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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냈나?"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스팅 폴먼의 목소리에 테스 월터는 소름이 쭉 끼쳤다. 마치 수화기에서 뱀이 기어 나와 젖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테스는 강심제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덜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아, 덕분에,"

 

"1주일이라는 시간은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에 그리 부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꼭 그래야만 하겠어?"

 

"하하하!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물론 피차에 마찬가지겠지만."

 

테스 월터와 스팅 폴먼은 건축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예일 대학의 건축학부와 대학원을 함께 졸업한 사이였다. 한때는 결혼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가까웠지만 스팅이 한눈을 파는 바람에 그냥 친한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었다. 학업을 마친 다음 테스와 스팅은 각각 건축설계와 시공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테스의 설계사무소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설계로 정평이 났고 스팅의 시공회사에게 일을 맡기면 절대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얻었으니, 두 사람의 성취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테스와 스팅이 의기투합하여 '장애어린이들을 위한 복지센터'를 무료로 지어주기로 하자 그 바닥은 물론, 지역사회의 칭송이 융단폭격처럼 쏟아졌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완공직전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두 사람이 심각하게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초석(礎石) 옆에 세울 조형물에 있었다. 그 조형물에는 '테스 건축설계사무소가 헌납한다'는 문구를 넣기로 했는데, 그것을 스팅이 걸고 넘어진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 이름을 넣어주면 고맙겠어. 시공자의 이름을 말이지."

 

"그러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의사를 분명히 밝혔어야지, 그리고 설계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관행이라는 것을 몰라? 잘 아는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테스, 계약사항에 그런 부분이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입 아프게 다시 한 번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관행이라는 것이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어렵다는 것은 너도 잘 알리라 믿어."

 

"하지만 관행을 무시할 수는 없어..."

 

"하하하! 관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조형물에 반드시 설계자의 이름을 새겨야 한다는 법 조항이라도 있어? 시공자의 이름이 새겨지면 안 된단 법이라도 있느냐 말이야! 네가 설계를 했다지만 그 건물을 직접 지은 것은 바로 나야, 있는 뺑이 없는 뺑이 다 친 내가 왜 네게 꿇려야 하지?"       

 

"스팅, 남자답게 판단하고 처신하기를 바래."

 

"이건 남자와 여자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설계자와 시공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지, 나는 이번 기회에 시공자의 명예를 확실히 주장할 생각이니까."

 

스팅은 단호했다. 테스는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나 같으면 인정에 호소할 시간에 차라리 변호사를 부를 거야."    

 

스팅이 대 놓고 빈정거렸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조형물을 설치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시공자는 어디까지나 스팅 풀먼이었다. 스팅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조형물을 설치하고 나면 그것으로 상황이 끝날 확률이 컸다. 항의를 해 봐야 복지사업에 이바지한 공로만 크게 훼손당할 것이었다. 게다가 기자들이 덤벼들어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면 테스는 이름 날리고 싶어서 환장한 여류건축가로 매도당할 뿐이었다. 물론 그 다음에는 순조로운 파멸의 과정을 밟겠지만, 스팅은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 다음일 터였다.

 

"테스, 우리 서로 한 걸음씩만 양보하는 게 어때?"

 

스팅이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했다.

 

"지금의 문제는 바로 이름에 있잖아? 그러니까 조형물에 새길 이름을 누구 하나로 고집하지 말고 우리들의 이름을 함께 새기면 어떨까?"

 

"생각할 시간을 줘,"

 

"알았어, 30분 뒤에 전화하지."

 

테스는 스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렸다. 어쨌든 그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은 이름 때문에 싸우고 있었고 서로의 이름을 양보하지 않으려는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 스팅이 서로의 이름을 함께 새기자고 제안한 것은 크게 양보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제작할 사람이 누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결론은 간단한 것이었다. '스팅 - 테스가 헌납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조형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누가 승리자인지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다시 전화기가 울었다. 흘긋 시계를 보니 스팅이 전화하려면 아직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스팅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아닐 것이었다.

 

"제군, 날세."

 

대학 시절의 은사이시며 건축설계의 세계적 권위이신 로널드 테일러 교수였다.

