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추석은 돈이 내 호주머니를 스쳐 지나가는 날이었다. 친척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았지만, 우리 아빠만 시골에 눌러살던 터라 추석이면 늘 우리 집으로 도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항상 마지막 일정으로 내 손에 흰 봉투를 쥐여 줬는데, 그 안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당시 모든 계산의 척도였던 떡볶이 그릇 숫자로 환산할 수도 없는 금액이라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3번 정도 흰 봉투를 받았을 때부터는 그들에게 시큰둥하게 머리만 까딱거린 것 같다. 어차피 그 돈은 엄마가 '삥뜯어' 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흰 봉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엄마와 대판 싸웠다.
"엄마, 왜 자꾸 내 돈을 달라고 하는데?"
"가시나야, 그기 니 돈이 아닌 기라."
"그러면 이게 엄마 돈이라꼬?"
"고건 아이지만, 우쨌거나 그기 니 돈은 아이라 안 카나."
봉투에 빳빳한 지폐가 너무 많아서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 손에 그걸 건넨 이상 소유권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돈을 진짜 갖고 싶었다.
사실 그 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으려고 한 건 아니다. 당시 엄마가 내게 용돈으로 줬던 지폐는 늘 농민들의 땀으로 찌들어서 꾸깃꾸깃했다. 그리고 아무리 말끔하고 멀쑥한 지폐라도 엄마의 몸뻬 안에 있는 돈주머니를 한 번 거치고 나오면 만신창이로 변해 버렸다.
그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 빳빳한 지폐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말쑥한 지폐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도시 친척들처럼 촌티와는 거리가 먼 세련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드디어 마음에 들어 있던 말을 봉투를 건네는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11살이 됐으니 그 정도의 비즈니스적인 대화는 서로 나눌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엄마가 이 봉투를 항상 뺏어간다구요. 제게 줬으니 제 돈인 거죠? 엄마 야단 좀 쳐 주세요."
시골에 눌러앉은 대가
어디 혼 좀 나 봐라, 싶었는데 그들은 실실 웃고, 슬슬 눈치 보며 얼른 자리를 떠났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엄마는 그 흰 봉투의 의미를 내게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빳빳한 지폐는 아빠가 시골에 눌러앉은 대가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던 아빠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자, 고향을 떠나 있던 일가친척들 모두 맹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는 누가 키우냐?"라는 논리로 아빠의 출사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아빠는 문중의 선산과 묘를 관리하고, 시제를 비롯한 온갖 제사를 지내며 결혼도 하고 농사도 지었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우리 집은 가난해지는데, 고향을 떠나 도시에 자리를 잡은 친척들의 집에는 나날이 빳빳한 지폐가 쌓여 갔다는 것이다.
"그기 다 너거 아부지가 시골에서 사는 몸값 아이가."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아버지의 인생을 시골에 묶어 놓은 대가치고는 말도 안 되는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문중을 위해 일한 수고비와 자신들의 미안함을 더한 대가로 표현되기에는 턱도 없는 액수였다.
작년부터 농업·농민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해 '경남 농어업인 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무슨 공익적 가치를 실천한다는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농업·농촌·농민은 식량 안보, 자연 보전, 농촌 공동체 유지, 문화와 전통의 보존,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 유지, 수자원 보존, 가뭄이나 장마 피해 방지, 토양 보존 등 경제적 가치로 따질 수 없는 공익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있다.
작년에 처음 1년에 30만 원이 지급되는 '경남 농어업인 수당'을 받았을 때, 갑자기 도시에 사는 친척들이 내 손에 쥐여 준 흰 봉투가 떠올랐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빳빳하기만 할 뿐 턱없이 부족하네, 라고 생각했던 4학년 추석 때 내 모습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