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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보낸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즐기며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미술 개인전의 주제가 '보내는 봄'이어서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봄은 이제 오고 있는 중인데 벌써 봄을 보내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림의 주인공 이상옥 화백이 빙긋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럼 저 그림 속의 배꽃들도 떨어져 내린 것들이 아니란 말이군요?"

"물론 아닙니다. 그림 속의 배꽃들은 모두 지금 한창입니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내 무식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금요일(3월6일) 오후, 지난 3월 4일부터 서울 인사동 '이형아트센터' 4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동양화가 이상옥의 '보내는 봄' 전시장에서다. 전시장의 그림들을 대충 둘러보고 나오던 발길을 다시 돌렸다. 산수화나 사군자에 익숙해 있던 내 시각에 전시장의 그림들이 선뜻 들어오지 않아 대충 휘휘 둘러보고 나오던 길이었다.

 

 

"그림의 소재가 모두 배꽃이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림을 보는 무식은 이미 탄로 났으니 엉뚱한 질문이라도 해보는 수작이었다.

 

"제 작업실이 드넓은 배 밭 가운데 있거든요."

 

그녀는 2년 전부터 충남 당진에 있는 꽤 넓은 배 밭 가운데에 그림 작업실을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새하얀 배꽃에 매료되어 배꽃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매화꽃이나 진달래보다 뒤늦게 피는 배꽃은 새하얗고 청초한 모습이 다른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다, 그런데 꽃피는 봄날의 배 밭 가운데 있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어떻게 배꽃에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배꽃은 배꽃인데 전에 흔히 보던 배꽃그림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군자로 흔히 그려지는 매화꽃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배꽃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는 했지만 그림을 그릴 때 사실적인 묘사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배꽃을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배꽃을 보고 느낀 감흥을 간결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서 배꽃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배꽃의 이미지를 최소화하여 절제하고 여백의 공간을 넓게 열어둔 것은 아주 특이한 구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이상옥 화백의 그림들은 유채화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처럼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녀만의 매우 독특한 구상이 아닐 수 없었다. 유채화의 일반적인 경향은 풍경화처럼 구도를 잡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차 한 잔을 함께 마시며 작가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여백의 공간 바탕색들이 왜 대부분 녹색과 청색이냐고 물어보았다.

 

"공간의 바탕색은 제가 평소 좋아하는 색입니다."

 

이 화백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구도와 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화백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그림들에 대한 숨겨진 비밀들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전시된 그림들은 배꽃이 작지만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꽃이 차지하는 위치가 그림의 중심부가 아니라 한쪽 옆이거나 위쪽, 또는 아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여백이 유난히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구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식의 파격적인 구도는 전통미학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를 강조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넓은 여백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해방감을 갖게 하고 꽉 막힌 일상을 탈피하여 평안한 휴식과 넉넉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림을 대했을 때 낙화가 흩날리는 것으로 착각했던 그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들이 아니라 꽃송이들이었다. 꽃송이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도 불규칙한 것 같지만 리듬감이 있고, 여백의 공간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림 속에서 배꽃은 전체적으로 자체의 이미지를 초월하여 단지 꽃의 구성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뛰어 넘는다. 인식의 벽을 뛰어 넘어 관념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된 것이다. 배꽃의 사실적인 모습과 함께 보여주는 관념적인 또 다른 이미지, 이 얼마나 멋진 구상이고 표현인가.

 

이상옥 화백의 배꽃 그림에서는 실제적인 꽃이면서 관념적인 꽃이 되기도 하고, 환상적인 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꽃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의 눈으로 사유하는 꽃, 즉 관념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깊은 관념의 이미지를 보지 못하고 그냥 슬쩍 스쳐 지나치면 눈에 잘 잡히지 않는 배꽃그림, 그러나 마음과 정신을 모아서 바라보면 실제 이상의 또 다른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관념적인 그림이 바로 이상옥 화백의 배꽃 그림이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님도 이상옥 화백의 그림을 보는 시각은 많은 부분에서 기자의 시각과 공감하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 동양화가 이상옥 화백의 관념적인 배꽃그림 전시회는 3월 10일까지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상옥, #배꽃그림, #이승철, #여백의 미, #관념적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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