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내가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다.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이지만 해를 넘겨 오늘 한다. 그만큼 건강검진을 하는 것이 걱정스럽다는 말이다. 건강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건강검진을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걱정이 하나 둘씩 더 생긴다. 검진 후 어떤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다. 검진 과정에서 용정이나 물혹이나 경동맥이나 뇌 동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주위에서 종종 들린다. 그래서 검진에 대한 불편함이 생긴 것이다. 나이 탓이다.
요즈음은 의대생 증원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의사 2000명 증원과 의사들의 파업에 대하여 두 가지 마음이 든다.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한데 한쪽에서는 밥그릇 싸움으로 한 쪽에서는 의사의 질적 하락으로 보는 시각이 그렇다. OECD 보건통계(2023)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인구 1000명 당 의사수는 2.56명이다. 회원국들 중에 하위권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의료서비스 차원에서 본다면 공공의료나 지역간의 불균형이 매우 심한 편이다.
그렇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병원이나 의사에 대한 생각은 고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의술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직업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가진 육체적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로 의사에게 투영되기도 한다. 질 좋은 진료와 환자의 이런 두려움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이번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의 불안감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복잡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노인들이 늘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병원 방문에 대한 불편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쁜 일인가? 아니면 슬픈 일인가? 어느 여성학자는 나이 듦에 대한 미학을 이야기하였지만 나에겐 전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 앞으로 살기 어려운 나이가 된 후의 느낌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다. 이제 하나둘씩 버리면서 생의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더욱 커진다. 건방지게도 아니 어쭙잖게도 말이다.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이 풍성한 여름을 잊기 위해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떠나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겨놓는 지혜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나무가 겨울의 시련을 오히려 내려놓으면서 맨몸으로 맞이하는 그 나무의 현명한 선택을 이제는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일까?
나무가 보여주는 내려놓음의 미학
자만인지는 몰라도 나의 삶이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온 삶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리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나에게 자꾸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 등 뒤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나를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진작부터 생각을 해왔건만 막상 60살을 막 넘기다 보니 너무 부담스럽다. 그래도 가끔 떠오는 것이 있다. 바로 과거의 화려한(?) 꿈들이다. 성취되지 않은 바람은 늘 추마 끝에 걸린 고드름처럼 길지 않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보라색으로 장식된 성당의 제대초들이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자신을 태우면서 세상을 밝히는 초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passion)을 생각하면 보라색 초의 희생은 고통이라고 생각해 왔던 지난 시절이 이제는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반전의 짜릿함을 준다. 수난의 고통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계기가 바로 세월의 두께를 하나 더 둘러쓰는 것이다. 그 두께가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나는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희생은 고통이자 기쁨으로 승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달래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까?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이런 의문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이제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야 할 시간이 많지 않은 내가 뒷방에 늙은 할아버지 같은 생각만 하는 나 자신이 제대로 된 것일까?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다리 밑 휴식처에 있는 어르신들이 하시는 철저한 인생 마감 준비운동에 내가 덩달아 어깨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생의 마무리를 미리미리 준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고민한다고 저렇게 준비한다고 아름다운 죽음을 거룩하게 맞이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죽음은 어차피 비극이고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마지막 숨을 막 몰아쉴 때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일까? 이별일까? 그리움일까? 아니면 고통이나 두려움일까? 하기야 죽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비움
이런 마음의 미망(迷妄)들이 한동안 내 뇌리를 지배하더니, 일주일 전에 건강검진을 하고 취업을 위해 채용 신체검사서를 받아들고 나니 뇌가 하얗게 비어버린다. 그래 맞아. 내가 죽는 순간에 나의 뇌를 하얗게 비워 놓는 것이 바로 나의 영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내 영혼을 괴롭히고 수없이 더럽혔던 생각과 행위를 다 지워버리는 것이 바로 죽음 바로 직전에 해야 할 마지막 나의 일이다. 뇌의 모든 기억들을 휴지통에 비워놓고 다시 포맷을 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작업이 바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나로 인해 빚어진 온갖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고 닦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기억을 백지상태로 비울 수가 있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하기보다는 잊어버리기 더 어렵다고 한다. 흔히들 망각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잊어버리기가 어렵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을 넘어서는 시간은 인생의 덤이 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의 마무리 설계는 이제부터
건강검진하고 별스러운 생각을 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쩌랴? 마음 따라 마음 길을 갈 수밖에. 다시 받아야 할 건강검진을 맞이하는 자세를 조금이라도 정숙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작은 화두(話頭)라도 붙들어 잡고 잠 설쳐가며 끙끙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뼈다귀 하나에 생명을 거는 강아지처럼 살아온 지난 세월과는 달리, 기름진 뼈다귀를 보고서도 초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혹시 저승길 떠나는 길에 놓여있는 유혹과 미혹에 눈멀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nty1218에도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