 

"자네, 무슨 일을 그렇게 하고 있나? 내가 겨우 시공자 따위에게 휘둘리라고 가르쳤던가?"

 

"저, 그게..."

 

"만일 나를 실망시키는 날에는 각오하게나!"

 

미처 뭐라고 말 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날세,"

 

스팅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건축시공의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크라이튼 셀런 교수였다.

 

"이번 기회에 설계를 한답시고 책상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놈들의 콧대를 꺾어주게나!"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자네만 믿겠네."

 

크라이튼 교수와  로널드 교수가 예일대학 본관이 무너지도록 대판 싸운 것은 2주일 전쯤이었다. 미국건축학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두 사람 가운데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로널드 교수였다. 그가 "오늘날 미국건축의 문제는 설계의 요구를 시공이 따라 잡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규정한 다음, "무능한 시공자들을 양산한 자들에게 더욱 큰 책임이 있다"며 한바탕 성토했다.

 

그러자 크라이튼 교수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곧 "시공은 설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 다음, "무능한 자들은 항상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며 일대반격을 가했다. 발언이 끝난 즉시 두 사람의 최고 석학이 시정잡배처럼 치고받는 추태를 연출했다. 예일로 돌아온 다음에도 화해시키려는 총장 앞에서 대판 싸워대어 학교 망신을 시켰다. 전혀 그들답지 않은 치졸한 주먹다짐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세운 대리전은 치열하고 매서웠다. 

 

"그래, 결정했나?"

 

정확히 30분 12초 지난 시간이었다.

 

"음, 스팅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아주 현명한 판단이야. 그럼 조형물에는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새기는 것으로 하지."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

 

스팅의 목소리에서 경계경보가 느껴졌다.

 

"조형물에 들어갈 문구를 내가 잡으면 안 될까?"

 

"흐음......,"

 

"물론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비율로 포함될 거야. 누구의 이름이 크거나 작지도 않고 정확히 50%씩 들어가게 쓸 테니까, 그 대신 조형물의 제작은 네게 전적으로 일임할게."

 

스팅은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을 직감했다. 그는 가만히 테스의 말을 점검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테스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을만한 것은 없었다. 만일 테스가 '테스 - 스팅'으로 문구를 잡는다고 해도 그리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거기에 스팅에게 조형물 제작의 전권을 준다고 했으니,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조형물의 다른 부분에 크라이튼 교수의 이름을 포함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뭐."

 

"스팅, 정말 고마워! 그럼 내가 문구를 잡을 테니까 그대로 새겨주기를 바라."

 

"물론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한 것에서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모든 것은 끝장이야!"

 

"그것은 걱정하지 마, 그럼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알겠어."

 

1주일 뒤, 테스 월터의 사무실,

 

"야! 어떻게 이런 문구를 잡을 수가 있어!"

 

수화기에서 스팅 풀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걸 문구라고 나에게 보냈느냐는 말이야!"

 

"그게 어때서?"

 

테스는 전 같지 않게 매우 차분했다.

 

"네가 보낸 문구를 읽어 줄 테니까 귀가 있으면 똑똑히 잘 들어! '테스가 헌납합니다' 바로 그거 아냐!"

 

"맞아, 그게 내가 작성해서 네게 보내준 문구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분명히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포함시키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래서 같은 비율로 포함시켜서 작성한 거 아냐? 내 이름인 테스에서 앞 글자를 따고 네 이름인 스팅의 앞 글자를 따왔어, 그러면 정확히 50%씩 포함한 것이 되거든."

 

"이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 치워! 이건 사기야, 그러니까 없던 것으로 해!"

 

"그래? 그러면 이걸 들어보는 것이 좋겠군."

 

테스가 옆에 놓인 카세트를 틀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비율로 포함될 거야. 누구의 이름이 크거나 작지도 않고 정확히 50%씩 들어가게 쓸 테니까, 그 대신 조형물의 제작은 네게 전적으로 일임할게.'

 

'스팅, 정말 고마워! 그럼 내가 문구를 잡을 테니까 그대로 새겨주기를 바래.'

 

'물론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한 것에서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모든 것은 끝장이야!'

 

'그것은 걱정하지 마. 그럼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알겠어......'


태그:#설계, #단편, #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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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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