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김병철, 안선희)는 10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해외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모아 책 <그래서 나는 한국을 떠났다>를 썼고 그중 일부를 공유한다.
김희찬
- 거주지 : 호주 시드니
- 우박 피해차량 수리사
- 호주 거주 12년(영주권자)
*모든 내용은 2018년 3월 인터뷰 시점이 기준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었던 한국 생활
대학에서 도자기 공예를 전공한 희찬씨는 선배들의 공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첫째 아이가 태어나자 도자기를 빚는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결국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도자기를 포기하고 마루 시공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임금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한국을 떠나서 새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 이민을 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마루 일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좋았어요. 팀에서 인정받아서 2년 만에 '새끼반장'까지 됐어요. 그런데 월급이 밀리기 시작한 거예요.
건축업은 경제 흐름에 따라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요. 그러면 하청에, 하청에, 하청에 제일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타격을 제일 심하게 받아요. 돈을 위에서부터 받잖아요. 커미션은 계속 빠지고 3개월을 일했는데 50만 원, 100만 원 받으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가 있는데 돈은 못 벌고, 제 신용카드에서 현금서비스 받아서 '돈 받았다'고 아내한테 거짓말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온 건데 불과 1, 2년 만에 돈도 못 갖다 주게 된 거예요. 창피한 일이지만 부모님이 장도 봐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가장인데 그런 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 (하청) 구조가 싫은데, 어려운 상황이 겹치니까 (한국의) 모든 게 다 싫어졌어요. 또 다른 기술을 배워야겠다, 한 번 더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는 와중에 형과 부모님이 '아버지도 옛날에 호주 가는 걸 생각했었으니까 한 번 가보는 건 어떻겠니?' 하셨어요. 일도 새로 배워야 하고, 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잖아요. 어차피 그럴 바에는 '한국을 떠나자'가 된 거죠."
- 이민은 어떻게 준비를 하셨어요?
"아버지가 6남매인데요. 80년 초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해서 네 형제가 (시드니에) 살고 계셨어요.
이민 준비는 1년 반 정도 한 것 같아요. 2003년쯤 알아보러 호주에 왔어요. 매형이 청소를 하는데, 새벽에 같이 나가서 변기 닦고 쫓아다니면서 열흘 정도 있었어요. 그리고 확실히 결정한 거죠.
그때 이민 변호사, 법무사 만나서 어떤 방법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알아보고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힘들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 '시드니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친척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다 반대했어요. '너 힘들지? 너 나이에는 힘들다. 근데 왜 여기 와서 두 배로 고생하려고 하냐? 영어해야지. 문화 적응해야지.'
매형한테도 좋은 얘기를 듣지는 않았어요. '너 꼭 와야 해? 여기 쉽지가 않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혼자 해야 하고, 신세지면 안 되고, 어려움도 이겨내고 참아야 한다고요."
우박이 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희찬씨는 친척을 통해 우박 피해차량을 수리하는 분을 소개받았다. 생소한 땅에서 완전히 새 출발을 하는 만큼 정말 열심히 배웠고 성실하게 일했다. 12년이 지난 지금 희찬씨는 유럽, 미국 등으로 출장을 다닐 정도로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 우박 피해차량 수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막내 작은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 분을 (457비자 스폰서로) 소개해주셨어요. (2005년에) 혼자 먼저 호주에 와서 그분을 뵙고 결정했어요. 그때는 좋고 말고도 없고, 호주로 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어요. 변기를 닦아도 상관없고,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호주 온 지 4개월 후에 취업비자(4년)가 나왔어요. 4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일하면, 2년 후에 영주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죠. 그분이 '꼭 4년을 일해줘라. 그러면 내가 영주비자 할 수 있게 도와줄게'라고 하셨고, 전 그 약속을 지켰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이 일이 한국에서 생소한 이유는 한국에 우박이 잘 오지 않아서예요. '덴트 리페어(Dent Repair, 찌그러진 차 복원)'는 들어보셨을 거예요. 우박이 많이 오는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뉴질랜드가 시장이 커요.
