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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트 사람 나투
 달리트 사람 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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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혀 끝에서 나온 것이 곧 법이다."

마을의회 의장은 나투에게 '내 말이 곧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나투가 마을의회의 임원으로 당선된 뒤 마을의회의 의장 및 다른 임원들과의 수 차례 갈등 속에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나투는 구자라트의 테다지역 마리다 마을에서 살아왔습니다. 달리트 중에서도 '발미키'에 속해있으며, 발미키는 가장 천한 일을 하는 달리트로 박대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나투도 발미키들이 담당하는 일 중의 하나인 화장터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한 달에 1100루피를 받고 있습니다. 달리트에 대한 의석할당제에 따라 나투가 당선되기는 했지만, 의회 의장의 말처럼 마을은 법과 정의가 아니라 마을을 이끌어가는 상층카스트들의 혀끝이 마을을 통치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스트에 따른 질서와 전통은 오랜 세대에 걸쳐 형성된 공동체가 살아 있는 시골 마을에서는 강하게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판차얏'이라고 불리는 인도의 의회제도는 지방자치제도입니다. 가장 기초 단위는 마을판차얏으로 마을의 인구 수가 3천 명 이하인 경우 7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인구 수가 3천 명이 넘어가면 1천 명 당 두 개의 의석 수가 추가로 할당됩니다. 18세 이상의 남녀는 선거권을 갖게 되며 의원대표를 비롯해 의원들은 선거를 통해 구성됩니다.

마을판차얏은 한 개 마을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마을 인구 수에 따라 두 개 이상의 마을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마을 다음의 행정단위인 블록 단위의 의회를 구자라트에서는 '탈루카 판차얏'이라고 부르는데 몇 개 마을이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다음 행정단위인 구역 단위에서도 판차얏제도가 있습니다. 판차얏제도는 세금과 토지를 관리하며, 중앙정부와 주정부에서 제공하는 여러 정책과 서비스들은 이 판차얏제도를 통해 실행됩니다.

마리다 마을 의회에 참석하는 의원들은 9명으로,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 1인, 마을의 세금과 발전을 담당하는 행정공무원 1인, 그리고 나머지는 의원들로 나투만이 달리트 출신입니다. 나투는 마을의회 내에서도 사회정의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의회의 첫 공식회의에서부터 사건은 발생했습니다.

마리다 마을의 의회사무실. 마을 입구에서 들어와 상층카스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쪽에 위치해 있다.
 마리다 마을의 의회사무실. 마을 입구에서 들어와 상층카스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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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회의] "방기가 감히 의자에 앉아?"

"1월에 첫번째 회의가 열렸어요. 의회 사무실에 의자가 놓여 있었지요. 다들 의자에 앉았어요. 나도 앉았어요, 맨 뒷자리에. 그건 사건이에요. 달리트 출신 의원들이 의자에 앉은 적이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죠. 한번 해보자.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다른 의원들 모두 날 쳐다봤어요. 용납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죠.

회의는 그 눈초리 속에서 진행되었고, 난 계속 앉아 있었어요. 회의가 끝나고, 의장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죠. '방기 주제에 감히 의자에 앉아? 너가 의자에 앉으면 의자가 오염돼서 앉을 수가 없어. 가서 의자 씻어 와.' 의자를 씻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뒤부터 바닥에 앉았죠."

나투가 첫번째 회의에서부터 의자앉기를 시도한 것은 우발적인 발상이 아닙니다. 의회와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달리트 출신들이 의자에 앉지 못하는 관행 또한 단지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법을 집행하는 법원에서조차 달리트 출신 판사가 임기를 마치면 신성한 강물을 받아 그가 앉은 의자를 씻은 뒤 사용하는 사례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나투가 공식 회의에서 의자에 앉은 건 공적인 영역에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카스트적 관행을 깨고자 하는 도전이자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인도가 독립하면서 제정한 헌법에는 달리트에 대한 '불가촉성(untouchability)'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1989년에는 달리트에 대한 잔학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에서 규정한 범죄행위의 내용을 보면 과거에, 그리고 지금까지 달리트들에 대해 어떤 폭력과 차별행위들이 이루어져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범죄행위는 22가지로 규정되어 있고, 그 첫번째는 먹을 수 없거나 아주 불쾌한 음식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거나 먹이는 행위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 항목이 첫번째가 되었는지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이 행위가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는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분뇨나 쓰레기들을 달리트들이 사는 곳에 버리는 행위, 강제로 옷을 벗겨서 알몸으로 길거리를 나다니게 하는 행위, 투표를 못하게 하거나 특정한 후보에게 강제로 투표하게 하는 행위, 달리트들에 대한 살인 및 강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달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달리트에게 행했을 때 범죄행위가 됩니다.

법을 통해 행위를 규정하고 금하는 것은 이런 행위들이 그만큼 다반사로 벌어졌었다는 걸 반영합니다. 그 모든 형태의 차별과 잔학행위를 법의 테두리로 다 열거할 수도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상적으로, 강도 높게 행해진 행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투에게 행해진 것과 같이 공적인 자리에서 모멸감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욕하고 위협하는 행위도 이 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는데, 실제 많은 이들이 개의치 않는 걸 보면 이 법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지도 모릅니다.

사무실 내부. 평소엔 아무도 없다. 왼쪽은 인권활동가 칸티, 가운데는 나투.
 사무실 내부. 평소엔 아무도 없다. 왼쪽은 인권활동가 칸티, 가운데는 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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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회의] "넌 과자도 따로 먹어!"

