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올해로 창간 24주년을 맞았습니다.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 또는 글 쓰는 활동을 통해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시민기자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
종종 벅차고 조급해질 때가 있다. 중학교 교실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쓴 글을 읽으면 그렇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지만 어릴 적 엄마와 먹었던 길거리 음식을 추억하며 원망이 아닌 큰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글을 만날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손주인데 그 전화를 못 받은 미안함과 슬픔을 표현한 글을 만날 때, 가족의 불화로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위태로운 심경을 토로한 글을 만날 때,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웃으며 인사해 주시는 학교 보안관님에 대한 감사의 글을 만날 때, 축구부 남학생의 절절한 이별 이야기를 만날 때.
삼라만상이 들어있는 학생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이 귀한 마음들을 이렇게 쉽게 알아도 되나? 그들이 겪고 있는 슬픔과 힘듦을 어떻게 덜어 줄까?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명 한 명의 긴 글에 정성스럽게 다시 긴 댓글을 써주는 것뿐이지 않는가? 같은 마음이 들어 종종 벅차고 조급해진다. 요술 지팡이로 뾰로롱 '내가 너의 문제를 해결해 줄게' 외치며 휘두르고 싶다.
얼마 전 국어시간에 쓴 글로 <오마이뉴스>에 기고하여 청소년 시민기자가 된 제자, 권대환 학생의 기사 '내 보호자는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표현할 기회가 생겨서 더 좋다."
속 깊은 대환이의 글에 답이 있다. 표현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국어 교사인 나는 표현하도록 판을 벌여주어야 한다는 것.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교실에서 나는 자주 회복탄력성을 말한다. 세상 누구나 힘들고 좌절한다. 그런 순간이 살면서 꼭 온다. 그럴 때 쓰러져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가 가능하면 쉬어라. 쉬고 버텨라. 내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없는 힘듦이라면 그냥 버티다 다시 꼭 일어나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을 살아주렴.
힘이 조금 남는다면 글을 썼으면 좋겠다. 잘 쓰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만 했으면 좋겠다. 내가 읽어줄게. 너의 글을 읽는 독자를 만들어 줄게. 교실의 글쓰기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확장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용기 내어, 마음을 다해 표현한 글에 독자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는 벅참, 그것으로 툭툭 털고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중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시키고 시민기자에 도전해 보자고 말을 뗄 땐 좀 더 가볍게 접근한다. "얘들아! 선생님 원고료 볼래? 이거 봐라. 엄청 많지? 이거 다 <오마이뉴스>에 글 써서 받은 원고료다. 너희들도 받을 수 있어. 한 번 써볼까?" 돈으로 꼬셔 놓고 글쓰기를 시작한다.
모든 학생이 교실에서 글을 쓴다. 완성한 글은 희망자에 한해 나와 일대일로 기사로 고쳐쓰기를 진행한다. 혹은 학생이 희망하진 않았지만 좋은 이야기다 싶으면 내가 학생에게 기사로 내보내자고 설득하기도 한다.
돈으로 꼬셨지만 돈 때문은 아닌
그렇게 첫 청소년 시민기자가 된 학생은 말을 더듬는 학생이었다. 주말에 조부모님 댁에 가서 농사를 돕는 이야기를 썼다. 핸드폰과 한 몸인 청소년은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깨달았고, 농삿일로 몸이 고되면 핸드폰 할 체력도 없다는 사실을 기사로 재미나게 썼다. 나는 녀석이 말을 더듬는 걸로 위축되지 않았으면 했다. 말이 조금 어려우면 글로 하면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첫 시민기자의 글이 오마이뉴스 메인에 나가고 녀석과 반 친구들, 옆 반 친구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 일가친척들까지 한마음으로 기사에 댓글을 달고 '좋은 기사 원고료'로 응원을 해주었다. 학생은 받은 원고료로 반에 햄버거와 음료수를 돌리며 모두의 즐거운 이벤트로 마무리 지었다.
두 번째 시민기자는 지금 근무하는 강원도 두메의 작은 학교에서 나왔다. 학교 앞 도로에 인도 없이 차도만 있는 실태를 알리며 조속히 인도가 설치되어 곧 입학하는 동생과 함께 안전하게 등교하기를 바란다는 기사였다.
[관련 기사 :
삼척 사는 중학생인데요, 등굣길이 이모양입니다 https://omn.kr/218e0
기사가 크게 호응을 얻으며 국토교통부에서 바로 인도 설치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고 반년 만에 공사가 완공되어 우리끼리는 조촐한 기념파티를 했다.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 것은 덤이다. 기사를 쓴 전진선 학생은 작년 겨울 인도가 설치된 후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후속 기사를 썼다.
[관련 기사 :
삼척 사는 중학생인데요, 등굣길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https://omn.kr/26t0t]
이 일로 우리 모두는 정말이지 내내 즐거웠다. 그 사이 교장 선생님이 바뀌고 지역의 면장님이 바뀌어도 우리 진선이가 여기 길을 놓았다며 자랑하고 축하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은 글의 강력한 힘을 알게 되었고 연대의 소중함도 몸소 느꼈다.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이렇게 마음을 모아줄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결국엔 같이 사는 것'을 마음에 새겼으리라.
세 번째 시민기자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위 기사를 쓴 진선이와 같은 반 친구인 권대환 학생은 지난 겨울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
[관련 기사 :
내 보호자는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https://omn.kr/26tyz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랄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반드시 부모님의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 대환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으로 이렇게 자랑스럽게 자랐으니 말이다. 학생들과 매일 만나는 나 역시 교실에서 그 '사랑'을 마구마구 흩뿌리리라 다짐해 본다.
얼마 전 2024학년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3월부터 중학생이 되는 우리 학생들에게 난 오늘도 역시 선배들의 기사를 자랑하며 예비 시민기자가 되어보자 부추겼다.
"어때? 재밌겠지? 같이 말하고 듣고, 글 쓰고 읽으며 손잡고 함께 살아보자 얘들아. 그럼 힘들 때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누군가의 손을 잡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