큰 덴트 리페어 회사는 4만~5만대를 수리할 정도로 규모가 커요. (우박 온 후) 빠르면 1주, 느리면 2주 후부터 차가 정비고에 들어와요. 제 자리(Bay)가 생기면 연장 갖다 놓고 순서대로 수리하는 거예요. 인테리어를 다 뜯고 연장을 이용해서 패널을 펴는 거죠. 손기술이에요."
- 우박이 그렇게 큰가요?
"야구공만 해요. 미국 텍사스는 소프트볼 정도고 호주는 테니스공, 에그, 골프공 사이즈로 표현해요. 테니스공 사이즈면 저희가 못 고치고요."
- 유럽에도 이 일을 하러 가는 건가요?
"우박이 크게 오면 그 나라에 있는 기술자만으로는 안 돼요. 외국에서 와야 해요. 3개월짜리 워크퍼밋(Work Permit)을 줘요. 일하다 보면 미국, 캐나다, 유럽에도 친구가 생겨요. 같은 공간에 일하다가 인사도 하고, 연장 얘기도 하면서 친해지는 거죠. 커넥션을 만드는 게 되게 중요해요. 나중에 서로 불러주기도 하거든요."
- 지금 직업은 만족하세요?
"만족해요. 첫 번째 이유는 차곡차곡 이 일을 하면서 나름 이름도 알려졌고, (기술로) 인정 받으니까 좋아요. 두 번째는 수입이 나쁘지 않아요. 세 번째는 어디 속해서 (고용계약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좋아요. 한국말로 하청 계약이에요. 그러면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예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우박이 안 오면) 어떨 때는 한두 달도 쉬어요. 날씨 보면서 하는 우산 장수이기 때문에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안하죠. 하지만 그럴 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아요. 물론 안 좋은 부분도 있어요. (출장 가면)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요. 가족을 1년에 4개월밖에 못 보는 경우도 있어요."
- 호주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회사에서 영업을 좀 해 보자고 해서, 제가 자동차 전시장에 명함을 막 뿌리면서 다녔어요. 영어도 잘 못할 때라 좀약 장수 취급도 당했죠.
제가 이렇게 적고 다녔어요. 'My name is Paul. I am from Korea. I can't speak English. But I can help you. Give me a job please. I am very specialist for fix dent.'(제 이름은 폴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주세요. 저는 덴트 수리 전문가입니다.)
지금 보면 얼마나 웃겨요. 딱 가면 손님인 줄 알고 딜러들이 막 인사하잖아요. 'Hi, How are you?'(안녕하세요.) 그러면 전 'Nice meet you. I am Paul.(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폴입니다.)' 막 읽는 거예요. 제 발음도 부정확하니까 'What? What?(뭐?)'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애는 (종이를) 뺏어요. '뭐야?' 하고 보더니 '아, 덴트 가이(Dent Guy)' 그러더니 일 없다고. (제가) 영어를 못하는 걸 알고 어떻게 하냐면 'Fuck Off(꺼져)' 하면서 욕도 해요. 사람이 영어를 못해도 눈치는 막 빨라지니까.
도시락도 제가 싸고 다녔어요. 돈 아낀다고, 분홍색 소시지 아시죠? 식품점에 가니 그게 3, 4달러에 팔더라고요. 굵은 걸 잘라서 계란에 부쳐서 밥이랑 싸갔죠.
공원에 주차하고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륵 나는 거예요. 내가 이런 고생을 하려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재수 없으니까 꺼져'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여기 왔나...
아... 막 서럽더라고요. 근데 깡도 많이 생겼어요. 꾸역꾸역 도시락 까먹고 또 돌아다녀요. 그러면서 개인적인 거래처 몇 개 만들게 되더라고요. 하다 보니까."
한국과는 조금 다른 호주의 교육
호주는 한국처럼 모두가 대학을 가려는 분위기가 아니다. 기술전문학교를 나와 목수, 배관공, 용접공 같은 기술자가 돼도 처우가 좋아 꽤 큰 돈을 모을 수 있다. 높은 세율과 탄탄한 사회복지 제도 덕에 빈부의 격차도 심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교육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부지만 초등학교 영재반, 특목고가 있고 엘리트 계층 자녀들이 주로 진학하는 명문 사립학교도 존재한다.
- 집에 있을 때는 어떻게 지내세요?
