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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란 인간의 고통 위에 드리워진 큰 지붕일 뿐이야. 이 방에는 두 남자와 고통밖에 없네.”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도시 비엔나. 나치즘의 횡포가 극을 향해 치닫는 참담한 시절, 오늘날까지 정신분석의 교조로 추앙받고 있는 프로이트 박사(이남희)가 내뱉은 말이다. 그런데 이런 탄식을 내뱉게끔 한밤중에 프로이트의 저택을 찾은 이는 누구인가. 정신병원을 탈출한 뒤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쫓기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 과대망상 미치광이인가 아니면 …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짖궂게도 오줌누기에 대한 외설스런 농담을 하는 신일까.

 

 

전통의 연극명가《산울림》에서 무대화한 <방문자 Le Visiteur>는 서가가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서재에서 관객들을 맞는다. ‘내 기쁨이요, 내 근심이요, 내 자부심’이라며 아끼는 딸 안나 프로이트(이혜원)가 상스러운 나찌의 졸개(김은석)의 강압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프로이트. 그 앞 책상 위에 한 장의 서류가 놓여 있다. 망명 신청서…. 강제 추방의 요식 절차에 불과한 서명 날인을 앞두고 유태인 공동체와의 의리를 배신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늙고 병든 프로이트 앞에 매끈매끈한 얼굴의 한 방문자(김수현)가 찾아온다.

 

이후 심재찬 연출의 <방문자>는 국가주의 일당 정치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르는 합법적 폭력에 의해 철저히 망가져가는 세상을 지켜볼 밖에 없는 무력한 지식인과, 그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히지 않는 심야의 방문자 사이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서재 바깥으로부터 연일 수용소로 끌려가는 자들의 비탄과 비명을 견뎌야 하는 프로이트는 방문자에게 논리적인 어법으로 ‘듣고 싶은’ 답변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마실 것도 없이 갈증만 주는 “신이 인간에게 정신을 베푼 것은 그 한계를 인식하라는 것 뿐”이라며 황막한 절망감 속에서 탄식하는 프로이트. 이에 대해 그것은 인간의 오만함일 뿐이라며 예의 ‘자유의지’를 논하는 방문자의 말에 격분한 노학자가 항변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거짓말만 하는 신일 거야.”

 

이에 ‘세상이 울고 있고, 딸들은 게슈타포에 잡혀 있는 밤’에 ‘왜 자네는 믿음을 갖길 두려워하는가?’라고 방문자가 되묻자 프로이트는 ‘믿음이란 위험한 욕망’이라고 받아친다. “아니 그게 어디에 위험하단 거지?” 조롱하듯이 묻는 방문자를 향해 정신분석의 대가는 외친다. ‘신앙은 진실에 위험해. 믿기를 원하는 것은 내 안의 짐승이다.’

 

프로이트가 신과 흡사한 이 방문자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대체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의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어 자기 엉덩이를 닦아내는 만행’이 존재해선 안 된다는 도덕적 신념 때문이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악이다.

 

“악이란 지켜지지 않은 삶의 약속이지” 라며 신은 악마요 사기꾼이라고 비방하는 프로이트. 급기야 이 연극 최대의 역설 중의 역설이 폐병을 앓고 있는 프로이트의 입을 통해 탁한 연기처럼 터져나온다. “만일 신이 내 앞에 존재한다면 난 이렇게 말할 거야. ‘신은 존재하지 않아.’”

 

 

1시간 넘게 격돌하는 프로이트와 방문자의 극적인 논쟁은 끝까지 평행선을 달린다. 비인간적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신의 정의로운 효용성을 묻는 프로이트와 ‘인간들이 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하고 신의 초월적인 당위성에 주목하는 방문자 사이의 괴리는 저저끔 맴돌이하는 경험적 한계 때문에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다 프로이트의 딸 안나가 게슈타포로부터 돌아온다.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방문자의 예언이 실현된 것일까. 아니면 이는 우연의 소산이었을까. 수용소로 끌려갈 수도 있었을 불운을 기지를 통해 안나는 모면했다. 이것도 신의 뜻이었을까. 어떤 쪽으로 해석하든 안나가 돌아온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신 존재를 둘러싼 논쟁이 언어로 표현될 때, 그것은 신념의 상대성의 표출일 뿐임을 암시하고 무대는 끝장에 다가간다.

 

<방문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이트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떠나려는 방문자에게 요구한다. “창문이나 다른 출구로 나가지 말고 내 눈 앞에서 그냥 사라지는 기적을 보여 줘!” 이런 요청에 오래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어넘긴 방문자는 스스럼없이 창문을 통해 사라진다. 참지 못한 프로이트는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저 아래 지붕을 타고 사라지는 방문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만일 그 심장에 관통한다면 죽은 것은 신일까 인간일까 한밤중의 꿈일까.

 

 

요즘 고전적인 스타일로 각광받는 <방문자>는 올 9월28일까지 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에서 품격 높은 정통극의 세계를 마련해 놓고 있다. 


태그:#산울림, #방문자, #심재찬, #이남희, #에릭-엠마뉴엘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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