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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고 권중희 애국지사가 양지바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되었다.


고인이 안장된 곳은 고인의 순결한 조국사랑의 마음인양 순백의 첫눈이 곱게도 쌓인 모란공원에서도 유난히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양지에 당신을 모실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68)씨는 먼저 간 동지들이 있는 모란공원의 양지바른 곳에 이렇듯 권중희 지사가 안장되는 것을 보며, 고인이 지하에서나마 동지들과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였다.

 

물론 권중희 선생의 가정형편이 어려워 뜻있는 분들의 지원금으로 500만원의 1차 장지비용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직 그만큼을 더 내야하고 묘비도 아직 세우지 못해 계속 모금을 해야할 형편이다. 


서울 토박이인 김영자씨는 누군가의 소개로 권중희 선생은 만났는데, 첫 순간부터 경상도 사나이의 박력 있고 솔직한 성품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김영자씨의 말에 의하면 권중희 선생의 가정이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87년 회사를 그만두고 안두희에게 매달리기 전에는 남편이 회사생활을 잘 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87년 갑자기 사표를 쓰고 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겠다고 가족들에게 선포하고 그 일에 매달리면서 가정이 어려워졌고 내가 유통회사에 취직하여 판매원 일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편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을 한 지 이제 꼭 20년이 흘렀다. 20년 간 그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2명의 고 권중희 선생의 친누나도 “어린 시절 동생은 명석하여 공부도 아주 잘했고 누나의 말도 그렇게 잘 들었다며 그런 동생이 먼저 가다니…”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니 자라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능력있는 회사원으로, 그리고 모범적인 가장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그런 권중희 선생이 매국노들에 대한 의분으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일에 나서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던 것. 한때는 단칸방 세도 낼 형편이 못 되어 소를 키우려고 지은 송추의 한 우사에서 5년 여 간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권중희 선생은 생전에 그 송추 우사에서 살던 시절을 필자에게 회고하면서 "한 번은 잠을 자는데 얼굴이 근질근질해서 눈을 떠보니 쥐가 입술에서 고인 침을 빨아먹고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며 "생쥐랑 뽀뽀해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껄껄 웃으면 말한 적이 있다.

 

"비닐하우스 보온용 덮개를 덮은 우사에 찬바람이 들이치기는 했지만 남편이 워낙 부지런해서 산야에 널려있는 나무 등걸 등을 손수레에 가득 싣고 와서 도끼로 팬 뒤 난로에 넣어 방안 공기만은 항상 훈훈하게 해주었다. 손재주도 그렇게 좋아서 지나가는 말로 ‘선반이 하나 있었으면’하면 금방 선반을 만들어 걸어 주기도 했다. 못 만드는 것이 없었고 잠시라도 손을 놓고 쉬는 적이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땅속에 묻어야 한다니 얼마나 답답해할지 가슴이 미어진다.” 
 
김영자씨는 우사에서의 그 어려운 생활도 권중희 선생의 따뜻한 사랑으로 인해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권중희 선생을 존경하는 한 사업가가 문산에 새로 지은 깨끗한 원룸에 권중희 선생 부부의 거처를 마련해주어 따뜻하게 생활했고 글도 쓸 수 있었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 권중희 선생은 우스갯소리도 잘하여 힘들어하는 아내의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고 한다.


“임자는 얼마나 살고 싶나?”

“이렇게 5~6년만 건강하게 살다 가면 되지, 더 뭘 바라겠나요.”

“나는 100살까지 살 텐데 임자가 그렇게 일찍 가면 나 혼자 심심해서 어떡하나, 같이 오래오래 살아야지, 내가 호강은 시켜주지 못했어도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아?”


운명하기 며칠 전에도 권중희 선생은 이런 농담으로 김씨의 마음을 녹여주었다고 한다.  김영자씨는 그런 남편의 묘소를 자주 찾고 싶다며 무릎관절염이 심하기 때문에 묘소가 있는 곳의 경사가 높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리고 "모란공원에 마련된 묘소를 직접 와서 보고서는 마음이 푹 놓인다"며 "이런 곳이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장지 문제가 아직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묘비도 세워야 하고 500여만원 남은 잔금도 치러야 한다. 1000여만원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중희 정신계승사업회 준비위원회에서는 뜻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의 심정으로 계속 모금을 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박해전 공동장례위원장은 "권중희 선생에 대한 평가는 지금 우리가 다 내릴 수가 없다"며  "역사가 바로잡히면 반드시 재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때까지 화장을 하지 않고 권중희 선생의 유해를 그대로 모실 필요가 있다"고 관심을 부탁하였다.


박해전 위원장은 장지비를 다 정산하고 묘비와 상석을 세운 뒤 남은 후원금은 김영자씨에게 모두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그:#민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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