"집에서 쉴 때는 오전 7시쯤 일어나고, 아이들 데려다주는 일이 많아요. 한국처럼 가까운 곳에 학원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아이들이 클럽 활동을 하나씩 하고 있는데, 오후에 데려다주는 것도 웬만하면 제가 하려고 해요. 제가 없을 땐 아내가 다 하니까요."
- 학교 수업 외에 클럽활동이 다양하게 있나요?
"학교에서 많이 시켜요. 첫째는 야구를 하고 둘째는 태권도 다니고요. 한국과는 달라요. 저희 형이 (한국에서) 야구를 해서 학원 스포츠를 잘 알아요. 인기 종목이 농구, 야구, 축구예요. 그걸 열살 전후에 시작하거든요.
한국 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에 다른 걸 많이 해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정해 버려요.
야구를 잘 못하는데도 시작은 했고, 이미 중학교 과정을 공부 안 하고 야구만 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놓고 고등학교, 대학까지 끌고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 많은 사람 중에 프로야구 주전까진 아니라도 입단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는 말이죠.
여기는 그렇게는 운동을 안 시켜요. 클럽활동하다가 (운동을) 잘 하면 코치가 제안해요. 동네에서 카운슬(Council) 연합으로, 카운슬에서 시 연합, 그 다음에 주 연합. 그러다가 국가 대표가 되는 거예요. 여기는 이런 식이에요. 그렇다고 공부 안 하는 것도 아니에요. 클럽활동으로 하는 거니까.
한국인 성인 야구클럽에서 뛰는 고3 학생이 있어요. 그 친구는 대학 입학시험 전주에도 와서 경기를 뛰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 교민들은 그래도 대학을 보내려고 하죠? 사교육 시장도 있잖아요?
"대학이 뭐예요. 초등학생부터 OC(Opportunity Classes: 5, 6학년에 시험으로 들어가는 일명 영재반), 셀렉티브 고등학교(Selective High School: 일종의 특목고). 그 리그가 따로 있어요.
(이민자이기 때문에 자녀가 몸 쓰는 일 안 하고 편하게 살기 원해서) 한국 사람들이 공부를 잘 해요. 아버지 세대와 같이 와서 호주에 20, 30년 산 제 또래 분들 중에 변호사도 많고 의사도 많아요."
- 자녀분들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은 거의 여기서 한 거잖아요. 아이들은 영어권으로 생각하는데, 부모는 영어가 서툴러서 차이를 느끼는 이민자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거 미국 쪽에서 들으셨죠? 미국은 교육 시스템이 호주와 완전히 달라요. 혹시 호주에서 다문화라는 얘기를 들어보셨어요? (네) 미국에선 들어보셨어요? (...)
미국에선 학교 교육부터 시작해서 '미국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해요. 때로는 그걸 보여줘야 해요. 대표적인 게 군대를 가는 거예요. 군대를 다녀옴으로써 비자를 받거나 혹은 불법으로 있지만 사면을 받기도 하거든요.
친척이 미국 댈러스에 살고 저도 미국에서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데, 미국 학교에서 다른 말을 쓰면 따돌림을 당하는 첫 번째 이유가 돼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조차 그걸 배격하게 돼요. 미국엔 다문화라는 정책이 애초에 없어요. 단지 이민법이 강화되고 약화되는 것이지.
반대로 호주는 다문화 정책이 있어요. 법으로 지향하고 그걸 좋아해요. 지역 축제하면 각 나라의 음식 만드는 부스를 만들어요. 아이들 학교 선생님이 상담할 때 한국말을 얼마나 쓰는지 물어봤어요. '집에서는 항상 쓴다'고 하니 '계속 사용하라(Keep Going)'고 해요. 너네 고유의 문화니까 절대 버리지 말라고요. 2, 3가지 언어를 하는 건 아이에게도 좋은 거라고.
미국과 다른 점은 그거라고 생각해요. 틀린 건 아니고 많이 다르죠."
- 자녀들이 한국에서 자랐으면 지금과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언젠가 EBS <대치동의 아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봤어요. 학원에서 도서관 가는 봉고차에서 아이들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질문이 '어떤 친구를 만나고 싶어요?'였는데 '공부 잘 하고 성적이 저와 비슷한 친구요'라고 대답했어요. 그 인터뷰를 보고 '나만 생각해서 (호주에) 왔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경쟁이 심한 건 좀 많이 안타까워요.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여기도 경쟁을 해요. 여기라고 아이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천국같은 삶을 산다고 전 절대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들이 갖는 스트레스가 또 있어요."
