이 글은 글쓴이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