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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출신 김승욱씨의 첫 시집 <손금을 본다>.
 춘천 출신 김승욱씨의 첫 시집 <손금을 본다>.
ⓒ 파란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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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보강 : 21일 오전 10시 40분]

춘천은 '안개의 도시'다. 춘천이 '안개의 도시'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얻은 것은 소양강 등에 댐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한다. 소양강댐이나 의암댐 등으로 인해 안개가 도시를 덮는 일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안개의 도시가 되자 마을도, 풍경도, 기억도 함께 잠겼다. 

최근 <손금을 본다>(파란)라는 첫 시집을 상재한 김승욱(56) 시인도 "호수 속 수몰된 마을에선 숨바꼭질이 한참이네"(<소양호>)라고 마을과 함께 '수몰된 기억'을 안타까워하고, "호수가 많아 / 안개도 심한 도시에는 / 슬픔과 거짓말도 안개처럼 많다 / 아침마다 신문이나 우유가 배달되듯 / 안개꽃이 배달되기 때문 / 슬픔과 거짓말 따위는 별책 부록 혹은 광고 전단지 같은 것"(<안개꽃>)이라고 안개의 도시의 특별함을 노래한다. 

'창문에는 커튼 대신 담요를 걸었다'

시인의 고향이 바로 안개의 도시 춘천이다. 시인은 1969년 춘천시 옥천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래서 춘천은 가장 원형적인 시인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공간이다. 첫 시집 <손금을 본다>에 수록된 시 '옥천동'은 시인이 태어난 '옥천동 11-15번지'에 관한 가슴 시린 기억이다. 

녹색 철대문
붉은 기와지붕
엔티끄한 목조 창틀에
겨울이면 자리끼가 얼어붙어
창문에는 커튼 대신 담요를 걸었다 
('옥천동')


'자리끼'란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마시기 위해 머리맡에 두는 물을 가리킨다. 그 자리끼가 겨울 때마다 얼어붙어서 창문에 담요를 걸어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풍경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책상만 한 밭뙈기 하나 없이 / 평생을 소작으로 늙으신"(<시인의 책상>) 분이고, 어머니는 "항상짐을머리에이고계셨습니다"(<가족). 그 시리도록 가난한 풍경은 시인에게도 그대로 겹쳐진다.

반지하방
시인의 책상 위로
다람쥐 꼬리만큼 햇살이 비춘다
햇살이 닿지 못하는
방구석에는
우울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었다

책상만 한 밭뙈기 하나 없이
평생을 소작으로 늙으신 아버지처럼
시인의 책상 위
풍년의 기억은 없고
('시인의 책상')


시인은 1989년 아주대 영문과에 입학해 대학내 유일한 문학동아리인 '소금꽃'에서 활동했다. 대학 동기이자 시인과 함께 소금꽃에서 활동했던 김형규씨는 "시인이 활동한 <소금꽃>은 1989년 하반기에 준비 모임이 생기면서 발족했다"라며 "시인을 비롯해 선배와 동기들이 시작했으니 김승욱 시인도 창립멤버다"라고 <오마이뉴스>에 전했다.

동아리 이름으로 선택한 '소금꽃'은 '노동자의 등에 흐르는 땀방울이 마르며 피어나는 자국들'을 가리킨다. '소금꽃'의 한 회원은 지난 2018년 인하대 홍보대사와 한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정권의 압제에 저항하는 이른바 운동권 동아리였고, 소금꽃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정해졌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김형규씨는 "동아리의 애초 시작은 진보적인 집단창작단을 표방했지만 당시 운동권 조직과 직접 연관된 동아리는 아니었기에 '운동권'이란 규정이 정확하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각자의 Fight Color 전쟁터에 나선다'

시인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동양화재(현 메리츠화재), 동부화재(현 DB손해보험)에서 일했다. 28년여 동안 보험사 기업영업부에서 근무하며 임원(상무)으로까지 승진할 정도로 지독한 "회사-인간"으로 살았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화이트칼라가 된 남자를 / 자랑스러워했다"(<화이트칼라>). 하지만 28년의 "회사-인간"은 "닭장 같은 빌딩에 갇혀 / 모이통과 물통을 번갈아 / 쪼아 대며"(<무뢰한>) '전쟁터에 나가는 총알받이'였다.

아울렛에서 산 양복을
갑옷처럼 걸치고
페라가모 넥타이는 회사에 대한 충성의 개 목걸이
흰색 와이셔츠는
남자가 속한 계급의 가장 확실한 정체성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더 이상 색깔로 계급을 논하지 않는다
자율복장제로
양복과 넥타이는 장롱 깊숙이 유배된 지 오래

계급이 모호해진
전쟁터에선 
화이트도 블루도
모두가 총알받이
각자의 Fight Color
전쟁터에 나선다.
('화이트칼라)


양복과 페라가모 넥타이, 흰색 와이셔츠는 시인의 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화이트칼라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색깔로 계급을 논하지 않"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렇게 "계급이 모호해"졌지만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회사의 총알받이'인 'Fight Color'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자랑스러운 '화이트칼라'로 입사한 시인은 어느 새 '파이트칼라'가 된 것이다. 

