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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과 돌봄,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를 원하며 관심을 가져오던 나에게 네덜란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라였다. 중증 치매인들의 마을 호그벡에서 여유롭게 광장에 앉아 노는 주민들의 모습이 그랬고, 지난 2월 93세의 전 총리 부부의 안락사 소식도 그랬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3년째 살고 있는 김선영씨의 책 <물론이죠, 여기는 네덜란드입니다>를 읽게 되었다. 그녀는 네덜란드를 자유와 평등, 관용이 마치 햇빛처럼 또 공기처럼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이곳에는 다양한 인종, 종교, 이념이 존재하지만, 차이에 따른 극단적인 갈등 상황은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물론이죠, 여기는 네덜란드입니다, 김선영(지은이)
 물론이죠, 여기는 네덜란드입니다, 김선영(지은이)
ⓒ 에이엠스토리(am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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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 동성애, 미혼모, 낙태, 성매매 등 많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앞장서 포용했던 나라, 다른 나라에서는 반대 시위와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따르는 성적 소수자들의 행사에 전 세계 여행객들이 모여 축제를 즐기는 나라,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 그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성매매 종사자들을 인권 유린이나 폭력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인신매매를 방지하기 위해서 2000년부터 성매매를 합법화했다. 종사자들을 노동자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고, 90%가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 성매매? 노조 가입? 한국 사회에선 불편한 시선을 던질 만한 것들이 네덜란드에선 자연스럽다. 공영방송에서는 전라로 성 문제를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시민들은 성에 대한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으로 인식할 뿐이다.

네덜란드는 살벌하던 종교전쟁 시기에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를 명문화해서 종교에 상관없이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본국에서 탄압받던 철학자나 종교인, 자본과 기술력을 갖춘 유대인, 혁신적인 기업가 등 많은 개인과 집단들이 유입되었고, 이것이 그 나라가 번영할 수 있는 기틀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동성애자들이 망명을 원하는 1순위 국가이기도 하다.

동양에 비해 서양은 개인주의적이라는 단순한 나의 편견도 책을 읽으며 많이 깨졌다. 한 마디로 네덜란드는 '이웃사촌' 문화가 살아있는 나라라고 한다. 이사를 가면 이웃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집으로 초대해서 커피와 와인을 대접하는 것이 관례이고, 생일파티에도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이웃을 초청하는 경우도 흔하다. 여행 갈 때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이웃에게 자신의 집 열쇠를 맡기기도 한다.

이웃들의 자발적 관심과 보호는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든든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인의 삶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 이런 존중이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왜 결혼 안 하니?'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아야 하는 우리 사회와는 참 다르다.

큰 회사의 사장이 행사장에서 혼자 책상을 옮기는데도 주위의 직원들은 아무도 돕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풍경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가장 득 보는 사람이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나의 지론에 딱 맞는 풍경이라 쌓였던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죽음의 풍경 또한 우리에게는 무척 낯선,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들로 채워진다. 아래의 두 경우는 저자가 인터뷰하면서 접한 안락사 이야기다.

1) 손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중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여행 잘 다녀오렴. 나도 이번 삶의 마지막 여행을 하련다". 손녀는 할머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할머니와 함께 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초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던 할머니의 음성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순간에 중심이 되어주었다.

2) 암 투병 중이던 그의 아버지는 안락사 날짜를 정하고 나서 자신의 장례식 초청장을 직접 디자인했다. 역시 암 투병을 하셨던 어머니는 자신이 책 읽고 차 마시고 이웃과 담소를 나누던 거실 의자에 앉아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삶을 마쳤다. 그는 자신도 때가 되면 안락사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와 관용의 나라에서 생각의 다양성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의 윤리학 교수 테오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자율성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연대, 인내, 최선의 노력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가 거기에 가려진 느낌이다.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낼 방법을 더는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살은 자율성의 종말이다." 그가 검토한 안락사 500건에서 10%는 '외로움'에 관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갈수록 우려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중앙일보 2015.3.1.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아직 안락사가 도입되지 않은 나라에 사는 나 역시 두렵다.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 공기처럼 햇빛처럼 일상에 스며있는 네덜란드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삶과 죽음의 풍경들을 만들어낼지 두렵다. 국가가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 선택을 독려한다는 내용의 영화 <플랜 75> 역시 그런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 같다.

책을 덮고나니 여행 욕구가 크지 않은 내가 네덜란드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삶을, 죽음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을 언젠가 꼭 하고 싶어졌다. 교과서에 써진 자유, 평등, 관용이 아니라 햇빛과 공기 속에 녹아있는 자유와 평등과 관용의 맛을 보고 싶다.

물론이죠, 여기는 네덜란드입니다

김선영 (지은이), 에이엠스토리(amStory)(2017)


태그:#물론이죠여기는네덜란드입니다, #안락사, #성매매,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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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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