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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아니 처음으로 미국인이 우리 쉼터에서 숙박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원어민 영어교사로 입국한 더크는 고용을 약속했던 모 교육청의 일방적인 해고로 얼마 안돼 출국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출국에 앞서 근로계약 파기에 따른 손해 배상 청구 문제를 한국상사중재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처음에는 노동부를 통해 해결하려 했으나, 부당해고 건은 노동위원회를 통해야 하기 때문에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말에, 더크는 요즘 한국상사중재원에 부지런히 전화도 하고, 팩스도 보내면서 어떻게든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아닌 말로 더크는 지금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쉼터 사무실 직원들을 달달 볶고 있다.

 

사무실에 있다 보면 그런 더크와 마주치게 되고, 길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더크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시작할 때, 꼭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를 하고 나서, 곧바로 영어로 빠르게 이어가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더크가 말이 느려질 때는, 한국어를 섞어서 말을 해야 할 때인데, 가령, '경남'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그는 '켱남'이라고 강하게 발음하며, 말의 속도가 잠시 느려진다.

 

그런 더크에게서, 나는 뜬금없이 14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한 미국인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편의상 K라 하자)는 원목가구를 수출하는 사람이었는데, 매일 아침 덩치 큰 개를 데리고 우리 집 옆으로 산책을 하였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가구를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팔기 앞서 창고에 쌓아두고 검사하는 것이었다.

 

대개 인도네시아 가구는 만들고 바로 수출하면 원목이 쪼개지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K는 제품의 질을 높이고자, 완제품이 나온 후 반 년에서 일 년 정도, 상당한 시일을 창고에서 자연 건조시킨 후, 이상이 없는 제품에 한해 선적한다고 했다. 미국에 비해 창고 임대비용이 훨씬 저렴한 인도네시아이고 보면, K가 하는 일은 대단히 많은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사업이었고, 그는 늘 시간이 많아 보였다.

 

당시 K와 나는 시골 마을에서 보기 드문 외국인이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를 키운다는 공통점 때문에도 종종 길거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개를 키우게 된 것은 성탄절을 앞두고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선물로 받으면서부터였다. 개의 이름은 성탄절에 받았다는 뜻인 '나딸리'였는데, 이 녀석이 K가 지나갈 때면 늘 시비를 걸었던 탓에 K와는 거의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었다.

 

K는 오랜 인도네시아 생활로 지방 언어인 자바어도 곧잘 했지만, 발음에 있어서는 썩 신통치가 않았다. 특히 K.T.P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그에게 미국인은 "아빠 말을 잘 안 듣고, 신분증도 싫어한다"며 놀리곤 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영어권 사람들이 십 년을 살아도 잘 안 고쳐지는 발음이 K.T.P이다. 가령, Kaliurang이라는 단어를 인도네시아인들은 '깔리우랑'이라고 발음하지만, 미국인들은 '칼리우랑'이라고 발음한다. Tanpa라는 단어는 '딴빠'가 아닌 '탄파'라고 하고, Papan은 '빠빤'이 아니라, '파판'으로 발음한다.

 

이처럼 KTP 발음이 잘 되지 않는 K에게 "그 발음이 그렇게 안 되나"며 하던 말 중에, 우리말로 하면 주민등록증이라고 할 수 있는 KTP를 빌어, "미국인은 신분증(KTP, Kartu Tanda Penduduk)을 싫어해!"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뜻하는 (Ba)pak를 덧붙여 "미국인은 아빠 말(KTP, kata pak)을 싫어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더크를 보며 K를 떠올린 이유는 그러한 발음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틀린 발음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당당한 모습 때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발음이 서툰 그를 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가 곧 돌아갈 사람이란 걸 알기에 웃기만 했다.

 

하긴 발음이 좀 신통치 않아도 상대방이 알아들으면 큰 불편 없으니까 굳이 뭐라 할 일은 아니긴 하다. 만국공통어도 하는 마당에. 외국어 배우면서 발음이 엉성하다고 기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태그:#외국어, #발음, #인도네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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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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