시인의 누나인 김양선 한림대 교수(현 김유정학회 회장, 여성문학론 전문가)는 시집 발문('병과 마주하며 비로소 보인 것들에 대한 기록')에서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쯤 지하철을 타고 강서구에서 여의도나 강남까지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라며 "대학에서 영문학를 전공하고, 작가를 꿈꾸며 문학동아리에서 글을 쓰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루틴이다"라고 썼다. 

"시인이 갓 직장인이 되었을 때 필자는 가끔 영업맨이라는 사회적 옷을 걸친 그가 직장이라는 전장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전공을 살려 출판 일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필자의 좁은 소견이었다. 시인은 묵묵히, 찬찬히, 공황장애가 올만큼 실적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이 일을 즐기며 해왔다."
 
김승욱 시인은 28년의 회사 생활 끝에 암을 얻었지만, 첫 시집 <손금을 보다>도 낼 수 있었다.
 김승욱 시인은 28년의 회사 생활 끝에 암을 얻었지만, 첫 시집 <손금을 보다>도 낼 수 있었다.
ⓒ 파란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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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여도가 서여의도를 규정짓는 유물론적인 섬'

김양선 교수는 "시인의 이전 밥벌이 현장과 관련된 재치있고 날카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시로 앞서 소개한 '화이트칼라'와 함께 '여의도'를 꼽았다. 시 '여의도'에는 하부구조(경제)가 상부구조(정치)를 결정한다는  고색창연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결정론'이 나온다. 그것을 증권가인 '동여의도'(하부구조),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상부구조)와 연결시키며 여의도를 "유물론적인 섬"이라고 표현한 데서는 풍자 이상의 묘한 통쾌함이 느껴진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적 결정론은
하부구조인 경제구조가 
상부구조인 정치를 결정짓는다고 했던가.
고리타분한 교조주의를
신용카드보다 믿었던 적도 있었다.
동여의도는 증권가
서여의도는 여전히 정치 1번지다.

하부구조인 동의여도가
상부구조인 서여의도를 규정짓는 
유물론적인 섬.
하지만,
누구도 소유하기를 꺼려
너나 가지란 뜻으로 불리는
여의도의 정치경제학이다.

여의도 백화점 지하
진주집에서
콩국수를 먹으며 생각한다.
백화점도 아닌 백화점 건물,
콩국수에는 취향껏

설탕도 넣고 소금도 넣는다.
마르크스주의보다 실용적인 콩국수 취향이다.
('여의도')


'지금은 달라 생명선만 파고든다'

하지만 갑자기 암이 시인을 찾아왔다. 식도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하고 회복한 뒤에 복직했다. 하지만 암은 폐까지 전이돼 결국 퇴직했다. 6개월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시인은 "사회적 삶의 절정기"에서 긴급하게 내려와야 했다. "엄마의 바람처럼 / 길게 길게 살아져야 할텐데"(<명주실 타래>) "아침마다 / 생명선을 관찰하며 / 반달 같은 엄지손톱으로 / 생명선 끝을 꾸욱 누른다 / 간절함을 담아 / 길고 깊게"(<손금을 본다>) 생명선을 눌러야 하는 처지가 됐다. 

팍팍한 운명은
각개전투를 하듯
지문과 손금 사이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 전진한다
지능선과 감정선, 운명선을 넘어
젊은 시절은
재물선이 제일이었다지만
지금은 달라
생명선만 파고든다

모든 운명이 철모를 쓰고
생명선 참호를 따라 진격하는 날이다
(<손금을 본다-다른 Ver>)


그래도 퇴직한 후에 매일 걷고,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있다. 그 덕분에 '춘천의 문학청년'(문청)은 50대 중반에 첫 시집을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람 인생은 끝 모를 때가 간혹 생겨 기적 같은 비극이 노상 펼쳐"(<끝>)지지만 다시 시를 쓰는 일은 그에게 '또다시 꿈꾸는 일'이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도  "하얀 시들이 / 차오르며 발목을 잡아 / 날이 새도록 작은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했"(<초동, 시로 물들다>)지 않았나? 

이경수 문학평론가는 추천사에서 "김승욱의 시는 성실한 가장이자 직장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시인이 어느 날 갑자기 짊어지게 된 병마와 싸우면서 얻은 시편들이다"이라며 "원망과 슬픔과 절망의 시간을 지나, 지나온 삶과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시인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를 쓰는 꿈을 되찾는다"라고 썼다. 

김양선 교수는 "지금까지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월급쟁이로 가속의 페달을 밟으며 살아왔던 생활에서 모처럼 멈춤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가족을, 공간을, 과거의 시간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시인의 근황을 전했다. 

태그:#김승욱, #손금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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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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