행복한 이민 생활을 위한 조건
이민을 떠날 땐 한국이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막상 떠나고 나니 그리운 곳 또한 한국이었다. 그렇기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희찬씨는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리고 외국에서 12년을 살아보니 불행한 이민의 사례도 숱하게 지켜봤다. 그는 이민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신이 그 나라와 맞는지 꼼꼼하게 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 사전 인터뷰에서 아이들도 '아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여기 아이들은 부모 직업에 대한 편견이 크지 않아요. 물론 얘들도 알아요. '(저 사람) 변호사래. 대학 강사래' 그렇지만 '우리 아빠 빌더(Builder)야', '우리 아빠도 루프(지붕) 일만 하는데'라고 해요. 그렇게 해도 사는 수준이 비슷비슷하니까요.
'우리 아빠는 차 정비하셔. 맨날 손 더러워'라고 하거나, '우리 아버지 택시하는데 좀 창피해' 하진 않아요. 오히려 '우리 아버지 택시 드라이버야!'라고 하죠.
그게 너무 좋아요. 제가 몸 쓰는 일하고 손이 더럽고 상처가 많아요. 그런 거에 대해서 '아빠는 손톱 끝이 더러워' 그런 얘기 전혀 안 하니까. '오 아빠 일 많구나. 우와~' 이러죠."
- 호주에서 정착을 못하는 경우는 어떤 게 있을까요?
"계획 없이 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나이가 좀 있는 부부가 왔었어요. 아이가 경쟁 속에서 공부 안 하니까 아이를 케어하는 아내는 너무 좋대요. 근데 남편은 여기 삶이 싫은 거예요. 한국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가 돈 많이 모아서 왔는데, 친구도 없고 술 마실 사람도 없으니까 싫은 거예요.
돈은 계속 까먹는 거잖아요. 뭐라도 해야 하는데 기술은 없고 남 밑에 들어가는 건 싫고. 한국적 문화가 아직 깔려 있는 거잖아요. 그걸 빨리 버려야 하거든요. '나보고 식당을 하라고?' 이런 분들도 많아요.
그러다가 갈등이 생기면 이혼하고 남자만 한국으로 가는 경우가 있어요. 여자들은 대부분 안 간다고 해요. 근데 남자들은 못 견디고 떠나는 분들이 은근히 있더라구요."
- 한국이 더 잘 맞는 사람도 있다는 거네요?
"'한국은 너무 안 좋고 헬조선이다. 나가면 무조건 다 된다.' 이렇게 볼 건 아니에요. (나라마다) 장단점이 있는데 너무 안 좋은 쪽만 몰아가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떠나온 배경이 있잖아요. 저는 떠날 때는 한국이 싫어서 떠났어요. 근데 떠나고 나면 그리운 곳이에요. 제가 태어났고, 자랐고,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둘까지 가진 곳이잖아요.
저는 호주에 살지만 '호주나 캐나다에 가면 무조건 잘 된다.' 그렇게 비치는 것도 좋게 보진 않아요. 주변에서 굉장히 힘들어하는 모습도 많이 봤거든요. '이민이 답이다. 다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호주]
- 기본 정보
o 인구 : 약 2394만명(2015년 6월)
o 수도 : 캔버라(Canberra)
o 면적 : 769만㎢ (한반도의 35배)
o 민족구성 : 앵글로색슨 80%, 아시아, 원주민(애보리진) 및 기타 20%
o 종교 : 기독교 67%, 무종교 26% 기타 7%
o 언어 : 영어
출처 : 외교부
- 이민 정보
o 주호주 한국대사관 이민정보
o 주대한민국 호주대사관 워킹홀리데이 정보
글쓴이의 한마디 : 저희가 만난 분들의 이민 과정은 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고, 함부로 재단하거나 동경(혹은 훈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라는 정도의 시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 <그래서 나는 한국을 떠났다>에서 다른 이민자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요약본입니다. 인터뷰 전문은 제 블로그(https://brunch.co.kr/@movemovemove/43)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