그 다음달, 두 번째 회의가 열렸습니다. 나투는 여전히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들 가운데 나투를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을에서 힘있는 사람은 의회를 이끌어가는 의장이었고 의장을 떠받치는 의원들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달리트에게 의석이 할당된 것처럼 여성에게도 두 개의 의석이 할당되었지만 실제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남편들입니다. 남성 중심의 봉건적 사회가 당연시해 온 악습입니다. 이들은 특히 의장을 지지하며 나투가 의자에 앉지 못하도록 협박했습니다. "앉기만 해봐. 다리를 분질러 버릴테니."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간식용 과자가 나왔습니다. 모두들 테이블에 과자를 부어 함께 먹었지만 나투만 따로 먹었습니다. "종이를 찢어서 거기에 과자를 줬어요. 함께 먹을 수 없다면서요. 그것도 당연한 거였죠, 그들에겐."

세 번째 회의에서 나투가 마을의 발전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을 때, 의장은 나투에게 경고했습니다. "넌 그런 이야기를 할 권리가 없어. 달리트 주제에. 우리가 뭘 할지는 내가 결정해. 내 말이 법이야."

사실 달리트 차별에 대한 나투의 힘겨운 싸움은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달리트 소유의 토지를 상층카스트 출신의 마을 사람들이 침범하고 빼앗으려고 했을 때, 나투가 토지소유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힘없는 달리트들은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싸우기 시작하면 지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달리트들은 나투가 달리트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나설 것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카스트와 봉건질서 앞에 무력한 법

어느 마을이든지 마을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세력은 브라민이나 크샤트리아로 구성된 상층카스트들입니다. 상층카스트들이 대부분 토지를 소유하거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있고, 정치세력이나 경찰세력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카스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카스트적 관계망은 상층카스트들이 행한 범죄를 범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고, 법은 카스트적 신분질서 앞에서 무력합니다.

마리다 마을은 조금은 특이하게 상층카스트가 아니라 'OBC(Other Backward Class)'라고 불리는 후진계급들이 마을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을이 형성된 이래로 양적으로 증가한 타코르라는 후진계급들은 마을 내 토지 소유를 확장시키면서 정치력도 성장시켰습니다.

상층카스트인 브라민이 마을의회의 의장에 당선되면 힘을 이용해서 물러나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상층카스트들은 마을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자,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타코르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욱더 강성해졌고, 타코르는 타코르들끼리 더욱 뭉쳐서 세력을 형성해나갔습니다.

소수의 상층 카스트들이 후진계급 타코르들에게 밀려나가는 동시에, 같은 타코르 내에서도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은 중심세력에서 밀려났습니다. 이들은 마을 내 타코르 공동체의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매우 영세하며 중심세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밀려난 타코르들 가운데 카스트 차별에 반감을 느끼면서 달리트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내에서 후진계급들의 불안정한 지위가 타협할 세력을 찾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다섯 살 어린 신부
 다섯 살 어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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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트들을 지지하는 타코르들은 나투의 일에 협력하면서 종종 마을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달리트 내에서조차도 발미키에 속하는 달리트들과는 집을 찾아가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꺼리는데, 이제는 나투네 집에 찾아가고 나투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마리다 마을에 찾아간 날도 나투와 친구가 된 타코르네 다섯 살 날 어린 딸의 정혼식이 있었습니다. 나투도 초대받았습니다.

달리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거나 카스트적 질서를 반대하는 것은, 남성중심적 봉건질서나 오래된 전통 힌두사회에서 보여지는 불합리성이나 불평등을 인식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마을에서는 다섯 살 어린 신부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날을 맞이하고 있고 여성들은 한쪽에 모여 남성들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어린 신부의 눈빛이 어쩐지 두려워 보였습니다.

남성들이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들.
 남성들이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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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차별이 아니라구요?

몇 달이 지나도 나투는 마을의회 회의에서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고, 발언권이 무시되고 협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나투는 법의 힘을 받기로 하고 의회의장과 몇몇 의원들을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지역경찰은 고소 접수를 거부했습니다. 달리트들이 차별이나 잔학행위에 대해 고소를 할 때 직면하게 되는 첫번째 싸움입니다. 여러 차례 항의 끝에 고소는 겨우 등록되었지만, 나투는 법정 첫번째 심의에서 더 큰 벽에 부딪쳤습니다.

판사는 펀잡 출신 시크교도였습니다. 판사는 나투에게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카스트로 보면 펀자비네. 사람들은 펀자비라고 부르는 대신에 시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난 그걸 모욕하는 걸로 받아들이지 않아. 이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나는 그렇게 느껴. 왜 고소를 한 거지? 내 집무실에서도 난 접대용으로 두 종류의 접시를 사용해. 그저 사람에 따라 다른 접시를 내놓는 거야. 불법행위도 아니고 차별행위도 아니지.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해. 그걸 차별로 받아들이다니 말도 안되지. 내가 주나가드 지역 법원에서 근무할 때도 난 파텔(상층카스트에 속함)이 담배를 권할 때만 불을 붙였어. 상층카스트가 아니면 담배 같이 안 피워. 그게 정상이야."

어떤 형태의 차별이든지,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하는 말입니다. 별 것도 아닌데 민감하게, 혹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차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속한 특정한 집단이 갖는 사회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달리트에 대한 차별이나, 다른 하위 카스트들에게 행해지는 형태의 차별, 장애인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모두 그렇습니다. 마리다 마을도 카스트별로 모여 살고 있고, 마을의 달리트들은 여전히 힌두사원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인도의 판사조차도 국가에 의해서 제정된 법에 따라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층카스트의 혀끝과 카스트 관습법에 따라 '정상'을 규정하고, 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투는 판사를 상대로 다시 고소를 해야했습니다. 언제쯤 법 앞에서 평등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발미키들이 사는 구역. 마을 가장 바깥쪽에 따로 위치해 있다.
 발미키들이 사는 구역. 마을 가장 바깥쪽에 따로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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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카스트, #달리트, #불가촉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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